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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Feb 15. 2023

불청객 같은 물건들의 해일과 정리의 무한반복



출간 준비중인 책에도 썼지만, 나도 요 2년쯤은 미니멀리즘의 광풍에 휘말렸다. 물론 그렇다곤 해도 집안에 책장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물건을 정리한 것은 아니고,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깝다. 정리를 하고 또 했는데도 방에 벽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장에 둘러싸여 있고, 모든 곳에 물건이 가득 차 있다. 미니멀리즘에 감화된 것도 그런 추세가 계속되면 방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실제적인 위기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집도 하나씩 사놓고, 보드게임도 종종 사며, 심지어 잡지까지 두어 종을 모으니, 수납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날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소장하는 의미만 있을 뿐 다시 보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골라서 팔아치웠고, 보드게임도 다시 할 가망이 없는 것들은 처분했으며, 안 팔고 두고두고 하겠지만 박스가 너무 비효율적으로 큰 보드게임은 박스만 내다버리고 한 곳에 모았다.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힘들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나는 자꾸 무슨 ‘컬렉션’을 만들고 쓸만한 물건은 잘 버리려 하지 않는 나쁜 습성이 있는 데다가, 나중에 팔아치울 일을 대비해서 제품 박스도 보관하는 것을 선호하기에, 약간은 자가 고문 같은 느낌도 있었다. 물건을 떠나보내고 마음을 비우는 일은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기대를 다 버리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난관을 거쳐서 방의 수납 상태를 적절한 정도로 조절하는 데에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수납공간은 수납상황 80% 이하로 유지해야 이상적이라고 하는데, 90% 정도는 만든 듯 싶었다.


그러나 혼자 사는 것도 아닌 만큼 나의 노력만으로 그런 적정한 소유의 평화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오랜 숙청 이후, 평화를 파괴하는 세 번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일단 첫째로 작년 11월, 여행을 갔다 돌아오자 침대에 처음 보는 전기 장판이 깔려 있었다. 이미 전기 장판을 잘 쓰고 있는데 왜 또 한 장이 나타난 것일까? 묻자니 어머니가 극세사 시트 대신 쓰라며 시장에서 사오셨다고 한다. 애초에 고장난 물건인데 그렇게 쓰라고 팔기에 사왔다는 모양이다.


솔직히 크기가 딱 맞지 않아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극세사 시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크게 아쉽다게 느낀 적도 없었으니, 하루아침에 생겨난 고장난 극세사 전기 장판이 마음에 들긴 어려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환불도 안 되는 것을 자식 잘 쓰라고 사오셨는데 ‘필요없어요! 제 인생은 제 거라고요!‘ 라며 필요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퇴역 전기 장판을 나름대로 잘 써보기 시작했다. 극세사라 부드러우니까 일단 감촉은 합격점이었다. 덕분에 따뜻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종 뾰족하게 찌르는 부분이 느껴져 잘 살펴보니, 장판 안의 열선이 꺾여서 바깥으로 튀어나온 곳이 종종 있었다. 피복으로 코팅된 데다가 그 위아래로 합성 섬유를 입혀놓은 것이니 어지간히 구겨대지 않는 한 열선이 바깥까지 나올 일은 없을 텐데, 유통 과정에서 얼마나 끔찍한 꼴을 당했을지 짐작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무튼 이제 한층 더 쓰기 싫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며칠만에 내다버리는 것은 아깝고, 심지어 버리는 데에도 돈이 드는 시대라 나는 이 물건을 손보기로 작정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결정인줄,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열선이 튀어나오는 현상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어떡해야 하겠는가? 답은 물론 열선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기장판의 전선 결합하는 부분을 해체해서 열선을 뽑아내기로 했는데…… 일단 결합부가 해체되지 않았다. 애초에 분해가 가능하게 만들어진 부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기야 전기장판은 고장나면 그게 끝이고 일부분을 수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으니 구매자가 멋대로 분해해서 위험을 초래하게 놔둘 이유가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내 작업에는 큰 방해가 되었지만옳은 결정이다. 나는 한탄하면서 온갖 공구를 동원해서 결합부를 쪼갠 다음 떼어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열선을 뽑아내는 작업인데, 나는 처음에 끝만 찾아서 살살 당기면 쏙 뽑아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당겨보니 장판이 구겨질 뿐 열선의 반대편 끝이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무슨 플라스틱 관 속에 들어있는 내용물만 뽑아내는 것도 아니니, 지그재그로 복잡하게 붙은 열선이 마찰 없이 스르륵 나올 턱이 있겠는가.


그래서 한 시간 내내 열선의 모양을 추적해서 장판 위로 이리 당기고 저리 당기고를 계속하다가, 이래선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장판을 아예 뒤집어 버렸다. 위아래를 뒤집은 게 아니라, 호주머니를 밖으로 꺼내듯이 안팎을 뒤집었다는 뜻이다. 나는 그 과정을 위해서 전기장판 한쪽의 박음질을 다 뜯어내야 했는데, 그건 작업축에도 들지 못하는 일이었고, 실제로 정말 힘든 것은 위아래가 따로 나뉜 게 아니라 한 겹으로 만들어져 붙어 있는 솜같은 섬유를 갈라내고 열선을 찾아내서 뜯어 뽑는 작업이었다. 나는 괴수와 싸워 심장을 뽑아내는 헤라클레스 같은 꼬락서니로 한참을 지독하게 씨름한 끝에야 열선을 다 뽑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덕분에 어떤 물건이든 원래 용도대로 쓰는 게 제일이라는 교훈을 매일 되새기고 있는데, 이제 고생한 게 아까워서 버리지도 않게 되었으니 본의 아니게 미니멀리즘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전력질주한 셈이다.


두 번째 사건도 놀러갔다 오니 이미 벌어져 있었다. 아파트의 어느 집에서 책을 잔뜩 버렸다고 부모님이 엄청난 양의 책을 주워오신 것이다. 대략 70권 정도. 읽을 책이 많다는 것도, 책을 선물받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산책 삼아 다니기 좋은 거리에 번듯한 도서관이 있는 데다가, 책장을 줄여보려고 갖은 애를 쓴 사람으로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더미를 보는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집앞의 눈을 다 치우고 났더니 폭설이 내린 형국이랄까…….


(책에는 죄가 없다. 죄는 공간이 비좁은 자에게 있다.)

하지만 책이 없어서 못 보는 사람도 무수히 많을 뿐더러, 읽을 책을 챙겨줄 가족, 친지가 없는 사람은 더욱 많다. 책이 생겼다고 불평했다간 벼락을 맞아도 할 말이 없으니, 나는 좋은 쪽을 바라보기로 하고 책들을 열심히 정리했다.


취향이 확고한 집에서 처분한 듯, 책의 상당수가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이었고, 유명인사의 수필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나머지는 자기계발서고, 일본 소설도 약간 있었다. 거기서 내가 읽는 장르는 수필과 일본 소설뿐이었으므로 자기계발서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들은 내가 이미 팔아치우려고 골라놓은 책들과 모아서 팔았고, 상태가 안 좋거나 팔리지 않는 것, 그리고 세상에 있어선 안 될 부류의 책들은 다시 폐지로 버렸다. 그렇게 하고 나자 40권에서 50권 정도가 남아서, 어머니가 먼저 읽겠다고 거실에 놓은 20권 정도를 뺀 나머지를 책장에 적절히 꽂았다. 분가해서 나간 뒤로 결혼까지 한 형이 도움을 요청하면 사용하기로 생각해두고 일단 피규어와 크리스마스 트리만 놓아둔 장식칸도, 그리고 종종 서서 읽을 수 있게끔 독서대에 펼쳐둔 잡지칸도 그렇게 예고 없는 헌책의 쓰나미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로도 간척 사업을 하듯 부단히 싸워서 잡지칸을 탈환할 수는 있었지만 장식칸은 영영 떠나갔고, 앞으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두 번째 타격만큼 무서운 일은 아니었지만 세 번째 사건도 제법 근심스러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 번째 사건은 따지고 보면 내 업보였다. 후배 한 명이 혼자 살기에 종종 집에 놀러가서 보드게임을 하곤 했는데, 그 후배가 이사를 가기로 하는 통에, 맡겨두었던 공동 소유의 보드게임들을 가져와야만 했던 것이다. 개수로 따지면 몇 개 되지 않지만, 보드게임이라는 물건은 약간 큰 사이즈가29*29*8센티미터에 달하니 책으로 환산하면 열 권 이상의 공간을 잡아먹는다. 그런 보드게임을 세 박스나 가져왔다. 모임 구성원중에 내가 가장 방이 넓어서 누가 가져갈지 논의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또다시 안 하는 게임을 처분해서 만든 공간도 소진하고, 어지간해선 비워두려 했던 책장 위 공간도 가득 채우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2년에 걸쳐 1보 전진하고 두 달만에 2보 후퇴한 셈이다. 슬프다고까진 하지 않겠지만, 이렇게 연달아서 타격을 받고 나니 소유와 집착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내가 가져도 되는 물건은 어느 정도일까. 추억이 담긴 물건을 남기고자 하는 마음은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 이 방면의 대가인 곤도 마리에 선생은 설레지 않는 것들을 모두 버리라는데, 설레지 않는 것들을 버리기 전에 설레는 마음부터 버리기가 어렵고, 그렇게 한다 해도 인간이 홀로 살지 않는 이상 타인의 삶의 일부도 끌어안고 살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책과 보드게임이라는 공간 살해자들을 즐기는 내가 가볍고 말끔한 삶을 바라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해지기만 하니 무작정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내릴 눈이라고 치우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다. 말끔하고 아름다운 생활은 크고 텅빈 방이 아니라 숨어있다가 잠깐이라도 드러나며 균형을 잡아가는 공간에 있는 것이라고, 오늘도 나를 속여본다.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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