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전세계의 축일이나 축제, 혹은 휴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나도 은연중에 그런 느낌을 받곤 하지만, 실제로는 옆나라 일본만 해도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다. 하기야 기독교가 국교도 아니니 그 종교 축일에 쉬어야 할 마땅한 이유는 없다고 해도 반박할 거리가 별로 없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가 즐거운 휴일의 이미지를 뒤집어쓴 것은 기독교와 서양 문화의 유입에 더해 ‘통금’이 있던 시절에 크리스마스 이브만 통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 듯한데, 크게 틀리진 않을 것 같다. 게다가 원래 한국 문화가 아닌지라 부모님께 꼭 효도 선물을 해야 한다든가 손위 지인들에게 안부 인사를 돌린다든가 하는 의무가 없다는 사실도 마냥 즐기는 날로서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다만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산타도 믿은 적이 없을 뿐더러 크리스마스를 진심으로 즐겁게 생각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놀아야 마땅한 날이라고 친구들과 모여서 논 기억이야 즐겁게 남아 있지만, 크리스마스를 크리스마스라는 이유만으로 학수고대하며 부푼 가슴을 안고 지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크리스마스엔 어디에 가야 하나…… 하고 고민한 시간이 더 길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비뚤어진 성격이다.
그러나 올해는 그런 암담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에 친구들과 놀러가서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그때 조그만 트리 하나 놔두는 것도 예쁘고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느 편의점에서 할인 행사로 그럴듯한 트리를 5천 원에 판다는 광고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광고를 본 날, 나는 곧장 산책길에 있는 편의점으로 갔다. 내가 본 광고가 거짓도 헛것도 아님을 증명하듯 편의점 문앞에도 트리를 카드 할인으로 싸게 판다는 내용이 붙어 있었다. 나는 안심하고 문을 열었다. 행사 상품이니까 아주 잘 보이는 곳에 트리가 즐비하게 놓여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게 웬 걸, 트리가 진열되어 있기는커녕 직원에게 물어도 뭔 소리냐는 눈으로 되물을 뿐이었다. 앱에 광고가 뜨기에 사러 왔다고 소상히 설명하니, 감기에 걸린 것인지 연신 코를 훌쩍대는 청년은 앱으로 광고를 확인하곤 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내용으로 길게 통화를 했다. 여긴 없다, 아직 안 들어왔다, 안 들어올 예정이다, 등의 사항만 간단하게 확인한다고 보기에는 좀 긴 통화였다.
통화를 한참 한 뒤, 직원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로 내게 물었다. 물건을 본사에서 잘 보내주지 않아서 따로 신청해 물건을 확보해야 하는데, 지금 결제해두고 나중에 찾아갈 것인지, 물건이 확보되면 와서 살 것인지 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세 가지 모델을 다 구경한 뒤 가장 내 마음에 들고, 가져가면 너도나도 잘 샀다고 야단일 트리를 살 작정이었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물건이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결제를 하라는 말인가? 이게 무슨 크라우드 펀딩도 아니고.
나는 당연히 나중에 연락을 받고 와서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다음 주 월요일에 연락을 할 테니 살 모델 번호와 전화번호를 남겨달라 해서 둘 다 남겼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는 것도 처음이지만 편의점에 물건을 주문하고 전화번호를 남기는 것도 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냥 없으면 안 사겠다고 하고 관둘 생각도 적진 않았는데, 질병에 걸린 채 일하는 직원이 이것저것 확인하고 점장과 통화까지 하게 만든 것이 영 미안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주문하고 며칠이 지나 월요일이 되었다.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청년이 내 연락처 적어둔 종이를 교대 근무자가 와서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는지, 아니면 점장이 주문하기를 까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 청년을 마음에 두고 있던 교대 근무자가 내 연락처를 괘씸하게 여겨 부적과 함께 불살랐는지도 모르지. 어쩐지 매사 일이 안 풀린다 싶었다. 아무튼간에 다시 쫓아가 트리를 내놓으라고 할 정도로 크리스마스를 사랑하는 처지도 아니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데……. 다음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편의점 점장이었다. 물건이 곧 들어오니 와서 사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돈이 굳다 말았군, 하고 그날 저녁 산책길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찾으러 나갔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찾으러 나갔다’라니, 써놓고 보니 이 얼마나 미국 중산층 같은 문장이란 말인가?
그런데 또 예상을 뒤집는 일이 일어났다. 도착해서 직원에게 트리를 찾으러 왔다고 하니 그는 곧장 알아듣고 구석에서 끈이 달린 상자 하나를 꺼냈는데, 예상보다 막대하게 컸다. 높이 약 40센티미터에, 정사각형 밑변은 20센티미터는 될 듯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감상할 만한 소박한 트리, 그러니까 커봐야 15센티미터 정도를 예상했던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이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았다면 살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저히 휴대할 크기가 아니었고, 시즌이 지난 뒤엔 보관도 어려울 테니까.
하지만 물건의 크기를 사진만으로 대충 가늠한 건 순전히 내 잘못이고, 두 사람에게 실컷 일을 시켜놓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팔자에도 없는 거대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서, 상자의 끈을 팔에 걸고 뒷산을 돌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사냥감을 잡은 사냥꾼 같은 꼴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걷고 집에 돌아가서 상자 속의 트리를 꺼내어 보니 더더욱 충격적이었다.
트리는 철사에 플라스틱 피복과 나뭇잎을 부착한 물건이었다. 그것까진 이상하지 않았다. 트리를 지름 10센티미터 정도의 나무 줄기 토막에 고정해놓은 것까지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것을 꺼내려하니 밑바닥의 마분지가 딸려오는 건 전혀 예상 밖이었다. 운반 중에 흔들리지 않게 고정한 탓이겠으나, 떼어내려고 보니 글루건으로 접착된 종이 표면이 마구 찢어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접착제야 잘 떼면 되니까 뭐, 하고 이번에는 동봉되어 있던 비닐 봉지를 집어들었다. 거기엔 트리를 알아서 잘 꾸밀 수 있도록 장식품과 조명 달린 전선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하기야 트리는 자기 손으로 꾸미는 게 맛 아니겠어? 하고 내용물을 꺼냈는데…… 반짝이는 비즈 줄에 줄줄이 달린 구체들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선악과와 예수의 희생을 상징한다는 그 구체들은 스티로폼 공에 반짝이 가루를 입힌 물건으로, 접착 상태가 아주 나빠서 건드리기만 해도 손에 가루가 묻어났다. 심지어 고리나 구멍을 줄에 꿰어놓은 게 아니라 글루건으로 적당히 붙여놓았을 뿐이라 곳곳에 기다란 실리콘실(사실 EVA)이 늘어져 붙어있었으며, 그러고도 접착면이 쪼개진 구체 몇 개는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며 행복의 흔적처럼 반짝이 가루를 바닥에 흩뿌렸다.
대체 난 귀한 돈을 주고 뭘 사왔단 말인가? 후회가 막심했지만, 갖고 가서 따져봐야 더 나은 제품을 받을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었던 데다, 나와 직원과 점장 셋 모두에게 불행한 결말만 기다리고 있는 듯해서 어쩔 수 없이 칼과 글루건을 꺼내들었다.
칼로 나무 받침대 밑의 접착제를 긁어내고 구체를 글루건으로 다시 고정하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이나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수습은 되었으니까 손해를 봤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에 걸맞은 경쾌한 기분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글루건을 들고 선악과와 예수의 희생을 다시 접착하는 내내, 기계화되지 않은 어느 공장에서 누군가가 장갑과 마스크를 낀 채 글루건으로 나와 같은 작업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감 상태야 어찌되든 붙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작업한 것은 아마 하루에 수백 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나도 시도때도 없이 노동 문제나 인권 문제, 혹은 사회 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드는 건 피하려는 사람이라, 즐기자고 산 물건을 갖고 그런 생각을 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직접 작업을 해 보니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을 피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좀 더 비싸고 말끔해서 사람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제품이었다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텐데, 누군가가 나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도구로 수작업했을 게 뻔히 보이니 자신이 저임금 노동의 산물로 휴일을 장식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서 고쳤으니 버릴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나는 원상복구한 트리를 접착제가 늘어진 선악과와 예수의 희생으로 장식하고, 리본을 걸고, 금빛 종도 걸고, 반짝거리는 조명도 둘러 장식 전용 칸으로 쓰는 책장에 올려두었다. 다행히 다른 이상은 없어서 전원을 넣으면 led 조명이 깜빡이며 우여곡절 끝에 만든 트리를 아름답게 비춰준다. 너무 큰 탓에 어디에 가져갈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방 한켠을 시기 적절한 모양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 점은 확실히 즐길 만했다. 다만 겨울이 다 가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면 이 애물단지를 어쩌면 좋을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자본주의의 명암을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으로 생각해야 할까? 이상한 경험 덕분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나에게 존재 자체만으로 화두가 되고 말았는데, 이 트리가 널리 공급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