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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14. 2021

불렛저널과 다이어리의 실감

그나저나 수기 다이어리의 장점만 늘어놨는데, 사실 단점도 너무나 많고 명백하다. 수기 다이어리는 당연히 검색도 안 되고 칸이 늘어나지도 않으며, 같은 항목을 두세 가지 달력에 다시 옮겨 적는게 영 귀찮기까지 하다. 중요한 사항을 다시 옮겨적으며 내 머릿속에 각인한다는 게 불렛 저널 시스템의 근간이라곤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게다가 이미 이용 중인 디지털 시스템과 연동되는 것도 아니며 알림을 설정할 수도 없는지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을 기록하기엔 영 맞지 않다. 매주 금요일 라디오 녹음하기 따위를 백 번쯤 반복해서 쓸 생각을 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따라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니,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할 작정이다.

- 반복적인 일, 복잡한 편집이 필요한 일정 정리는 디지털로만 처리.

- 단순 일정은 양쪽을 모두 사용.

- 문제 사항, 아이디어 정리의 초안, 더 넓은 시야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엔 수기를 사용.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며 불편한 물건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역시 디지털이 최고라며 다이어리를 단기간에 집어던지진 않을 것 같다. 놀랍게도 도통 감이 오지 않던 문제들이 손으로 직접 써보면 금방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출 내역도 스마트폰의 앱이 상당 부분을 자동으로 기록해주긴 하지만, 수고를 들여 다이어리에 직접 써보니 제법 도움이 되었다. 언제 무엇을 사서 얼마를 썼는지, 얼마나 충동적으로 돈을 낭비했고 무엇을 즐겁게 잘 샀는지 명확히 뇌리에 새겨지니 조금이나마 덜 어리석은 소비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사용할수록 뇌의 여러 부분이 활성화되고 기억이 또렷이 저장된다던데, 종이 위에서 펜을 움직이며 소리를 듣는 것도 그런 작용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출 기록 수기 정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괴로워서 반 년도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나저나 초등학교 때는 바자회에서 5백 원을 주고 산 슬램덩크 수첩을 다이어리로 썼는데, 그 기록이 다 남아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고양이 이마만큼 좁은 수첩이라 요일별로 두 페이지 씩 할애해서 14페이지 분량만 연필로 쓰고 지워가며 쓴 탓이다. 이게 아날로그인지 디지털인지……. 결국 수첩만 남고 데이터는 사라지고 말았으니, 오래도록 추억하는 면에서도 완전한 아날로그의 물질적 기록이 유용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일정 관리, 다이어리 등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이미 들어봤을 확률이 높은데, '불렛 저널'이라는 다이어리 정리 방식이 있다. 나도 어디까지나 주워들은 것에 불과해서 ‘불렛 저널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요체를 간단히 정리할 수는 없지만 대강 아는 대로만 적자면, ‘노트를 달력과 퓨처 로그, 데일리 로그 등으로 섹션을 나누고, 생각나는 사항을 데일리 로그에 두서 없이 기록하되, 항목들을 기호로 분류해서 연기하거나 필요한 섹션으로 옮겨가며 생각을 정리하고 연결하는 기록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라이더 캐롤 씨가 도통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를 발견하지 못해 창안한 이 기록법이 유명해져 유행을 타게 된 지는 5년쯤 되는데, 나는 아주 뒤늦은 근래에 들어서야 마음에 드는 다이어리 노트가 생긴 김에 시험해보게 되었다.


유튜브 따위를 뒤져보면 손재주 좋고 정리 잘 하는 사람들이 텅 빈 노트를 시판 다이어리 못지 않게 예쁘게 꾸미고 말끔하게 기록한 자료들이 참으로 많다. 반면에 나는 정평이 난 악필인 데다 뭐든 날려 쓰는 버릇이 있어서 어디에도 공개하진 못하겠다. 공개했다간 보는 사람들마다 '아, 손으로 쓰는 다이어리라는 게 이렇게나 추잡하고 불편한 것이구나, 다이어리 따위 쓰지 말자' 할 게 뻔하니 산업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무튼 iOS와 안드로이드, 맥북을 모두 쓰면서 만족할 만한 일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2do나 Calengoo, toodledo, ticktick 등 다양한 앱을 시도해놓고 이제 와서 아날로그 수기 일정 관리를 시도하는 이유는, ‘그게 더 실감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느낌은 설명하기도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은 절대 공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앱으로 간편한 일정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다 해도 앱을 닫으면 그건 ‘거기 없는’ 것이기 때문에, 기록들이 어느 정도 모호하고 추상적인 영역에 머무는 듯 느껴진다.


해가 지는 광경을 실제로 보는 것과 인터넷으로 '곧 일몰입니다'라는 알림을 받는 것의 차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겠고, 시각을 아날로그 시계로 보는 것과 디지털 시계로 보는 것의 차이 정도라고 말하면 비슷할까? 시계 바늘을 보면 굳이 숫자를 인식하지 않아도 기울어가는 태양을 보듯 시간에 대한 감이 오는 반면에 디지털 시계를 보면 어떤 뇌내 변환을 거쳐야 하듯이, 종이를 펼쳐서 내가 손으로 써넣은 기록을 보는 편이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한 일정을 화면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또렷한 실감을 주는 것이다.


특히 나는 억울한 옥살이나 군역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하루가 지나면 달력에 빗금을 그어 표시하는 것을 일과로 하고 있는데, 이런 표시를 하고 있자면 시간이라는 게 참으로 유한하며 덧없고, 맥없이 흘러간 뒤에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실감이 들어 엄숙해지기도 하고 뭐라 말할 수 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연필이 종이의 면에 사각, 하고 갈려나가며 빗금을 치는 순간의 만감. 그것은 망쳐버린 시험을 스스로 채점하는 순간의 작은 절망처럼 ‘오늘 하루도 틀려먹었구나’하는 아련한 안타까움으로 가슴 깊이 쌓여간다. 이 느낌은 아마 애플 펜슬과 종이 질감 필름을 쓴대도 얻을 수 없는 것이리라. 꼭 얻어야 하는 느낌인가 싶긴 하지만…….


각설하고, 불렛 저널의 특장점이란 바로 ‘필요한 페이지는 내가 만든다’라서 나는 두 페이지에 걸처 1년의 모든 날짜를 볼 수 있게 ‘연력’을 만들었다. 행이 일, 열이 월인 표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한 해를 한 눈에 보이게 해놓고 지난 날에 빗금을 쳐보니 올해도 비참하리만치 빠르게 다 지나가서 불타버린 밭처럼 거의 다 검게 변하고 말았다.

연력을 앞뒤로 넘겨 보면 한층 더 쓸쓸해진다. 이런 페이지를 계속 만들면 인간의 생애조차 딱 한 권으로 정리해서 볼 수 있지 않은가. 고작 100페이지 남짓이니 한 권도 아니고 책 반권이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다. 정말이지 삶이라는 게 이토록 짧고 허망할 수가 없고, 거기에 자신이 채워가는 것들이 고작 잿빛의 빗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고 가슴 속에 찬 비가 들어차는 듯하다. 그런 한편으로 삶의 목적을 ‘여기 있는 빈칸들이 모두 얼어붙지 않을 정도로 곳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이라고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이 더 단순하고 알기 쉬운 것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손으로 쓰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디지털과 적절히 역할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수기 다이어리의 장점만 늘어놨는데, 사실 단점도 너무나 많고 명백하다. 수기 다이어리는 당연히 검색도 안 되고 칸이 늘어나지도 않으며, 같은 항목을 두세 가지 달력에 다시 옮겨 적는게 영 귀찮기까지 하다. 중요한 사항을 다시 옮겨적으며 내 머릿속에 각인한다는 게 불렛 저널 시스템의 근간이라곤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다. 게다가 이미 이용 중인 디지털 시스템과 연동되는 것도 아니며 알림을 설정할 수도 없는지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일을 기록하기엔 영 맞지 않다. 매주 금요일 라디오 녹음하기 따위를 백 번쯤 반복해서 쓸 생각을 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따라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적절한 조합이 필요하니,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할 작정이다.

- 반복적인 일, 복잡한 편집이 필요한 일정 정리는 디지털로만 처리.

- 단순 일정은 양쪽을 모두 사용.

- 문제 사항, 아이디어 정리의 초안, 더 넓은 시야로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엔 수기를 사용.


굳이 이렇게까지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며 불편한 물건을 써야 하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역시 디지털이 최고라며 다이어리를 단기간에 집어던지진 않을 것 같다. 놀랍게도 도통 감이 오지 않던 문제들이 손으로 직접 써보면 금방 풀리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출 내역도 스마트폰의 앱이 상당 부분을 자동으로 기록해주긴 하지만, 수고를 들여 다이어리에 직접 써보니 제법 도움이 되었다. 언제 무엇을 사서 얼마를 썼는지, 얼마나 충동적으로 돈을 낭비했고 무엇을 즐겁게 잘 샀는지 명확히 뇌리에 새겨지니 조금이나마 덜 어리석은 소비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양한 감각을 동시에 사용할수록 뇌의 여러 부분이 활성화되고 기억이 또렷이 저장된다던데, 종이 위에서 펜을 움직이며 소리를 듣는 것도 그런 작용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출 기록 수기 정리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게 괴로워서 반 년도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나저나 초등학교 때는 바자회에서 5백 원을 주고 산 슬램덩크 수첩을 다이어리로 썼는데, 그 기록이 다 남아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고양이 이마만큼 좁은 수첩이라 요일별로 두 페이지 씩 할애해서 14페이지 분량만 연필로 쓰고 지워가며 쓴 탓이다. 이게 아날로그인지 디지털인지……. 결국 수첩만 남고 데이터는 사라지고 말았으니, 오래도록 추억하는 면에서도 완전한 아날로그의 물질적 기록이 유용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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