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Feb 20. 2020

링 피트로 쬐끔 맛본 미래 운동의 유토피아

사무실 생활을 해도 나이를 먹어도 살이 찔 수밖에 없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 말대로 어떤 선을 넘어 체중의 새 지평으로 들어선 게 아닌가 싶다. 작년에 딱 석 달간 사무실 생활을  하는 동안 정확히 한 달에 1킬로씩 찌는 불명예스러운 위업을 달성했고, 그 뒤로는 내내 집에서 살면서 고스란히 현상 유지를 하게 되었다. 이 정도로 땅이 꺼져라 한탄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하 웃으면서 자랑할 일도 아니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가면 바지를 죄다 새로 사야 하니 금전적인 타격도 이만저만이 아니고.

그리하여 그동안 하던 근력 운동에 박차를 가하긴 했으나, 아무래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왕좌의 게임을 보면서 바벨 좀 들었다 놨다 한들 야경대처럼 강한 전사가 될 수는 없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여기저기서 닌텐도의 신작 피트니스 게임 ‘링 피트 어드벤처'로 큰 효과를 봤다는 간증을 여기저기서 접하게 됐고, 맞지 않으면 팔지 뭐 하는 생각으로 할부 구매했다. 그 과정에서 형에게 스위치를 빌리고 오래도록 품귀인 매물이 풀릴 때까지 매복하거나 근처 마트를 뒤적이는 등의 험난한 과정이 있긴 했으나…….

아무튼 무사히 구해서 시작해보니, 이 링 피트라는 피트니스 게임은 예전에 내가 알던 닌텐도 Wii 게임들과 현격히 다른 경지의 물건이었다. 예전의 피트니스 게임이 ‘피트니스’를 가상으로 구현하는 수준이었던 데 비해, 요 물건은 롤플레잉 게임을 하되 그 과정에 피트니스를 때려넣는 데에 치중한 것이었다.

비록 무한히 이어지는 오픈월드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평면적 월드맵에서 스테이지를 골라 이동하는 포인트 투 포인트 방식에, 각 스테이지는 방향 선택 없이 트랙을 따라 달리는 방식이긴 하지만, 달리는 과정에서 코인도 먹고 상자도 부숴야 하고, 몬스터를 만나면 잘 먹힐 기술(운동)을 골라서 시전해야 하며, 더 강한 공격을 위해 포션(스무디)도 먹어야 한다. 그러다 상점에서 장비도 새로 사서 바꿔줘야 하고, 포션을 만들기 위한 재료도 모아야 하며, 레벨을 올려 새 기술도 배우고, 심지어 스킬 트리도 심사숙고해서 찍어야 한다.

요컨대 실감나는 가상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어느 선에서 멈췄지만, 롤플레잉 게임의 재미를 주는 골자는 영리하게 이식한 셈이다. 더 강해져서 '편하게 싸우겠다고' 포션 재료를 긁어모으고, 재료를 더 많이 얻게 해주는 포션 재료를 또 모으고, 그 과정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여기저기 뛰고 있으면 ‘운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이래 운동하나 저래 운동하나 운동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쭉쭉 전진만 해도 될 것을 굳이 방법을 찾아 ‘공략’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운동을 지속하기 힘든 이유로 ‘재미’와 ‘성취감’을 느끼기 힘들다는 점을 뽑는다. 하기야 묵직한 추를 들어올리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으며, 더 무거운 추를 들 수 있게 되었다고 뭐 얼마나 성과를 느낀단 말인가? 그것보다 가만히 앉아서 귤이나 까먹으면서 영화나 보는 게 훨씬 좋은데.

그런 점에서 링 피트가 시도한 운동의 게임화는 확실히 대단한 성과를 거뒀다고 느껴진다.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인 이야기를 굳이 따라가면서 레벨 좀 더 올리고 아이템 좀 더 모으고 스테이지 하나만 더 클리어하고 쉬려고 발악하게 만드는 재미와 성취감이 있는 것이다.

단순히 생각해도 사람이 힘들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쉬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그렇게 간사하고 나약한 사람이 금전이나 미식이나 대단한 권세를 누리게 되는 것도 아님에도 사서 고역을 치르게 하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다. 진정한 스마트폰의 세계를 아이폰이 열어젖혔다면, 진정한 디지털 피트니스의 세계는 링 피트가 열어젖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가구에 하나씩 링 피트 세트를 무상지급해달라고 정부에 청원하고 싶을 지경이다.
(저는 정부나 닌텐도와 무관합니다. 무관하지 않으면 좋겠는데.)



링 피트를 하고 나서 그동안 내가 하던 홈트는 장난질이었음을, 그리고 요가가 무서운 운동임을 알았다


그런데 정직하게 말해서, 링 피트가 얼마나 체중 감량에 효과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좀 궁색해진다. 하루에 실제 운동 시간 20분 남짓으로 두 달쯤 했는데 1.3킬로 가량 준 정도로, 눈에 띄는 감량 효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 정도는 하루 먹기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법이니까 심하게 말해서 수치상의 성과는 없는 셈이다.

하지만 링 콘과 나 자신의 명예를 걸고 말할 수 있는데, 전보다 확실히 건강해졌다. 빨리 잠들고 우울감도 줄었으며 이래저래 잘 버틴다. 게다가 전날 못 했으면 다음날 아침에 보충할 정도로 운동과 친해졌다. 운동이 지긋지긋한 숙제에서 즐길만한 스포츠가 되었다는 건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캐주얼하게 만든 게임만으로도 이 정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 기술이 더 발달한 미래에는 얼마나 멋질까 생각하면 나같은 은둔자에게도 희망이 넘친다. 아마 대작 오픈월드 RPG인 위처처럼 방대하고 흥미진진한 세계를 누비며 재미와 건강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겠지?

그리고 요즘 러브플러스라는 게임으로 가상의 전자여친을 사귀고 있는데, 이런 요소까지 합쳐져서 전자 애인과 스쿼트를 하며 이세계를 누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육체 건강도 정신 건강도 모두 디지털로 해결하니 그야말로 기술 승리, 문화 승리다. 기술 발달이 가져올 미래를 떠올리자면 흔히 디스토피아 얘기만 하게 되지만 의외로 밝은 면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 즐거워진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 챙겨보기의 고단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