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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25. 2023

라디오 녹음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

여담으로 이때 즈음해서 전쟁이나 지진 같은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건전지로 켤 수 있는 휴대용 라디오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좀 찾아보았다. 이미 하나 있긴 하지만 음질이 너무나 끔찍스러워서 고등학교때 쓰던, ‘헌혈하고 받을 수 있던’ 조그만 라디오를 다시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기술 발전으로 더 싸졌을 줄 알았던 휴대용 라디오는 옛날보다 훨씬 찾기도 힘들고, 그나마 파는 물건은 ‘인기 음원’ 수백곡이 들어간 휴대용 스피커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명 메이커의 고성능 소형 휴대용 라디오는 중고 시장에서 제법 비싼 값에 팔리는 중이었고, 아무데나 굴러다닐 줄 알았던 ‘헌혈 라디오’는 아예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구해야 할 지경이었다. 휴대 기기로 라디오를 듣는 행위가 드문 짓이 되니 휴대용 라디오는 아예 골동품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지나고 나서 버리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게 요즘 한둘이 아니지만, 라디오는 고3때까지도 잘만 썼기에 서랍 정리한다고 버린 게 특히 더 아깝게 느껴진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 라디오들이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한다고 버렸단 말인가?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조금만 더 잘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런 것들은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일까?

구글 같은 거대 IT 기업에서 면접을 볼 때 아주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는 얘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유명하다. 예를 들자면 ‘맨홀 뚜껑이 왜 동그란지 답해보세요’ 같은 것들. 과연 그런 질문이 한 인간의 창의력이나 업무 수행 능력 따위를 가늠하는데에 도움이 되는지는 다소 의문이 있지만,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짜낸 방법이니 무슨 효과가 있긴 있으리라. 아무튼 내가 이런 질문안 후보에 하나를 올릴 수 있다면 ‘라디오 방송을 예약해서 녹음하고 싶다면 어떤 방법을 쓰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올리고 싶다. 경험해 보니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답을 쓰기 전에 이런 짓을 하게 된 이유부터 설명하자. 나는 지난 몇 년간 팟캐스트와 라디오 방송을 챙겨듣고 있다. 그중 하나는 국악방송 ‘최고은의 밤은 음악이야’*의 코너 중 금요일 밤 10시에 시작되는 ‘친절한 재식씨’. 이것은 곽재식 작가가 게스트로 나와서 다양한 동식물에 대해 알려주는 코너로, 듣다 보면 딱히 궁금하게 여겨본 적이 없는 생물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가 상당하다. 다람쥐가 겨울잠을 길게는 10개월까지도 자는데, 사람들은 다람쥐가 먹이를 찾으러 다니는 짧은 기간만 보고 아주 부지런하다고 생각한다는 얘기 등을 듣자면 지적인 흥이 채워지는 것이다. 물론 먹고 사는 일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즐거운 방송이다. 산책하고 쉬는 시간까지 ‘생산성을 두 배로 올려주는 미라클 모닝’, ‘경기 침체 속에서 프리랜서로 살아남는 셀프 브랜딩’ 따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듣자면 만사가 다 지긋지긋해지지 않겠는가?

(*2023년 9월로 종방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다.)


내가 챙겨 듣는 또 다른 라디오 방송은 KBS1 라디오 주말 생방송 정보쇼의 코너 중 격주 토요일에 방송되는 ‘곽재식의 과학 플러스’다. 이 방송은 ‘친절한 재식 씨’보다는 약간 더 진지하고 깊이가 있으며, 로켓의 역사와 현재, 다누리호의 의미, 희토류 바나듐의 특징과 활용 등 다양한 주제를 적절한 깊이로 다뤄 교양을 쌓는 기분을 즐기기에는 더 알맞다.


그밖에도 라디오 방송만 둘을 더 듣고 있는데, 그중에서 위의 두 가지는 꼭 녹음을 해서 듣는다. 일단 ‘주말 생방송 정보쇼’는 팟캐스트도 다운로드 서비스도 지원하지 않아서 제때 듣거나 녹음을 해야만 하고, ‘밤은 음악이야’는 최근부터 팟캐스트 다운로드를 지원하기 시작했지만 오래도록 녹음해서 들었더니 중간중간 틀어주는 음악을 듣는 재미를 포기하기 아쉬워진 탓이다.


그런데 음악은 스트리밍 서비스로 듣는 게 훨씬 편하고 음질도 좋은데 굳이 이렇게 녹음한 라디오로 듣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인간이 명백한 의도를 갖고 고른 음악이 내 취향에 맞을 때 더 즐겁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구매 기록에 따라서 꼭 맞는 책을 추천해주는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보다 동네 독립 서점에서 사장이 엄선한 책들 가운데 한 권을 고르는 게 더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튼 내가 이 두 가지 방송을 녹음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서브폰으로 쓰고 있는 갤럭시 S10e는 놀랍게도 이어폰만 꽂으면 라디오를 수신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하고 있기에, 알람을 맞춰두고 제때 작동시켜 녹음 버튼을 누르면 해결되는 것이다. 갤럭시가 이후 모델부터는 라디오 수신기를 이어폰으로 빼버린 것도 모자라서 그 이어폰을 3만원대에 팔고 있는지라 요즘 모델을 쓰고 있다면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별로 쓰지도 않는 건 빼버리지 뭐’하는 식의 효율성 개선의 광풍이 불기 전 기기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면 녹음 자체는 이렇게 간단하다.


그렇다면 라디오 수신기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없다면 어떡할까? 이때는 일이 좀 더 복잡해진다. 라디오를 인터넷으로 송출하는 방송사 앱을 받아서 실행하고, 화면 녹화 기능으로 ‘녹화’를 하는 수밖에 없다. 녹화 기능이니까 아무 의미도 없는 영상이 들어가 쓸데없이 거대한 파일이 만들어지긴 하나, 이 문제는 영상을 음원 파일로 변환하는 앱을 써서 해결할 수 있다. 여간 번거롭지 않지만 라디오처럼 멋진 매체를 내다버린 신시대를 살아가는 이상 감수할 수밖에.


그런데 방송 시간마다 칼같이 이 작업을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저번 달에는 놀러가서 녹음을 까맣게 잊어버린 적도 있고, 녹음을 하긴 했는데 수신 환경이 불안정해서 방송을 반쯤은 들을 수 없었던 적도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 날 이후로 내가 스마트폰을 다룰 수 없는 상황에도 녹음을 제때 하는 방법, 즉 ‘예약 녹음’을 할 방법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예약 녹음이라니, 이 얼마나 그리운 단어인가?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호환 마마의 공포가 한국을 지배하고 사람들은 비디오 테이프를 쓰던 그 시절에는 가족들이 명절에 신문으로 영화 방영 일정을 확인하고 영화를 예약녹화하곤 했다. 볼 만한 영화를 잔뜩 방영하는데 시간이 겹치면 나중에 볼 것을 골라서 저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근래에도 디지털 방송을 하드디스크 따위 저장 장치에 예약 녹화해주는 셋톱박스 비슷한 장치가 쓰였다고 듣긴 했지만, 적어도 내게는 예약을 통해 콘텐츠를 자동 저장하는 행위가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을 예약 녹음한다는 게 오늘날에는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세트 테이프를 쓴다면야 지금 갖고 있는 오디오 컴포넌트로도 가능하겠지만, 그래서야 나중에 테이프로 듣거나, 오디오와 노트북을 연결해서 테이프를 재생하고 디지털 녹음을 다시 거쳐야 한다. 한 시간 방송을 한 시간 녹음하고, 한 시간 변환하는 셈이다. 이런 비효율적인 짓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폰만을 이용해서 깨끗하게 시간 낭비나 비용 없이 처리할 방법은 없을까? 궁리해보니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았다. 갤럭시 시리즈는 놀랍게도 매크로 기능을 정식으로 지원해서, 화면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조작하도록 시간과 순서와 조작을 녹화해두면 그대로 수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이 방법으로 정해진 시간에 라디오를 실행하고 녹음 버튼을 누르도록 설정하면 녹음 자체는 무리 없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 방법을 실험해서 녹음 파일을 생성하는 것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안드로이드가 보안상 화면을 자동으로 켤 수 없게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화면이 켜지지 않으면 화면을 터치해서 라디오를 조작하는 단계로 넘어갈 수 없으니 모든 게 다 허사였다. 개발자 모드에서 ‘충전중 화면 켜짐’ 옵션을 설정하면 충전하는 내내 꺼지지 않게 해서 이 방법도 써먹을 수는 있겠지만, 집을 비워서 하루이틀 내내 화면을 켜둬야 하는 경우라면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다.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은 OLED 화면을 라디오 녹음하자고 혹사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냥 LCD였다면 아무 부담 없이 썼을 방법인데 또 신기술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라디오 예약 녹음이란 행위가 이토록 시대착오적인 풍습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라디오를 예약 녹음해주는 앱 혹은 프로그램을 iOS, 안드로이드, 윈도우즈, 매킨토시 모든 방면에서 찾아봤지만 역시나 그렇게 간편한 방법은 없었다. 엇비슷한 게 있다가 없어졌거나, 녹음은 가능해도 시스템 기동을 정해진 시간에 할 수 없거나, 운영체제를 아예 해킹해서 뜯어고쳐야 하는 식이었다. 요컨대 음원 파일이 제공되지 않는 라디오 방송을 정해진 시간에 자동으로 녹음해서 디지털 파일로 저장하는 행위는 어떤 기업도 고려하지 않은 이례적 행위가 분명했다. 라디오가 완전히 사장된 것도 아니고 여전히 수많은 운전자에게 사랑받는 매체인데 디지털 환경과의 접점이 또렷하지 않다는 게, 심지어 앞으로 더 접점이 희미해질 거라는 사실이 참으로 통탄스럽다.


그리하여 내가 고를 수밖에 없었던 선택지는 바로 ‘라디오 방송을 녹음해서 듣는 행위가 빈번하던 시절’의 기기를 구해서 쓰는 것이었다. 예스러운 짓을 하려면 예스러운 물건을 쓰는 게 가장 속편한 방법인 모양이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명작 ‘데몰리션 맨’에서 냉동되었다 풀려난 구시대의 범죄자를 잡자고 구시대의 경찰을 해동한 것과 비슷하다. 나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코원 D2라는, 20여년 전에 인기 있던 MP3P를 중고로 구해서 쓰기 시작했다.


이 과정도 순탄치는 않았다. 일단 MP3P 중에서 라디오 예약 녹음이 되는 모델을 찾는 것부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보 자체가 극히 적었으며 어디서는 된다는데 정작 더 알아보니 안 되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D2는 업데이트 파일조차 공식 사이트에서 찾을 수 없기에 문의를 해봤더니 지원하지 않는 모델이라 미안하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나는 한참을 더 검색한 뒤에야 누군가 자기 블로그에 백업해둔 파일을 찾아낼 수 있었다. 방송국에서 90년대 방송 녹화분도 찾지 못한다거나, 아래아 한글의 초기 버전을 한컴에서 사례금을 걸고도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20여년밖에 지나지 않은 대히트 기기의 업데이트 파일도 공식 제조사에서 내다버리는 꼴을 보니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지우는 게 어쩔 수 없는 흐름이구나 하는 확신이 생겼다.


아무튼 간신히 구해서 업그레이드까지 마친 D2로 이런저런 시험을 해봤고, 이제는 내가 녹음을 할 수 없을 때마다 예약 녹음 기능으로 잘 써먹고 있다. 다양한 시간대를 지정할 수는 없다는 게 아쉽지만, 최첨단 기기로 오만가지 귀찮은 짓을 거쳐야 간신히 할 수 있을까 말까한 작업을 지극히 간단히 처리해주니 충분히 만족스럽다. 그런 한편으로 스마트 기기가 모든 것을 다 간편히 처리해준다고들 인식하지만 그건 인터넷이라는 한정적인 영역에나 해당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니 종종 찾아오는 인터넷 마비의 재난이 두렵기도 하고…….


노래는 듣기 쉽지만 작고 귀여운 라디오는 구하기 어렵다. ‘MZ세대’가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여담으로 이때 즈음해서 전쟁이나 지진 같은 비상 상황이 일어나면 건전지로 켤 수 있는 휴대용 라디오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좀 찾아보았다. 이미 하나 있긴 하지만 음질이 너무나 끔찍스러워서 고등학교때 쓰던, ‘헌혈하고 받을 수 있던’ 조그만 라디오를 다시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기술 발전으로 더 싸졌을 줄 알았던 휴대용 라디오는 옛날보다 훨씬 찾기도 힘들고, 그나마 파는 물건은 ‘인기 음원’ 수백곡이 들어간 휴대용 스피커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유명 메이커의 고성능 소형 휴대용 라디오는 중고 시장에서 제법 비싼 값에 팔리는 중이었고, 아무데나 굴러다닐 줄 알았던 ‘헌혈 라디오’는 아예 해외 경매 사이트에서 구해야 할 지경이었다. 휴대 기기로 라디오를 듣는 행위가 드문 짓이 되니 휴대용 라디오는 아예 골동품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지나고 나서 버리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하는 게 요즘 한둘이 아니지만, 라디오는 고3때까지도 잘만 썼기에 서랍 정리한다고 버린 게 특히 더 아깝게 느껴진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 라디오들이 자리를 차지하면 얼마나 차지한다고 버렸단 말인가? 소중히 해야 할 것들을 구분하는 방법을 조금만 더 잘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런 것들은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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