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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28. 2020

낡은 노트북을 수리하며

2007년에 출시된 노트북(Xnote Z1)을 수리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그 정도로 오래된 물건이면 좀 버릴 것이지 어떻게 아직도 쓸 생각을 하고 있냐고? 글쎄, 나도 성능 좋은 새것을 쓰면 참으로 좋겠지만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돌아가는 물건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확실히 해둬야 할 부분은, 수리 중인 노트북이 내가 주로 쓰는 물건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주로 쓰는 기기는 맥북 에어 2012mid로, 햇수로 따지면 이 역시 낡은 기기지만 작업하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사실 엄청난 연산 능력을 요구하는 게임, 혹은 영상, 음향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늦게 잡아도 2010년쯤에는 이미 적당한 가격에 충분한 성능을 갖춘 컴퓨터를 살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쓰는 맥북도 윈도우까지 돌리기에 128기가가 너무 모자라서 SSD를 교체했을 뿐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았고, 앞으로 영영 안 바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만간 꼭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엄청난 고사양 번역 프로그램이나 연애 시뮬레이션 따위가 나와서 울며 겨자먹기로 맥북을 갈아치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때까지는 일단 기술의 발전 만만세를 외치며 지금 기기에 안주하기로 한다.


그럼 2007년 노트북은 뭐하러 손보고 있는가? 이건 익히 알려진 대로 한국에서 맥북만으로 살아가는 게 여전히 몹시 불편하기 때문이다. 관공서나 금융 기관을 이용하려면 매번 맥을 종료하고 윈도우로 재기동해야 하는데, 이게 여간 불편하지 않을 뿐더러 매번 윈도우 작업 환경이 온갖 쓰레기로 뒤덮이는 게 고통스럽기 그지 없다. 외계인 소굴로 들어가면서 들키지 않기 위해 방금 적출해서 따끈따끈한 외계인 시상하부를 전신에 문질러대는 기분이다. ‘구라 제거기’ 같은 프로그램으로 깔끔히 청소할 수 있긴 하지만 나중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나중에 깨끗이 씻을 수 있다고 굳이 똥밭을 기어다니긴 싫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수많은 맥 유저들이 그렇게 하듯, 더러워져도 아깝지 않은 환경, '관공서 전용 머신'을 별도로 구축하기로 한 것이다. 험한 일을 하러 갈 때 버릴 옷이나 군복을 찾아 입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게 작심하고 2007년 노트북을 오랜만에 굴려보니, 배터리가 죽어서 시간도 맞지 않고 속도도 시원치 않은 상태였다. 쓸 수 없는 건 아니지만 이래서야 쓸 일이 있기 한나절 전에 전원을 켜야 할 지경이었다. 이미 하드 수명이 끝나간다는 판정을 받긴 했지만 이건 너무하다.


결국, 돈 들이긴 싫지만 저용량의 SSD가 제법 싸기에 새 것을 주문해서 바꿔넣고, 시간도 알아서 맞추게 이런저런 설정을 했으며, 쓸모없는 자료도 솎아냈다. 지금은 예전 하드에서 필요한 자료를 옮기는 중이다. 내일쯤엔 해체해서 구리스를 다시 바를 작정이다.


아무튼 이쯤 해놓고 보니 꼭 필요할 때 부를 비밀 병기가 마련된 것 같아서 믿음직해 보이는 면도 없지 않다. 영화나 애니 같은 것을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구닥다리로 날 막겠다고?’같은 소리나 듣는 구형 장비가 대활약하는 장면이 있지 않은가? 물론 컴퓨터의 경우엔 자기 테이프가 돌아가거나 진공관이 번쩍이는 수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그런 맛이 나긴 하겠지만, 2007년형이면 한국에 스마트폰이 보급되기도 전에 나온 선사시대 기기니까 구닥다리 대접을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물론 낡은 물건도 허용 범위라는 게 있다.


써놓고 보니 구닥다리 기기를 고쳐서 쓰는 게 무슨 자랑인가 싶은데, 신문물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시대가 된 탓인지 갈수록 굳이 고생해서 아주 낡은 물건을 쓰거나 지나간 유행을 다시 즐기는 것이 풍류로 여겨지고 있다. 턴테이블이 다시 보급되고, 지나간 노래들이 최신 유행이다. 나로서는 제법 반가운 노릇이다. 그냥 돈이 아까워서 낡은 것을 쓰고 있을 뿐인데 멋스러운 사람 취급까지 받을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명예로운 구두쇠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지식과 사상과 시스템은 늘 새로운 것으로 업데이트해야 하지만, 나 혼자 조용히 쓰는 물건은 그럭저럭 오래도록 쓰고 싶다. '기억을 기록하는 장비는 새것을, 그 자체로 기억이 된 사물은 낡은 것을’이 내 오래된 신조다. 

……아니, 사실 방금 만들어 따끈따끈한 新신조지만 이것도 사상이니까 새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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