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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16. 2021

인형에게 나를 부탁하며


아주 가끔 숲을 걷거나 탁 트인 하늘을 보고 싶어지면 근처의 동산에 올라간다. 아파트 단지 안을 뛰는 것보다 운동이 더 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산에 오르는 행위가 주는 상쾌함과 보람, 달성감이 적지 않아서 썩 즐겁다.


동산의 정상에는 한강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가 있고, 정자에서 약간 내려오면 거대한 인조 잔디 운동장과 우레탄 트렉과 운동 기계 따위가 즐비한데 며칠 전에는 코로나 확산 상황이 좋지 않아서 정자를 비롯한 시설 몇 개가 폐쇄되었다. 그리하여 평소라면 분산되었을 사람들이 모조리 운동장에 모였고, 과장을 섞자면 공기 반 사람 반인 지경이 되고 말았다. 길이 100미터의 운동장 안에서 대여섯 팀이 공놀이를 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는 수십 명이 열심히 걷거나 뛰는 상황. 다행히도 불만스러워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과연 야외가 안전하긴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운동하러 나선 사람답게 나도 열심히 운동장 둘레를 걷기 시작했는데, 그때 이상할 정도로 선명히 눈에 들어오는 광경이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러 온 사람들 중에서 원반 던지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사람이 던진 원반을 물고 뛰는 개였다.


견종은 잘 모르겠으나, 대충 포메라니안처럼 작고 털이 북실북실해서 솜뭉치처럼 귀여운 녀석이었다. 바람이 불면 통통 튀어갈 것처럼 가볍고 발랄해보이는 강아지. 그 강아지는 원반을 물고 주인을 향해 아주 열심히 뛰어가고 있었는데, 표정에는 그 어떤 근심이나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도 없어서, 오로지 행복만을 빚어 만든 것처럼 보였다. 빛으로 이루어진 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 개가 하염없이 부러웠다. ‘넌 근심 걱정이 없어서 좋겠구나’ 하는 생각보다 더 원초적으로, 그 완전무결한 기쁨으로 충만한 강아지가 부러웠고, 아름다워보였고, 눈물까지 날 뻔했다. 이 눈물도 ‘개만도 못한 내 신세…’ 같은 생각을 거친 게 아니라, 저절로 스미는 감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라고 ‘전원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을 가리키는 프랑스어가 있다던데, 이 순간의 감정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아무튼 원반을 물고 잔디밭을 달리던 강아지의 모습은 뇌리 깊은 곳에 새겨져서 지금도 생생하다. 고양이를 선호하는 나에게도 그 광경은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처럼 기억된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많은 개들이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지난 주말, 친구 집에서 보드게임 모임을 하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인형을 품에 안고 놀게 되었다. 어쩐지 날씨도 좀 묘하게 으쓸한 것 같고 마음도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전하기에 구석에 놓인 인형을 하나 달라고 해서 품에 안게 된 것인데, 보편적인 동물 형체를 가진 인형을 그렇게 오래 안고 지낸 것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리고 인형을 안고 있는 행위가 그렇게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인형이 근본적인 해결이나 치유를 제시하진 않지만(제시해주면 그건 공포영화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형체를 안고 쓰다듬자면 인형이 네덜란드의 댐 지키는 소년처럼 마음의 구멍을 그럭저럭 막아주는 정도는 해주는 듯 느껴졌던 것이다.


그나저나 인형이 마음에 좋다는 것을 지금까지 왜 전혀 몰랐고, 상상조차 못했을까? 그건 집안의 공교로운 내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자 셋 여자 한 명인 가정인데다 쓸데없는 물건 사는 것을 천하의 대역죄처럼 여기는 가풍 때문에 안기 좋은 크기의 인형이라고 할 만한 물건이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었던 탓이다. 심지어 인형뽑기도 하지 않았고 선물조차 들어오지 않았으니, ‘인-형’이란 마치 이종족의 습속처럼 취급될 수밖에 없었다. 같은 국가라도 어떤 집에선 너무나 당연한 문화가 다른 집에선 언어도단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의 인형과 이별하고 돌아온 나는 나에게 적당한 크기의 시바견 인형을 선물했다. 농담처럼 그 인형을 달라고도 해봤지만 받지는 못했다. 인형이란 가까이 두고 품에 안고 아낄 수 있는 물건이라 쉽게 주고받을 물건이 아닌 탓이었다. 그동안 살다 보면 누군가에게서 인형을 받을 날도 있을 수 있겠지, 라고 막연한 기대를 품기도 했는데, 결국 그 상대란 다름아닌 자신이 되고 말았다. 아무렴 어떠랴. 나를 내가 챙기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렇게 들인 인형은 제 역할을 잘 해주고 있다. 침대에 그냥 던져놓기도 귀엽고, 안고 있자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예전에 주워들은 과학 실험 중에 ‘아기 침팬지들을 놀라게 하면 젖이 나오는 철골 어미 인형과 젖이 안 나오는 헝겊 어미 인형 중 어느쪽으로 갈 것인가’가 있었는데, 결과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헝겊 인형 쪽으로 간다였다. 요컨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솜을 채우고 모양을 낸 천쪼가리에 불과한 물체라도 모종의 치유를 안겨주게 되어 있고, 그런 허구적 치유를 느끼는 것은 본능적인 차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는 개도 고양이도 없어도 괜찮다. 소설 속의 어떤 체험을 읽으면서 활성화되는 뇌 부위와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면서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같다는 연구 결과처럼, 내가 초원을 달리는 개를 보고 느낀 감동과 인형을 안고 느끼는 감동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포함해서 살아움직이는 동물을 감당하기 벅찬 지경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역사와 전통이 있는 허구적 기쁨으로 뇌를 재주 좋게 자극하며 감정을 꾸려가는 것을 또 하나의 재미로 누려볼 만하지 않을까. 아마 기술이 발달하면 사람마다 스마트 인형이나 반려 로봇을 안고 사는 것도 당연한 풍경으로 받아들여지겠지. 이미 갖고 있던 인형을 스마트화하는 방법도 보급될 것이다. 그때까지 나의 인형에게 나의 정서를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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