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뭐든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화목하고 꼬인 구석이 없는 가족도 있을 테니 일반론으로 단언할 순 없지만, 어쨌든 간에 나의 경우 가족 여행이 상당한 고통이다.
며칠 전에는 아버지의 은퇴도 기념할 겸 가족이 다같이 부산 쪽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 누구의 의도와도 관계 없이 이 여행은 그야말로 처참한 것이 되었다. 화목함이나 가족애 등등을 떠나서 일단 이 집단은 함께 여행하면 안 되는 집단이었던 것이다.
여행이라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시간을 소모해서 일상의 갖가지 고단함을 잊고 새로운 장소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좀 엄밀하고 야박하게 따져보면, ‘일상의 고단함’에 해당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함께 여행을 가면 안 된다.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색다른 고단함이다. 고문의 배경을 지하 감옥에서 멋진 테라스로 바꾸는 격이다. 직장 상사와 함께 그 아름답다는 소금 사막을 본들 뭐가 좋단 말인가?
이런 관점에서 나의 가족 여행은 근원적으로 여행의 정체성을 상실한 상황이었는데,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즐거운 동행이 될 가능성도 없다시피 했다. 여행에서 동행하는 게 즐겁거나 최소한 정상적으로 성립이라도 하려면 관심사가 어느 정도는 일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A는 유명 성당을 둘러보고 싶은데 B는 성당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면 그건 즐거운 동행도 여행도 될 수가 없다. 늘 누군가는 시간과 돈을 내다버리는 상황을 인내하게 되어 여차하면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정확히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자연물과 가족 사진 촬영에 아무 관심도 없고 아름다운 건축물과 문화적인 현장을 보고 싶어하는 반면
아버지는 광활한 바다와 아름다운 산,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이 아니면 보는 것 자체를 손해로 생각했고,
형은 아름다운 실내 환경과 한국 특유의 난잡함이 없는 관광지에 중점을 뒀으며,
어머니는 사진이 잘 나오는 곳에서 셀카와 가족 사진 찍는 것을 낙으로 여겼다.
마치 정밀하게 짜놓은 것처럼 누군가는 짜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구성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다못해 관심사라도 통하는 게 있었다면 수다라도 떨고 다닐 수 있었겠지만, 세대 차이가 극복된 적도 없는 상태에서 적당히 주워들은 뉴스 얘기나 하는 게 고작인, 생판 남보다 좀 나을까 말까 한 처지였으니 재미고 나발이고 있을 턱이 없었고, 서로 짜증이나 내지 않으면 감사할 지경이었다(그런 점에선 생판 남을 모아놓는 게 나았다). 그야말로 달리는 명절이었다.
심지어 설상가상으로 ‘드문 기회니까’라는 이유로 계획과 무관하게 근처에 뭐가 나올 때마다 들르려 했으니, 그 결과는 숙소에서 거의 잠만 자다시피하고 다음날 피곤하든 말든 일찍 튀어나가는 것으로 돌아왔다. 비좁은 잠자리와 시끄러운 환경(형과 아버지는 코를 심하게 곤다)에서 집단적으로 취침하고 기상했으니, 그런 면에선 병영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담배도 피우지 못하고 데이터도 고갈되었으니 정신줄을 놓지 않은 게 스스로 용할 지경이다. 카메라를 챙겨가서 뭐든 열심히 찍어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고통을 통해서 내가 얻은 여행의 교훈은 다음과 같다.
1.여행은 서로 고단할 일이 없는 사람끼리 갈 것.
2.보고 싶은 곳이 다르면 따로따로 다닐 것.
3.계획에서 벗어나도 어디서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대강 계산할 것.
4.맛있는 음식과 충분한 휴식을 절대 빼놓지 말 것.
5.충분한 데이터를 준비할 것.
6.주변에서 사진 찍는데에 오랜 시간을 쓴다면 대응 촬영할 것.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뜬금없는 것 같지만 여기서 잠깐 게임 이야기를 하자.
요 몇 달에 거쳐 위쳐3를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2015년에 발매된 이 명작은 중세풍 판타지 세계를 아주 멋지고 아름답게 그리고 있어서, 마을이며 도시며 성이며, 그 사이사이를 이동하면서 보이는 산과 들 모든 것이 정말로 감탄스럽다. 특히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는 시간대의 표현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매번 소름이 돋을 정도라 나도 적당한 거리는 순간이동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달리며 몇 번이고 스크린샷을 찍어댔다.
그런데 그걸 생각하면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번 여행에서 나는 자연물에 도통 감동할 수 없구나, 생각했던 것은 뭐란 말인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위쳐를 다시 해봤는데, 딱히 감동이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레벨이 너무 높아져 게임적인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풍경을 보는 감동은 여전했다.
그리하여 내가 내린 결론은, 자신이 자연 경관에 감동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원치 않는 상황에서 선택권 없이 부자유한 템포로 구경한다는 조건이 감동을 대폭 깎아먹었다는 것이다. 흔히 어려운 자리에서 식사하면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른다고 표현하는데, 풍경도 여행도 그렇다. 즐거울 조건이 아니면 즐거울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류의 피치 못할 여행에는 짧게나마 몰입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뭔가를 꼭 챙겨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예전에 어머니와 패키지 여행을 갔을 때는 게임이 그 역할을 해줬고, 이번에는 카메라가 그나마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요컨대 데이터 무제한 스마트폰만 있으면 게임이든 카메라든 해결이니 정신줄만은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 거라는 뜻이다. 스마트폰이 우리를 일상의 고단함에 매어놓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도 참 얄궂은 일이지만, 여행이 일단은 즐거워지자고 하는 것이니 즐거워지기 위한 기초적 멘탈은 유지하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