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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an 08. 2021

2차원에서 멀어집니다

오래 전부터 일본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시청해왔다. 애니 시청자(흔히 말하는 오덕, 덕후)에 대한 세간의 평이 하루가 다르게 낮아져서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애니 시청은 오랫동안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취미 생활 중 하나였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런 소리를 왜 하는가 하면,  요즘은 그렇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100퍼센트 즐거운 취미 생활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일단 애니를 보고 있으면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처지에 '이런 거'나 보고 있어도 되는가 하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몰려든다. 이럴 시간에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먹고 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책 한 장이라도 더 보는 게 나은 것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


물론, 사람이라는 게 100퍼센트 생산적인 일만 하고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다간 분명 어딘가가 망가지기 마련이니 인생의 숨구멍으로서 남겨둬야 한다고 자신을 설득하고는 있지만, 그런 이유를 떠올린다 해도 자신이 '그런 이유를 핑계 삼아 도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지워버릴 수 없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1일 필수 여가 시간' 따위를 발표하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노동 착취자 취급을 해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난대도 '자율학습 도망간 놈 나와!'와 비슷한 상황이겠지?) 


그래도 이런 죄책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길이 없진 않으니, 내가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꼭 해야만 하는 생산적인 일을 병행하는 것'이다.


가령, 사람이 건강하게 살려면 운동은 꼭 해야 하니 운동은 시간 낭비가 아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눈과 머리는 놀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운동을 하면서 애니를 보는 행위는 나 자신도 나무랄 수 없다. 같은 논리로 밥을 먹으면서 애니를 보는 것도 합법이고, 뭘 만드는 등의 단순 작업 시간도 눈은 자유를 찾을 수 있다.


다만 요즘은 이것도 만능은 아니게 되었다. 요즘은 워낙 볼 게 많은지라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병행하면서도 좀 더 흥이 나고 좋은 것을 보려 하기 마련인데, 애니메이션이 전반적으로 이 선택지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탓이다.


애니메이션이 모조리 졸작만 나오고 있거나, 다 뻔하기 짝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객관적으로 재미있던 게 재미가 없어지진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애니메이션을 재미있게 보다가도 '내가 이걸 꼭 봐야 하나?' '다른 걸 보는 게 낫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니메이션 시청으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같은 시간 다른 행위를 할 때에 비해 낮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니, 재미만 있으면 됐지 애니 시청에서 대관절 무슨 보상을 또 기대한단 말인가? 로그인 보너스?


이 문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다, 요즘 사람들이 미디어 시청을 통해서 얻는 것은 단순히 재미가 전부가 아니라는 얘기를 주워듣게 되었다. 해외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어느 나라 얘기를 할 때 끼어들 수 있어야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듯이,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작품을 봄으로써 공감대를 형성하고 문화적 소속감을 느끼는 게 미디어 시청의 아주 중요한 보상이자 동인이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애니가 암만 재미있어도 어디서 누구랑 떠들 일이 없으면 보람이 반절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물론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즐기게 되는 법이니까 애초에 애니에 대한 선호도가 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으나, 애니를 열심히 보던 시절을 생각하면 확실히 작품에 같이 열광할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한 공간에서 놀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취향조차 이제 갈래갈래 찢어졌다. SNS에서 뭘 재미있다고 떠들어봐야 반향 없는 혼잣말에 불과하고, 남들에게 직접 추천을 해봐도 그 사람이 이미 갖고 있을 수백 항목의 우선순위 리스트에서 내 추천작을 위에 올리기란 지난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가 항상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이나 실상 서로의 신기루만이 보이는 광막한 사막에 홀로 서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편, 애니를 열심히 챙겨보던 사람들이 하나씩 취향이 바뀌어 떠나게 된 데에는 분명 나이 탓도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나이를 먹으면서 챙겨본 작품이 쌓이다 보니 어지간한 자극엔 마음이 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어지간한 자극엔 동하지 않게 된 우리의 미래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예전에 본 거랑 다를 바가 없고 식상한데, 심지어 작품에서 주로 활동하기 마련인 주인공과 연령차가 심해지니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고민, 목표에 이입하기도 힘들어졌다. 막말로 고등학생이 모험을 떠나든 요괴를 잡으러 다니든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니 결국은 OTT 서비스의 최신작이나 유튜브 인기 채널들을 옛날 공중파 정규 방송 챙겨 보듯 따라잡으며 주변 사람들과 한두마디라도 해보는 게 나은 선택이 된 게 아닌가 싶다.


요컨대 애니의 타겟층에서 멀어지며 감상을 공유하기도 힘들고, 혼자서 느긋하게 즐길 만한 여유조차 없으니 그나마 부담이 없거나 소속감을 느낄 만한 유튜브, 드라마, 영화 쪽으로 미디어 소비가 옮겨간다는 뜻인데, 한때 열심히 좋아했던 것으로부터 떠나는 일은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대상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슬프고 마음을 적적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시간이 가도 나는 앞으로도 혼자서라도 괜찮다고 되뇌며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과 공허함을 안고 열심히 좋아해야 할 것인가?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강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듯이 떠나는 마음이 잠시 머물 곳을 다시 발견하게 되리라 믿고 슬픔 너머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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