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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20. 2021

위인전의 맛, 격동 500년

과학자의 삶이 나를 위로할 때

전기문, 위인전을 좋아하시는지?

나는 어릴 때는 위인을 다룬 학습 만화 덕에 좋아했다가, 이후에 그리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가, 나이만 먹고 주변에 폐를 끼치며 사는 나날이 길어지다 보니 점점 싫어하는 쪽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특히 '내가 이렇게 별 고생을 다 했지만, 결국은 이 정도로 대단한 일을 하며 돈도 잘 벌고 산다'라는 무용담 같은 인터뷰를 보자면, 아무래도 내 인생은 어리석고 처참하고 폐기처분해야 마땅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탓이다. 인터뷰와 전기문은 한참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타인의 삶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보기가 달갑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다 올해 초부터 우연히 '과학과 사람들'이라는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인 '격동 500년'을 알게 되었다. 과학과 사람들은 원래 과학 관련 팟캐스트와 행사를 다양하게 진행하는 회사였는데, 이들이 왓챠와 협업하여 드라마 '체르노빌' 관련 방송‘데브스’관련 방송을 한 게 내 눈에 띄었고, 이것을 본 뒤로 곽재식 작가가 나오는 격동 500년 시리즈가 추천에 뜬 덕이다. 아마 빌 게이츠 편이었을 것이다. SF 소설과 교양서 작가, 교양 방송 패널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곽재식 작가야 믿고 볼 수 있으니 반갑게 클릭한 것이 유튜브가 맺어준 인연 혹은 경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튼,  퍽 오래도록 과학자들을 조명해온 이 격동 500년 시리즈는 강연자 또는 발표자 포지션의 곽재식 작가가 각종 문헌을 조사해서 과학자의 일생, 그리고 과학적 업적에 대해 얘기하고 패널 2인이 질문을 하거나 농담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듣고 있자면 일단 '팀 격동'이라는 별칭의 3인 체제라는 게 참으로 적당하다 싶다.


방송이라는 게 원래 한 명이 줄곧 정보만 전달하면 너무 단조로워지기 쉽고 2인으로 문답을 하면 어딘지 모르게 형식적으로 짠 대본을 따라가는 느낌을 주거나 아예 자기들끼리만 웃고 떠드는 방송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런데 3인이면 의외성 있는 전개로 나아갈 때도 있고, 너무 요상하다 싶을 때 누군가 한 명은 방향을 수정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종종 흔들리는 균형 속에서 곽재식 작가는 태블릿도 아닌 A4 용지 한 장만 참고하면서 내용을 진행하는데, 처음에는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정도였던 방송이 오만 잡다한 지식과 영화 얘기 등 연관 정보까지 쏟아내면서 최근 아인슈타인 편에서는 7시간에 달하는 대장정이 되었다. 그러고도 메모지는 A4용지 한 장에서 변하지 않았으니 정말이지 놀랄 일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이 아인슈타인 편을 듣고  위인의 전기도 알 만한 것이고, 그게 마음에 위안을 주기도 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아무리 대단한 업적을 이룬 위인들이라도 대개 순탄하기만 한 삶을 살지는 않았고 암담한 삶의 파랑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혼자서 누구보다 어리석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고독감이 얼마간 해소되기도 했던 것이다.


가령 아인슈타인은 대학에서 교수들과 그닥 원만하게 지내지 않기도 했고 국적 문제까지 겪은 통에 도무지 그 어디에도 취직하지 못해 고통받았다. 이에 보다 못한 아버지가 여기저기 편지를 보내기도 했으나, 이것은 답장 한 번 받지 못하는 헛수고로 끝나고, 우리가 그의 직장으로 흔히 알고 있는 특허청은 결국 배경 좋은 친구 아버지의 연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아인슈타인은 생계를 위해 신문에 과외 광고도 내야 했다. ‘개인 교습 수학과 물리, 전 학년 대상으로 철저히 지도, 스위스 연방 이공학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가 32번지 1층, 시범 강의 무료’(출처: 과학과 사람들 뉴스레터 84호) 라니, 과학자 중의 과학자인 그도 먹고 사는 것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과외가 인연이 되어 적당히 술 마시고 떠들고 노는 3인조 친구들이 결성되는데(링크), 그 이름도 놀라운 '올림피아 아카데미'였다. 대충 놀기만 해도 되는 것을 굳이 시답잖은 이름을 붙였다는 데서 이들의 젊음과 시시덕대는 유머 감각 역시 남 같지 않게 느껴진다.


곽재식 작가는 과학자의 삶을 조명하는 데에 그닥 중요하지 않은 듯한 이 부분을 다루며,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관계가 아주 큰 정서적 위안이 되었을 것이라며 특유의 연기와 익살을 섞어 강조한다. 이 부분이 바로 내가 격동 500년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나도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게임과 잡담이나 하는 소규모 모임을 갖고 있지만, 이런 쓸모없는 시간을 위해 인간이 살아간다는 실감을 얻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문학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해주는 것'이라면, 이 부분에서 격동 500년은 내게 문학의 기능을 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얘기가 지나치게 거창해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격동 500년이 인생극장 보듯이 경건한 마음으로 바르게 앉아 감상할 방송은 결코 아니다. 그런 식이면 전체를 다 듣고 다시 듣고 있지 않았으리라. 어마어마한 방송 시간을 생각하면 역설적인 일인데, 적어도 내게 이 방송은 스낵컬처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스낵컬처의 생명이 무엇일까? '언제든, 오래 붙잡지 않아도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격동 500년이 의외로 그렇다. 잠깐 집안일을 하면서 조금씩 듣거나 봐도 즐거움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한 인간의 삶을 따라가는 이야기로서의 재미일 때도 있고, 잡다한 지식을 아는 소소한 기쁨일 때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 탐험가의 조사단원이 몽골을 탐사하고 인천을 거쳐 귀국하려고 열차에 탔다가 경성이 아닌 개성에서 잘못 내려, 하루 시간을 보낼 겸 방문한 송도 고등중학교 박물관에 감탄하여 이를 미국에 알려주고, 덕분에 교사로 생활하며 나비 학자로서 그리 편치는 않게 연구하던 석주명이 하버드의 지원까지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 같은 것을 듣자면 이런 기연이 있나 싶어 요즘 웹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한편으로 현대 통신 기술의 기반이 된 주파수 도약 확산 방식을 개발한 헤디 라머의 첫 결혼의 파국과 MGM 대표를 만나 헐리웃으로 가게 된 이야기(링크)부터 트로트 '카스바의 여인'의 '카스바'가 무엇이며 어떻게 한국에 알려지게 되었는가 등등을 듣자면(링크) 영화 리뷰나 교양 채널을 틀어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온갖 정보와 재미가 마구 쏟아지는 방송으로 알쓸신잡 시리즈가 있긴 했으나, 격동 500년은 곽재식 작가 한 명의 조사력과 지식, 입담을 주축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새삼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이렇다 보니 요즘은 격동 500년을 들으며 산책하는 것이 일상의 가장 큰 낙이 되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요즘 들어선 책을 읽으면 뭘 분석하고 배우려 들고, 게임을 하면 놀이가 아니라 노동을 하는 느낌을 받곤 해서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생산적이지 않아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시점에 내 인생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면서 듣고 있자면 자신이 지적으로 좀 더 나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한편으로 인생살이가 누구나 순탄치 않구나 싶어 위안이 되는 방송을 찾게 되어 즐거울 따름이다. 


요즘은 즐길거리를 새로 찾아다니는 것 자체가 피로와 고통이 되기도 하는 시대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만큼 취향에 맞으면서 오래가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건 맛집을 찾는 수준을 넘어 생활의 동반자를 찾는 수준으로 중요해진 것 같다. 오랜만에 찾아낸 동반자 같은 방송인 격동 500년이 오래도록 계속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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