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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Nov 03. 2021

밤에는 과자가 부른다


어릴 때부터 과자가 좋았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이긴 한데 세상에는 다양한 식성과 취향이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과자가 너무 달고 짜게 느껴지거나 소화가 잘 안 되는 등 다양한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릴 때부터 과자를 좋아한 것도 특기사항으로 칠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어디서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인간이 바삭바삭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은 거의 유전자에 새겨진 취향에 가깝다고 한다. 먼 옛날엔 바삭바삭한 음식이란 곧 신선한 채소나 과일, 혹은 곤충일 경우가 많아서 이런 것들을 잘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남긴 유전자가 지금까지 전해진 덕에, 우리도 과자를 먹으면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는 생각에 즐거워진다는 얘기다. 하쿠나마타타.


그렇다면 내가 기적적인 우연으로 바삭한 것을 좋아하는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과자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까? 실험은 불가능하지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어릴 때부터 과자가 보상으로 너무 잘 작동한 탓이다. 뭔가 부모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 과자 사 먹으라고 천 원쯤 받는 경우가 제법 있었고, 어떤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큰 낙으로 삼는 개념이 없었던 시절까지는 생일 선물로 롯데 과자 종합 선물 세트를 받곤 했으니까, 과자는 곧 기쁨과 행복이라는 등식이 뇌내에 성립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과자 세트를 반가워하던 어린이는 과자와 탄산음료로 파티를 벌이는 학창 시절을 거쳐 대롱 모양 과자로 맥주를 빨아먹는 어른이 되었는데…… 어른도 어른 나름이라 여차하면 과자와 맥주를 사다 먹던 20대에 비해 30대부터는 과자도 맥주도 즐길 일이 크게 줄고 말았다. 내장이 지친 탓인지 입으로 들어갈 때까지는 좋고 그 뒤로는 그리 기쁜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이다. 불교의 지옥에서 먹기만하고 목으로 넘기지 못한다는 아귀의 체험판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내장의 안녕과 건강의 수호를 위해 과자라는 번뇌를 모두 끊게 되었다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결말일 텐데, 유전자와 영혼에 각인된 취향은 여전히 어디 가지 않아서 가끔씩 사무치게 과자가 그리워진다. 특히 장기화된 다이어트와 만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요즘은 멀쩡히 저녁밥을 잘 먹어놓고도 10시쯤 되면 뭔가를 아그작아그작 씹어먹고 싶어진다.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고 3시간 안에 허기를 느끼면 그건 스트레스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유발된 ‘가짜 배고픔’이라는데, 가짜 배고픔이라고 해서 그 고통과 욕구까지 가짜가 되진 않는 것 같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처음 내가 선택한 것은 그냥 내가 바라는 대로 과자를 사다 먹는 것이었다. 무슨 계체량을 앞둔 권투 선수도 아닌데 먹고 싶으면 먹어야지. 그래서 여차하면 가까운 아이스크림 할인점과 다이소에서 과자를 한 봉지 두 봉지 사다 놓고 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나라도 과자 한 봉지 먹을 자격은 있겠지 생각하기 쉽지만, 그건 생각보다 얻기 힘든 자격이다


기왕 타락한 김에 그때 먹었던 것들 중 흥미로운 것을 꼽아보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와사비맛 프레첼. 봉지는 작지만 내용물은 제법 꽉 찬 편인데,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그 어떤 와사비맛 과자보다도 더 와사비 맛이 강렬했다. 다른 와사비맛 과자가 와사비 향만 살짝 즐기게 해주는 수준이라면, 이건 그야말로 회나 초밥을 와사비 간장에 떨어뜨렸다 건져 먹을 때의 그 고통이 몰려올 지경이다. 하루 기분이 너무나 처참해서 어떤 식으로든 자학하고 싶은 날에 제격이라고 할까. 다만 진지하게 건강이 염려되어 그만 사먹게 되었다.


다이소에서 네다섯 개를 묶어서 파는 별뽀빠이도 굉장히 인상깊었다. 익히 아는 적당히 달달한 라면땅 맛인데, 봉지가 딱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라 손에 들고 마시듯이 입안에 들이붓고 우적우적 씹어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먹기 전엔 퍽퍽할 것 같았는데, 중간중간 들어오는 별사탕이 타액 분비를 자극하는 것인지 큰 답답함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단맛이 아주 절묘해서, 조금만 먹고 나머지는 천천히 먹자는 결심이 매번 무너질 정도로 감질났다. 단 과자는 짠 과자만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별뽀빠이 덕에 입맛을 계속 돋우는 단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건강을 지탱하는 기둥에 기관총을 쏘아대는 기분이 들어 포기했다.


집 앞에 생긴 아이스크림 할인 매장에서 묶음으로 파는 우마이봉도 상당히 훌륭한 과자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호화롭기까지 한 과자다. 어릴 때 가장 좋아한 과자가 치토스인데, 우마이봉은 식감과 맛이 치토스와 흡사한 대신에 몇 배나 거대하게 만들어져 낱개로 포장되어 있다. 과자계의 헤라클레스 장수 풍뎅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겠지?


우마이봉은 묶음으로 사면 잠깐 구미가 당겨서 살 수 있는 과자의 가격 범위를 넘어서지만, 먹어보니 생각보다 가성비가 적절했다. 낱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뭔가 먹고 싶을 때 한 개 먹으면 대체로 욕구가 잠재워지고, 아무리 더 먹고 싶어도 한 자리에서 세 개까지는 먹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욕구를 적당히 달랜다기보다는 한 방에 보내버리는 폭격에 가까운 과자다. 이 녀석은 기회가 되면 또 사놓고 싶다.


과자 얘기를 꺼낸 김에 오레오 얘기도 하자. 오레오는 너무 달고 무거운 감이 있어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밤에 먹지도 않는데, 오랫동안 머리를 쓰는 보드게임 모임에 갈 때 꼭 챙기게 된다. 편의점에서 2+1행사를 할 때가 많은 데다가, 이 정도로 당분을 충전하기 좋으면서 깔끔하게 한 입에 먹기도 좋은 과자가 많지 않다. 게다가 가운데 발라진 크림 덕분에 쿠키 치고 식감도 매끄러운 편이다. 그리하여 모임 때마다 오레오를 챙겨간 결과 오레오 광팬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는데, 더 나은 대안을 찾지 못한 결과에 불과하다. 많은 인생이 완벽하게 이상적인 결과를 골라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가장 적당한 선택지를 고르다 보니 이루어진 결과이자 과정인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얘기를 야식과 과자로 되돌리자. 한동안 이렇게 밤마다 과자를 주워먹다 보니 체중에 적신호가 켜질 수밖에 없었다. 몇 달의 고생이 허사가 되었다. 좋게 생각하면 몇 달의 고생을 겪은 덕에 이 정도로 멈출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아무튼 체중도 체중이고, 아침에 속이 더부룩한 것도 개운치 않아서 과자를 대체할 음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은 집에 있는 뻥튀기를 먹기 시작했는데, 뻥튀기라는 게 입을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효과는 있지만 어째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는 느낌이 없어서 먹다 보면 다시 아귀가 된 기분도 든다. 게다가 검색해보면 칼로리가 그리 낮지도 않은지라 요즘은 포기하고 귤이나 사과 따위 과일을 먹고 있다. 과일 중에선 사과가 가장 아작아작 먹는 보람이 있어서, 엊그제는 한 박스를 주문했다. 사과라고 칼로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과자보다는 나을 것이다. 확실히 아침에 속도 편하고.


생각해보면 치토스나 사 먹던 시절에는 특유의 묘한 텁텁함 같은 뒷맛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사과를 잘 먹지 않았는데, 이제 사과를 궤짝으로 주문하게 되었다니 식성의 변화란 참으로 놀랄 일이다. 이것도 어쩌면 늙어서까지 소화 안 되는 벌레나 막 주워먹던 선조들은 다 죽어서 유전자가 남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나저나 과학과 식품 공학이 발달하면 미래에는 아무리 씹어대도 씹는 맛이 껌 이상으로 잘 살아남는 그런 신비의 식품이 등장하지 않을까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개껌이 가장 비슷한 물건인 것 같다. 첨단 기술을 접목하면 건강을 체크해주는 스마트 개껌 정도는 나올 수 있겠지. 그러나 밤에 가짜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스마트 개껌으로 욕구를 진정시키는 미래보다는 역시 신선한 사과를 먹는 편이 나은 것 같다.


추신. 사과를 먹어도 만만치 않게 살이 찌길래 결국 사과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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