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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01. 2023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독서 기록 열전



기록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고 사는 사람이라 일기를 매일 쓰는 것은 물론이고 독서 기록도 빠뜨리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일반 텍스트 기록인 일기에 비해 독서 기록은 표지나 독서 기간 등이 들어가는지라 간편히 처리하려고 앱을 이용해왔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 앱으로 그 책을 검색한 뒤, 데이터베이스에서 알맞은 책을 선택, 독서 시작일을 기입하고, 책을 다 읽거나 그만 읽기로 하면 독서 완료일이나 중단일에, 별점까지 추가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면 표지까지 깔끔히 들어간 독서 기록이 생성되고, 이후에 무슨 책을 언제부터 언제까지 읽었는지, 어느 기간동안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깔끔한 데이터를 달력으로도 볼 수 있어서 자신을 돌아보기에 썩 유용하다. 앱에 따라서는 다른 독자들이 몇 점을 주고 어떤 감상을 남겼는지도 알 수 있어서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런 목가적 기록의 나날이 심각한 타격을 받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동안 사용한 앱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일단 내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독서 기록 앱은 ‘iReaditnow’였다. 아이폰을 쓰던 시절에 선택한 앱이었고, 요즘 기준으로 보면 약간 디자인이 낡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딱히 부족한 곳은 없었다. 이 ‘부족한 곳이 없다’는 게 특히 중요한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 사실을 근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다 스마트폰을 안드로이드로 바꾸면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iReaditnow가 안드로이드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독서 기록 앱도 iOS를 버리고 새로운 앱으로 갈아탈 것인가, 아니면 아이폰과 함께 쓰고 있던 아이패드로 대신할 것인가. 대학 때는 아이패드도 늘 갖고 다니는 편이었으니 다이어리를 쓴다고 생각하면 아이패드에 기록하는 것도 못할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기록 앱도 독서 기록 앱도 안드로이드 체제에서 새 앱을 찾기로 결정했다. 책을 읽은 직후에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곧바로 기록하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다. 성급하거나 강박적인 성격 때문만은 아니고, 이런 종류의 귀찮은 기록은 나중에 하겠다고 미뤘다간 까먹고 넘어갈 확률이 대단히 높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적당하겠다고 판단하고 선택한 게 ‘책꽂이 플러스’라는 앱이었다. 달리 빠지는 구석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iReaditnow의 기록을 이어받을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독립 서적이나 웹소설을 뒤적이면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기능으로 책이 데이터베이스에 없을 때 직접 작성해 넣는 것이 있는데, 책꽂이 플러스는 그런 면에서도 훌륭했다. 없는 책은 표지도 직접 파일을 붙일 수도 있고, isbn부터 저자, 출판사 등 모든 정보를 작성할 수 있었던 데다 백업, 복원 모두 적절히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그렇게 새로운 앱으로 전환해서 꽤 오랜 기간을 문제 없이 사용했다. 중간에 서너 번 스마트폰을 교체하면서도 복원을 잘 해냈다. 그런데 2022년말쯤 되었을 무렵, 어느날 앱을 열자 라이센스가 없다는 메시지가 떴다. 돈 주고 산 앱인데 돈 받은 걸 까먹었다는 뜻이다. 이 무슨 날강도 같은 소리란 말인가. 플레이스토어에 쫓아가서 후기를 보니 해당 증상으로 이미 별점 1점이 난무하고 있었다. 잘 썼는데 이제 제작자가 대답도 없어서 다른 것으로 갈아탄다는 사람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앱을 지웠다가 재설치하고 복원해서 쓴다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선택의 기로가 찾아온 셈이다. 하지만 갈아타려 해도 준비는 해야 하니까, 나도 앱을 재설치하고 복원해서 정상으로 만들었다. 그러자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같은 방법으로 정상화 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생겼는데……, 관리가 되지 않는 앱이 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는 게 상당히 두려웠다. 대여금고를 쓰는 중인데 금고 관리자가 내 등록 정보를 자꾸 잃어버리는 꼴이라고 할까. 결국은 다른 앱을 찾아나섰다. 열 개쯤 되는 앱을 깔고 기능을 살펴보는 작업은 정말이지 귀찮기 짝이 없어서 앱 제작자가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몇천 원 내지도 않고 몇년이나 잘 썼으니 불만스럽게 여기는 게 오히려 도둑놈의 심보일지도 모를 일이라, 그냥 때가 온 것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찾아낸 여러 앱 중에서 다른 앱의 데이터를 불러오는 기능과 데이터를 다른 앱을 위해 내보내는 기능이 확실하며,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책도 추가 가능한 것만 골라낸 결과가 ‘북모리’였다. 더 예쁘고 유명한 앱이 여럿 있지만, 내가 세운 기준에 맞는 것은 이것뿐이었다. 그리하여 겨우 마음을 놓고 책꽂이의 데이터를 불러왔는데…… 결과를 확인해 본 나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릴 뻔했다.

책의 데이터에서 ‘날짜’ 부분은 싹 날아간 것이었다. 언제부터 읽었는지, 언제 다 읽었는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날로그 기록은 안전하지만 불편하고, 디지털 기록은 편하지만 안전하지 않다)




대관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책꽂이에서 생성한 데이터 스프레드 시트를 확인해보니 너무나 이유가 간단했다. 책꽂이에선 외부용 데이터를 작성할 때 날짜를 넣지 않는다. 그러니 불러오는 앱이 아무리 잘 만들어졌어도 날짜를 기입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책 몇 권 언제 읽었는지 모른다고 해서 누가 무식한 놈이라고 욕을 하거나, 출판사에서 너따위놈의 책은 내줄 수 없다고 거래를 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0년 이상 읽은 순서에 맞춰 꽂아놓은 책 천여 권이 하루아침에 가나다 순으로 재정렬된 격이라 맥이 풀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기존 데이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찾아보려면 찾아볼 수도 있고, 그걸 보고 직접 정리를 하자면 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아무 예고도 없이 ‘넌 이 앱을 쓸 자격이 없는데?’라고 시비를 걸었던 앱이 언제까지고 잘 구동될 거라고 믿고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날짜 기록을 옮겨야 하는데, 천 몇백 권의 데이터를 표로 보고 복사해 넣어도 힘들 판에 직접 앱에서 한 권 한 권 열어서 보고 손으로 쳐 넣어야 하니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이다. 필요한 기능 다 있고 멀쩡히 잘 돌아가던 앱이 이런 결함을 갖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튼, 그런 자초지종으로 1년 반 정도 분량의 독서 기록을 수동으로 정리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으나, 다시 손을 대자니 아무래도 의욕이 도통 생기질 않는다. 사실 언제 무슨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찾아볼 일이라곤 연말 자기 반성의 시간 정도가 고작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렇게까지 유용하지 않은 정보를 단순히 습관적으로 오래도록 적었는데, 그게 유실되는 게 안타까워서 이런 고생에 내몰리게 되었다는 뜻이다. 애초에 날짜를 적은 적이 없는 영화 감상 기록은 날짜야 뭐 아무렴 어떠랴 싶으면서도 독서 기록에만 이렇게 집착하게 되는 것은 그동안의 노력이 망가지는 게 싫기 때문이리라. 이쯤되니 행위가 의미를 만드는 것인가 의미가 행위를 만드는 것인가 헷갈리기 시작한다. 가치 있는 일이라 오래 해온 것인지, 오래 해온 일이라 가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한편으론 디지털 기기에 기반한 기록이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같은 기록을 점토판이나 파피루스에 적었다 해도 언제 기록이 날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없었을 테니. 심지어 과학이 발달한 요즘은 불에 타버린 폼페이의 두루말이 서적도 부수지 않고 내용을 분석할 정도라니까 실물 기록의 보존성은 상상 이상이구나 싶다. 하지만 글을 쓰다 보면 무슨 책에서 어떤 구절을 읽었는지 참조할 일이 종종 생기는 터라 이제와서 독서 다이어리를 종이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아예 앱을 버리고 데이터 관리에 최적화된 디지털 도구인 스프레드 시트로만 기록하는 건 어떨까 고려해보기도 했는데…… 그래선 생각날 때마다 바로바로 적기가 편치 않아서 포기했다. 덤으로 스프레드 시트라는 풍경은 3차, 4차 산업 노동자의 주요 노동 장면이나 마찬가지라 가급적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여우는 금빛 밀밭을 보고 어린왕자를 떠올리지만, 나는 스프레드 시트를 보고 골치아픈 숫자와 노동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길들었으니까……. 아무튼 편이성과 안전성, 그리고 정서적 즐거움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지난한 일이다.


여담으로, 제법 오랫동안 보드게임을 취미로 해온 나는 보드게임 보유 기록과 플레이 기록도 남기고 있는데, 이쪽은 앱 데이터가 호환될까 안 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 분야는 ‘보드게임긱’이라는 사이트가 보드게임 중흥 초창기부터 꽉 잡고 데이터센터 노릇을 해버렸기 때문에 어지간한 앱은 다 그곳과 연동이 된다. 절대강자 하나가 표준을 정해버린 셈이다. 그래서 독서처럼 대중적인, 혹은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화의 기록처럼 중요한 일이면 국제 표준안이 세워지든지, 거대 기업의 기본앱 따위와 호환되어야 해서 모든 앱의 연동이 간편해져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데…… 이런 얘기를 책을 제법 읽는 주변 친구들과 해봐도 독서 기록 따위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식단 기록처럼 대단히 성가신 기록을 하는 사람은 있어도 독서 기록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은, 독서라는 행위에 기록과 검토를 통해 더 나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 압박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독서 기록을 사진으로라도 남기길 권하고 싶다. 책을 읽는동안 즐거움을 느꼈고, 그걸 잘 기억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는 생각도 틀리진 않았다. 그러나 감정은 일시적이고 기억은 불완전해서, 어떤식으로든 매개를 남겨야 지나간 순간을 다시 불러오기 용이해진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더 많은 행복을 선명하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잘 기억하고 말로 전하면 그만인 것’을 굳이 글자라는 형체로 남겨 만들어낸 것이 바로 책이라는 점을 생각해봐도 독서와 기록은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장편 만화처럼 여러 권인 작품을 어디까지 봤나 까먹지 않는 데에도 퍽 유용한 일이고…….



*추신

하루에 한 달 분량씩 날짜 기록을 복구하고 있다. 몇 달째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찾아보면 알 수 있긴 하겠지만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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