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Oct 17. 2023

마음에 드는 달력



보통은 11월쯤부터 여기저기서 달력이 들어와 어떤 달력을 써야 하나 고민하기 마련인데, 불경기의 영향인지 2022년은 쓸만한 달력은커녕 쓸만하지 않은 달력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아껴뒀다 나중에 쓸 수도 없는 달력이 남아돌면 개인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좋지 않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달력이 아예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나는 주요 일정 관리를 태블릿과 스마트폰으로 하면서도 책상 옆에 항상 세워두는 탁상 달력까지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22년에 작성하여 월간에세이 2023년 4월호에 게재한 것을 수정했습니다)


뭐든 디지털 기기로 기록하는 게 검색도 쉽고 수정도 간편한데 어째서 탁상 달력까지 병행해서 사용하는가? 확정된 일정을 항상 보이는 곳에 적어놓고 확인하며, 무인도 탈출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날짜가 지날 때마다 빗금을 쳐서 시간의 흐름을 되새기지 않으면 아무래도 오고 가는 시간이 실감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내가 손으로 적은 기록이 눈만 들면 보이는 자리에 있어야 기억이 희미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을 손 안의 디지털 기기에 몰아넣어 간편하게 만들었다 해도, 우리가 물질로 존재하는 이상 개별적인 기능을 가진 도구로서의 달력 역시 물질로 존재해야만 있는지 없는지 감각을 놓치기 쉬운 시간을 인식하며 살기에 용이하다.


그래서 적당한 탁상 달력을 사려고 잡화점에 들어가 보니 이런저런 크기의 달력들이 눈에 보이긴 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내가 선호하는 ‘한 주가 월요일로 시작되는 달력’은 팔지 않았다. 인터넷 쇼핑몰에는 그런 물건을 파는 곳도 있긴 했지만 달력 하나 사는 데에 택배비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주문을 포기하고, 대신에 누군가 뽑아 쓰라고 만들어 인터넷에 올려놓은 달력이 있을 법해서 찾아보았다. 생각해보니 집에서 프린터로 달력 열두 장 인쇄하는 게 대단한 수고는 아닐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내 검색 솜씨가 좋지 않은 탓인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달력을 만들어 올린 사람은 많아도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달력을 만든 사람은 고작 한 명뿐이었고, 그나마도 그가 만든 달력은 태블릿 전용이라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되어 있어 인쇄해 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작년에 월요일로 시작하는 달력을 만들었다는 사람도 올해는 불편하다는 의견을 반영하여 일요일로 시작하는 달력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월요일로 시작하는 달력이 대관절 왜 불편하단 말인가? 디지털 달력을 모조리 월요일로 시작하도록 설정해서 사용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달력은 한 주가 일요일로 시작하는 것이 훨씬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일단 국제적으로도 국내적으로도 표준안은 한 주의 시작을 월요일로 정하고 있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대다수의 인식도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 한 분이 자신은 일요일을 한 주의 시작이라 생각하고 일주일을 준비한다고 말씀하신 적은 있지만 그분 말고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다들 다가올 일요일을 ‘이번 주 일요일’이라고 하지 ‘다음 주 일요일’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한 주는 월요일로 시작해서 일요일로 끝나는 것으로 표시해야 마땅하다. 대체 왜 이번 주 일요일 일정을 확인할 때 다음 줄을 봐야 하며, 주말 이틀짜리 일정을 기록할 때 가로로 줄을 긋다 다음 줄로 넘어가야 하느냔 말이다.


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 일요일을 한 주의 시작으로 보는 인식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일곱 천체가 시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고 그중 으뜸인 태양이 지배하는 날을 첫째 날로 정한 것이다. 이 개념을 로마와 기독교가 받아들임으로써 메소포타미아산 역법이 전세계로 퍼졌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쉰 일곱 번째 날인 토요일 대신 첫 번째 날인 일요일을 예배일로 정해야 했던 것은 당시 로마인 중에 태양신을 섬기는 신도가 많았던 탓이라고 한다. 요컨대 고대인들의 발상과 종교인들의 사정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주말 일정을 기록할 때마다 다음 줄까지 보는 수고를 감수하고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 더해 달력 양끝에 휴일이 자리하고 평일 다섯 날이 가운데에 배치되는 모양이 균형에 맞고, 영어로 쓴 요일의 머릿글자도 S로 시작하여 S로 끝나는 게 보기 좋다는 사실이 이런 불합리한 관행을 고착화하는 데에 한몫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음에 드는 달력을 구하지 못하면 한 해 내내 고통받는다)


그러나 이 관행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은 극히 적은 모양이다. 월요일로 시작하는 달력을 찾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대다수의 디지털 달력 역시 조그만 날짜 선택 창을 띄울 때는 일요일로 시작하는 달력만 보여주며, 내가 활동하는 과학 커뮤니티에 얘기해도 친구들에게 하소연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많이 쓰는 것을 익숙한 대로 쓰는 것이 편한 탓이리라. 월요일로 시작하는 달력을 보고 불편하다고 무료 달력 제작자에게 항의한 사람 역시 기존의 달력과 모양이 맞지 않아 일정 관리에 혼란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한참동안 마음에 드는 달력을 돈 들이지 않고 찾아 쓰려던 나도 결국은 마음이 꺾이고 말았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다들 아무렇지 않게 익숙하게 쓰는 물건과 관행에 반기를 들고 살면 앞으로 평생동안 불편감을 느끼고 살 게 분명하니, 그냥 내가 적응하고 사는 게 훨씬 편안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디지털 달력의 설정도 모두 일요일로 시작하도록 바꾸었다. 돈도 힘도 없으면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야지 별 수 있는가. 괜한 주장이나 하고 다니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이나 당하는 세상이란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아무래도 억울해졌다. 특히 주말에 일정이 연달아 있는데 그걸 윗줄 아랫줄 번갈아 확인하다 보니 짜증이 치밀었다. 내가 비록 돈은 없을지언정 열두 장의 달력을 뽑을 능력과 재료는 있는데 굳이 시류를 따라갈 이유가 있나 싶었다. 이대로 포기하면 불합리한 세상에 내가 억지로 맞춰 살고 있다는 불평을 주말마다 하게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잘 알아보니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달력에는 인쇄 기능이 딸려 있기에, 곧장 설정을 월요일로 시작하도록 변경하고 원하는 크기의 달력 열두 장을 뽑아 달력에 클립으로 끼워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디자이너들이 제작한 달력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모양이 합리적이고 기능에도 충실해서 볼 때마다 뿌듯하다.


아마 월요일로 시작되는 달력이 보편화되는 미래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같은 디자인의 달력이 두 종류로 나오는 게 당연한 날도 오지 않으리라.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괜한 분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작정이다. 매년 달력을 인쇄해야 할지라도 나는 그때마다 내가 옳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내 취향에 맞춰 나 자신을 챙겨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되새길 수 있을 테니까.



*추신

웜그레이앤블루 출판사에서 출간한 수필집 "혼자 남은 마음에게"에 참여했습니다. 이별과 함께 했던 책과 음악 그리고 영화에 대한 수필 모음집으로, 저는 이별과 좌절의 고통 그리고 하루키 소설에서 찾은 위로에 대한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추신

국내 유일의 기후위기 대응 매거진인 매거진 1.5도씨에서 진행한 인터뷰가 5호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중고 생활 20년 베테랑과 ‘새활용센터’ 가보니'로, 송파 새활용센터를 함께 둘러보고 낡은 물건 다시 쓰기와 그 의미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추신

가톨릭 평화방송 라디오 기후특집 '공동의 집, 지구'에 출연해서 낡은 물건 쓰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피디님이 근래 녹음 중에 가장 웃겼다고 하시더군요.

10월 매주 일요일 오전 6:50-7:00(본방). 오후 4:50-5:00, 11:50-12:00(재방)

(수도권 105.3, 광주 99.9, 대구 93.1, 부산 101.1, 대전 106.3, 여수 99.5, 포항 96.9, 안동 100.7, 김천 100.5, 울산 94.3)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이전 03화 라디오 녹음은 지독하게 어려운 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