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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n 04. 2021

재미없는 게임에 1년 넘게 시달리다


어떤 게임을 작년에 사서 여지껏 깨지 못하고 있다. 작년 중에 못 깬 게 아니라 구입한지 365일을 넘겼다. 30시간 가량 했으니까 계산상  대략 하루에 5분쯤 한 것인데, 실제로는 4일에 20분쯤 했다고 보는 게 맞겠다.


대체 무슨 게임을 이렇게 조금씩 하느냐? 

일단 ‘무슨 게임’인지는 밝히지 않으려 한다. 팬층이 두터운 게임이고, 나는 해당 게임이 속한 시리즈의 다른 편을 재미있게 했다. 그러니까 시리즈 자체에는 원한이 없다.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다면 왜 이렇게 조금씩 했는가? 시간이 넘쳐났다면 안 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원인을 무조건 시간 부족으로 몰고갈 수도 없는 것이, 습관적으로 유튜브나  SNS 뒤적인 시간을 줄이고 더 적극적으로 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일상 속 시간 관리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요컨대 우선 순위의 문제다. 어떤 일이든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뒤적이는 것보다 우선할 정도로 훌륭하지 못하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게을러 보이는 건 다 유튜브 때문이야!'라고 주장할 수도 없긴 하지만, 나를 포함한 무수한 현대인에게서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지점까지 투입할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이건 사회가 혼란스럽고 각박해져서 그럴 수도 있고, 유튜브처럼  0에 가까운 노력으로 무한한 즐거움을 주는 매체가 늘어나서 그럴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전자의 원인은 저성장 사회와 코로나19 따위일 테고, 후자의 원인은 스마트폰 탓이 크다.


여기서 이게 다 스마트폰 때문이라는 식의 한탄은 반쯤 농담인데, 반쯤은 진담이다. 로마 시대에 말의 크기를 기반으로 정한 마차의 크기 때문에 도로의 너비가 정해졌고, 그 때문에 최종적으로는 운반 문제가 얽혀 로켓의 규격까지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를 아시는지? 스마트폰 때문에 스낵컬처가 대세가 되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다. 글자 수로도 용량으로도 제한이 있는 초기 스마트폰에 맞춰 콘텐츠가 변형된 탓에 사람들도 호흡이 짧은 작품에 사로잡혔다는 소리다. 스낵컬처를 악하거나 질이 낮은 문화라고 규정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스마트폰의 규격이 콘텐츠의 호흡의 길이를 바꿔버리는데에 이래저래 영향을 줬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각설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나도 마음 잡고 뭘 길게 즐기질 못하고 있고, 지금 하는 게임처럼 중요 사건 전의 서두나 애니메이션이 길어서 한참 넋놓고 봐야 하거나 지도를 뒤지고 길을 헤매야 하는 게임은 도통 견디질 못하게 되었다. 창작자 입장에선 '요즘 사람들은 책을 진득하게 읽을 줄을 모른다니까' 하고 개탄하면서도 밤에 게임을 켜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왔더니 날 얼마나 지루하게 할 셈이냐!'하고 건방진 귀족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남을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읽을 책이 200권은 쌓여 있는 와중에 기분전환으로 피 맛이나 좀 보려고 했더니 '마을 곳곳에 숨은 고양이를 찾아주세요!' 따위 의뢰가 들어오면 화가 치밀지 않을 수가 없지 않나.......


그리하여 큰 맘 먹고 켜봐야 신날 확률이 점점 낮아진 이 게임은 슬슬 '굳이 해야 하나' 하는 과제나 업보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고, 진도를 지지부진하게 나가는 사이에 무료 배포까지 되고 말았다. 사지 않은 사람한테는 환상적인 일이겠지만, 나로서는 주가 대폭락 같은 소식이었다.


결국, '이렇게 된 거 끝은 보고 처분하든말든 해야지'라는 심정만이 이 게임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는데, 가끔 게임이 너무 재미없는 구간에 들어가면 '내가 돈도 잃은 것도 모자라서 시간까지 잃어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가격만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애저녁에 팔아치우지 않았을까? 그러나 값은 떨어졌고, 버릴 수는 없고, 이제 엔딩은 보일 것도 같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계륵이 된 셈인데, 엊그제 '오늘은 기필코 치워버린다'라는 생각으로 한 시간 반을 투자했는데도 끝나지 않았다. 게임 자체가 긴 것도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라는 걸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영화를 한 편 잘못 골라서 보거나 음식점을 잘못 들어가면 욕 좀 하고 바로 털어버릴 수 있지만, 일 년쯤 이렇게 계륵에 시달리니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에 잉크를 쏟아버린 기분이다. 손해 절감 차원에서 적당히 집어치웠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손절도 그 손해를 감당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다. 7만 원쯤 주고 산 게임을 2만원 쯤 받고 처분하는 건 어지간한 대장부가 아닌 다음에야 못할 짓이리라. 괜히 주식에서 개미가 고통받는 게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은 확실히 늦은 거니까, 이 게임을 끝까지 해치우는 감동이 1년이라는 나의 고통에 보상이 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써놓고 보니 게임을 하려는 게 아니라 무슨 복수를 다짐하는 것 같은데, 슬슬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맞지 않는 체질이 된 건 아닐까 싶어 무섭다. 그러면 그런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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