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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Sep 01. 2021

남성 유두의 시인성과 매너 문제에 관하여

요즘은 시간의 흐름이 모두 허망하고 비참하게만 느껴져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지구는 열심히 태양 둘레를 공전했고 여름은 마냥 쓸쓸히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 아마 이 글은 시기적절한 글이 아닐 것이다.


어김없이 코로나가 기승을 부린 올 여름은 외출이라고 할 만한 외출 기회가 적었다. 그래서 전보다 더  옷차림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는데, 어디서 남자들 젖꼭지 도드라져 보이는 게 영 민망하고 보기에 편치 않다는 얘길 주워들은 뒤로 그 무신경함에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좀 마음에 걸리는 옷들이 있긴 했다. 가령 아주 얇고 매끄러운 여름옷 몇 벌은 시원하게 입자고 생각하고 걸쳤다가, 거울 속에 비친 내 가슴이 처음에는 우습다가... 영 민망해서 다시 벗어버리는 경우가 제법 있었던 것이다. 반팔을 안에 껴 입어서 굴곡을 무마해보려는 시도도 당연히 해봤는데,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과학적으로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면 옷의 두께와 유두의 높이를 계산해서 적정한 옷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게 그런 지식은 없는 터라 그렇게 얇은 옷들은 버리지 못한 자유의 갈망처럼 서랍장 안에 포개져 있다.


그럼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자. 유두가 도드라져 보이는 게 대체 뭐가 민망하단 말인가?

이건 복잡한 문제다. 무조건적으로 민망한 것은 아니니 구체적인 조건을 따져보자.


일단 여자가 있을 때 더 민망하다. 어지간히 격식 있는 자리가 아닌 다음에야 남자만 있는 자리에선 전혀 거리낄 게 없다.

그러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노출이 당연한 자리라면 여자가 있든 없든 무방하다.  가령 해수욕장이라면 웃통을 벗고 있어도 유두가 어떻든 말든 대수롭진 않다. 아주 대수롭지 않다기 보다는 그냥 꼬락서니를 좀 감추고 싶다는 부끄러움 안에 포함되는 것 같다.

그리고 해수욕장이 아니더라도, 집 근처 시장이나 뒷산, 편의점 따위를 돌아다닐 때는 홑겹 냉감 티셔츠 한 벌로 다녀도 딱히 이상할 게 없다. 누가 몇 초 이상 볼 일이 없기 때문 아닐까?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단지에서 웃통을 벗어제껴선 안 되겠다. 얼마 전에 단지 내를 뛰다가 남고생 셋이 시원하게 웃통을 벗고 다니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역시 민가에선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팍 들었다. 아파트에서 물총싸움 대축제라도 개최하면 또 모를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신촌 거리에서 그런 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멀쩡한 골목길에서 수영복 입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목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또 괜찮았다. 인식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그러나 유두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자리에서, 여성과 장시간 같이 있게 된다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민망한 것보다 '자신이 굉장히 매너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어 약간 좌불안석이다. 상대에게 호감을 사고 싶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묘하게 신경이 쓰인다. 누가 나 없는 자리에서 ‘그 양반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지 않냐?’ ‘진짜, 좀 가리고 다니든가.’라는 식으로 욕하진 않을 거라고 99퍼센트 확신하지만, 록키가 영화에서 한 말마따나 사람은 잊혀도 평판은 남는다. 요컨대 ‘그 누구더라? 옷차림 좀 칠칠치 못하던…….’으로 회상될 여지는 있다는 뜻이다. 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을지라도, 불쾌하거나 우스꽝스러운 인간으로 남고 싶지는 않다. 남대문을 반쯤 열고 다니던 사람으로 기억되기 싫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옷차림과 매너 얘기를 하자면 역시 여성의 옷차림 얘기도 피할 수 없는데, 예전에 나는 옷이 틀어져서 브래지어 끈이 보이게 되었을 때 말해주는 게 맞는가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상대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매너가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열린 남대문처럼. 하지만 나중에 덧글을 보니 '대체로 상관 없으니 신경 쓸 것도 없다'는 게 중론인 듯 했다. 그 뒤로는 나도 아무렴 어떠랴 생각하게 되었다. 하기야 브래지어 끈이 보이든 브래지어가 보이든 대관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가상의 매너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매너가 아닌가 생각한 것 자체가 그 가상의 매너를 실존하게 만드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성이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고 다니는 것은 어떨까? 이것도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남이 뭔 상관이야’라고 생각하거나 주장하고 싶지만, 그러면서도 ‘그건 좀 그렇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니 나는 이 경우를, 내가 내 유두를 신경 쓰는 것과 유사한 기준으로 판단하는 게 최소한 나의 사고관 안에서는 공정한 것 같다. ‘남자든 여자든 꼭지가 좀 도드라져 보이든 말든 대체 뭔 상관이야?’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야 모두가 편해지겠지만, 그거야 어느날 갑자기 해결될 일은 아니고.



상체가 이렇게 생겼다면 아무렇게나 입고 살아도 될 것 같지 않습니까?


아무튼 유두의 시인성 문제에 대한 매너 관념이 아직도 불분명한 것은 사실이고, 문화가 변화할 때까지 말짱한 여름옷을 썩히는 것도 좀 아깝다 싶어서 얼마 전에는 다이소에서 두 종류의 패치를 사서 유두를 은닉하려 해봤는데...... 아무리 설명서를 잘 따라해도 별반 소용이 없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선 패치의 윤곽선까지 드러나서 오히려 더 민망한 꼬락서니가 되기도 했다. 매너를 지킨다고 시도를 하긴 했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했다고 가슴에 써붙이고 다니는 꼴이 된 셈이다.


그리하여 은닉에 실패한 그날은 옷을 패대기치고 패치를 뜯어버린 뒤(환불하고 싶긴 했지만, ‘자, 이렇게 유두가 하나도 안 가려지잖아요!’라고 따지러 갈 순 없으니) 적당한 두께의 줄무늬 폴로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이제 내 가슴에 신경 쓸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니 속이 시원했다. 여성들이 잘 맞고 예쁜 옷을 입으려다 가슴이 도드라지거나 단추 사이가 벌어지는 게 신경 쓰여서 집어치우고 큼지막한 후드티를 입고 출근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묘하게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예전에 후배가 내가 자주 입는 면 조끼를 입고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고 오늘은 왜 그 조끼가 없냐고 묻기에 얼버무린 적이 있는데, 진실을 여기 밝힌다. 그 조끼는 유두의 시인성이 너무 높다 싶을 때 가리는 용도로 걸치고 다닐 때가 제법 많았노라고…….





추신


브릿G에서 개최한 제2회신체강탈자 문학 공모전(링크)에서 저는 오늘 "자애의 빛"으로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바로 치료할 수 없어 콜드슬립을 거친 뒤 뇌질환을 치료받은 누나가 이상할 정도로 선한 사람이 되어 겪는 사건과 공포에 대한 단편 소설입니다. SF나 공포 문학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추천드립니다(링크. 초반부 무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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