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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31. 2023

흩날리는 집안일과 대혼돈의 정리 지옥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어머니께서 입원하시는 바람에 아버지와 나 둘이서 집안일을 꾸려야 했다. 다행히도 두 남자 모두 집안일에 무슨 편견을 갖고 있지도 않고 손을 써서 하는 작업은 대체로 뭐든 곧잘 하는 터라, 흔히 나오는 고루한 남자들의 전형처럼 양말 하나도 못 찾아서 헤매는 식의 난감한 지경에 처하지는 않았다.


다만 대부분 어머니가 전담하던 일들을 별안간 맡아서 하게 된 데다가 병원도 오가며 잡다한 심부름을 하다 보니 시간적인 문제가 상당했다. 밥도 챙겨먹어야 했고, 청소기도 돌려야 했으며, 빨래도 돌리고 장도 봤다. 이 중에서 청소는 로봇청소기가 기본적인 수준은 처리해주니 사나흘에 한 번 물걸레질을 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빨래를 널고 말리고 개서 넣는 일은 어쩔 수 없이 손이 많이 가서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심지어 간절기라서 이불이나 매트 따위를 세탁하고 널어놓는 작업이 추가된 탓에 많은 공간이 오랫동안 점유되는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건조기가 필수 생활 가전이라 불리는 이유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빨래를 오랫동안 널어놓았다가 회수한다는 작업만 사라져도 일이 반으로 주는 셈이니.


잠깐 새는 이야기지만, 빨래의 나머지 반도 기계가 해줄 날은 언제 올 수 있을까? 작년쯤에 듣기로 빨래를 개주는 기계가 나오긴 했는데, 빨래를 갠다는 건 너무나도 고난도의 작업이라 도저히 가정집에 들일 가격이 아니라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뒤엉킨 빨래를 하나씩 떼어내고, 일일이 구별하여 적당한 모양으로 접는 일은 학습도 수행도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모든 빨랫감이 무작위적인 형태로 튀어나오니 몇 장의 자료를 학습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요컨대 빨래를 갤 때마다 어지간한 인공지능이나 로봇도 할 수 없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단연코 가장 처리가 벅찬 집안일은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적당한 음식을 입에 넣는 게 전부가 아니라 거대한 연속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아닌 재고관리라, 집에 남아있는 재료가 무엇인지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메뉴도 쉽게 고를 수 없을 뿐더러 귀찮으니 뭘 사서 먹는다는 선택지를 고르기 쉽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음식의 재고는 늘어만 가고, 최악의 경우 먼 옛날 언젠가 저장한 어느 반찬이나 식재료 따위가 미생물의 새로운 우주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집도 이 문제에서 벗어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애초에 냉장 냉동 설비가 넷이나 되어 전쟁을 대비하는 방공호처럼 대량의 식량을 저장하고 있으니 가족들 중 그 누구도 뭐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명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코스트코에서 무엇을 샀다 하면 대량을 사는 게 일상화되어 먹을 게 종종 벅차게 늘었으며, 처지를 전해듣고 딱하게 여긴 주변 사람들이 반찬거리를 잔뜩 갖다주기까지 해서 뭐가 상하기 전에 먹는 것이 식생활의 제1 규칙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1인 가구에서 흔히 느끼는 것처럼 뭘 처음 해먹을 때만 좋고, 그 이후로는 ‘그거 빨리 먹어 치워야 하는데’의 반복이었다. 그러고도 반찬 몇 가지는 상해서 내다버리고, 몇몇 음식은 ‘맛이 좀 신데……’ 하면서 억지로 먹어치웠다. 그러자니 무엇을 얼마나 사서 어떻게 먹어야 지혜로운 식사가 되는가, 애초에 그게 가능하긴 한가 의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괜히 외식 산업과 밀키트 등이 성장한 게 아니다.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가득한 냉장고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인데, 상한 음식을 내다버리는 과정마저 상당히 만만치 않았다. 상한 반찬 따위도 큰 문제였지만, 과일 섭취를 커다란 낙으로 여기는 아버지가 과일을 먹은 뒤 쓰레기 부피를 줄인다고 말리는 껍질을 여기저기서 보고 있기도 편치 않았고, 여차하면 자연 발생하듯이 튀어나와 날아다니는 초파리를 처리하는 것도 끔찍했다. 게다가 그러면서도 생각보다 훨씬 느리게 차서 오래도록 제자리를 지킨 음식물 쓰레기 봉지가 풍기는 시궁창 냄새도 처참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삶의 질을 높여주는 필수 가전으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 장치가 각광받는 이유도 절실히 깨달았다. 냉동해버리든 미생물에게 밥으로 주든 음식물 쓰레기를 냄새 없이 처리할 수만 있다면 꽤 많은 돈을 지불할 가치가 충분했다.


아무튼 남아있는 것과 사용할 것, 사용하고 남을 것을 다 고려하며 뭘 해서 먹는 일은 난감한 일이었고, 익숙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먹어 치워야 할 음식의 대기열을 해결한 뒤에는 그럭저럭 김치찌개 따위를 계속 부활시켜 먹을 정도로 여유가 좀 생기긴 했지만, 식재료의 재고를 완전히 파악하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 같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집어넣은 사람조차 정확히 모르니 어쩌겠는가?


그리고 식재료뿐만 아니라 그밖의 오만가지 물건의 위치에 대해서도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가족들이 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공간에 각자의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상황은 분명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가사 전반을 어머니가 담당한 상태에서 담당자가 빠지니, 일상을 영위하는데에 필요한 기본적 범위를 벗어난 부분은 파악이 대단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집안일을 평소부터 잘 분담해서 했으면 훨씬 낫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분담을 잘 한다 해도 처리가 난감할 영역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층처럼 쌓인 식재료 문제는 물론이고, 위에서 봤을 때 다 비슷해 보이는 기름, 식초, 올리고당 등의 온갖 병들 중에서 필요한 것 찾기, 그리고 명백히 수납 공간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 추가된 밀폐 용기 몇 개 더 집어넣기 등등은 분담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냥 하면 못 할 건 아니지만, 시스템의 맥락에 맞게 빨리 처리하기는 절대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시스템을 내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인 방향으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 매우 난감했다. 일이 몸에 익고 요령이 생기면 되기야 하겠으나, 요령이 생기는 것을 해결법으로 여기는 건 다른 노동에서든 집안일에서든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 아닐까 싶다. 요컨대 한정된 인원이 생활하는 집안이라도 누구든 일을 쉽게 하고 물건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동선과 정리를 체계화하면 모두에게 효율적이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오만가지 잡다한 물건에 이름을 써붙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가족 모두가 냉장고에 있는 것들 중 자주 보지 않는 밀폐 용기나 병을 볼 때마다 이게 뭔가 싶어 열어보기 일쑤니까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들어올려야만 뭔지 알 수 있는 간장, 기름병 따위의 뚜껑에도 이름을 붙였고, 저주받을 검은 봉지로 대충 싸서 여기저기 넣어둔 물건에도 이름을 썼다. 대강의 물건 수납 상황도 눈으로 확인했고, 기억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은 부분은 사진으로 찍고 메모를 남겼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콘센트 몇 개에도 이름을 붙였으며, 먹어서 치워야 하는 음식의 리스트를 써서 냉장고에 붙여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아보거나 뭐가 어디 있는지 찾느라 헤매는 일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이는 것부터 집안일의 효율화를 시작한 셈이다.


‘이 작은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라는 식으로 거창하게 떠들 만큼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런 노력 이 머릿속에 좀처럼 자리잡지 못하던 사항들을 해결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먹다 남겨놓고 영원히 잊어버릴 뻔한 반찬 몇 가지도 해치웠고, 유통기한이 지난 커피도 찾아내어 하루하루 먹어치우고 있다. 머릿속에만 있는 생각과 관념들은 끄집어내어 누구나 알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틀리진 않은 모양이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퇴원한 뒤로도 부엌에 부엌용 마커와 마스킹 테이프를 놓고 여차하면 이름이나 기억할 사항을 적어놓는 일은 계속하고 있다. 나아가서 잡다한 물건을 정리해 넣어둔 내 방의 상자 몇가지에도 이름을 썼다. 누가 언제 내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잡다한 일에 관여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니 최소한의 대비는 하기로 한 것이다. 나 자신의 기억력부터 별로 신뢰할 만하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내가 하는 일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보기 좋게 정리해 놓는 건 언젠가 나를 비롯하여 누구에게든 크게 도움이 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재난 속에서 새삼 깨달았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며, 책 속의 세 부분을 남깁니다.






버림받은 물건이나 버려질 때가 된 물건을 쓴다는 행위는 대개 이런 식이다. 같은 시간에 더 생산적인 일을 하고 새것을 사서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는 편이 합리적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첫째가 돈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둘째가 사람이란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동시에 남이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알아보았을 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타인과 식사를 할 때면 아무래도 부끄러워진다. 혼자서만 메뉴판에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저렴한 음식을 찾는 것 같아 쓸쓸하기도 하고, 성인으로서 온당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 같아 괴롭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충분히 노력했으니 자신이 가끔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호캉스를 긍정하려는 이유는 그게 합당하고, 자격을 따져선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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