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Dec 08. 2021

드라마는 보고 싶지만 욕은 듣기 싫습니다

세상에 OTT야 많고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자주 이용하는 것은 넷플릭스와 왓챠다. 왓챠는 스트리밍 서비스는커녕 큐레이션 서비스의 앱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부터 이용하고 운좋게 스트리밍 서비스 런칭 파티까지 가봤기에 고향 친구 같은 애착이 있는데, 콘텐츠도 ‘그 작품 다시 보고 싶은데’ 싶을 때 있을 확률이 높아서 그럭저럭 만족하는 편이다. ‘옛날부터 우리동네에서 시네필이 운영하는 비디오 대여점’ 같은 느낌이랄까.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적당한 비유인 것 같다.


한편 넷플릭스는 너도나도 이야기하는 장안의 화제작을 내놓을 때가 많아서, 문화 콘텐츠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안 보면 뒤쳐지는 느낌이 들기에 계속 이용하게 된다. 꼭 창작 문제가 아니더라도 종종 친구들을 만나서 잡담하고 놀 때 가장 무난한 화제를 제공하기도 한다. 볼거리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요즘 시대에 공중파 같은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넷플릭스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뒤져봐도 볼 만한 것만 많고 볼 건 없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내가 특히 마음에 드는 것은 콘텐츠 자체보다 다국어 더빙이 많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는 뭔가를 재생했다 하면 그게 한국 드라마라 할지라도 일단 일본어로 더빙되어 있는가부터 확인하곤 하는데, 여기엔 일본어 번역에 참고하고자 한다는 직업적 이유 말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한국어 욕설을 듣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한국인이면서 왜 한국어 욕설을 듣지 않겠다는 것인가? 그거야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배우가 아주 실감나는 욕을 ‘찰지게’ 할 때마다 기분이 개운치 않다. 십수년 전에 스노우캣 작가가 여배우는 잘 울 수록, 남배우는 욕을 걸게 할수록 연기를 잘한다는 평을 듣는 것 같다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는데, 그 인식이 여지껏 변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잔혹하고 처절한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할수록 대단한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 흐름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요즘은 청불 등급의 작품을 보면 어김없이 쌍욕이 펑펑 터져나오는데, 그러한 ‘날것’의 감성이 ‘현실적’이라 좋다는 사람이 많으니까 인기도 있고 계속 나오기도 하는 것이겠으나, 그게 꼭 좋은 작품을 만드는 방법인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암흑가는 이렇게 무섭겠지’하는 환상을 다루면서 세세한 부분만 현실 속에서도 마주칠 수 있는 폭력을 끌고 와야만 하는가? 달 뒷면에서 우주선을 타고 쳐들어오는 히틀러와 싸우는 영화에서 탄창에 들어가는 총알 수를 딱딱 맞춘다면 나름의 맛이야 나겠지만, 그게 빠진다고 작품의 질을 낮추지는 않을 것 같다는 얘기다.


물론 고착화된 경향을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법이고, 성인물에서 욕 좀 하는 게 그렇게 문제냐, 폭력배가 바르고 고운 말만 쓸 순 없지 않느냐고 따진다면 나도 결사적으로 반론을 펼치진 못하겠다. TV에서 방영하던 더빙판 외화에선 ‘제기랄’, ‘젠장’, ‘엿이나 먹어’, ‘지옥에나 떨어져’처럼 현실에서 사용되지 않는 필터링된 욕을 쓰긴 했는데, 그런 필터링이 강제화되면 그것도 또 이상할 것 같다.


요컨대 욕을 하긴 하되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은 수준 직전에서 멈춰줬으면 하는 바람인데, 그런 까다로운 바람을 정확히 충족해 주는 것이 바로 일본어 더빙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일본어는 욕설 어휘가 크게 발달하지 않은 편이고, 애초에 번역할 때 수위를 낮춰 순화하는 방향을 선호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 “아가리 X물어, 이 X발아!”라고 살벌한 욕을 해도 일본어로는 “입 다물어, 이 쓰레기 자식!” 정도로 바뀌는 식이다. 게다가 아무리 전공을 했어도 일본어는 내게 외국어인지라 감정적으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감상하게 되는데, 덕분에 근래에 대유행했던 오징어 게임도 감정적 피로감을 크게 줄이고 볼 수 있었다.


(욕설까지 실감나게 생생히 그리는 것만이 발전의 방향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잔혹한 성인용 작품을 그렇게 볼 거면 뭐하러 보냐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같은 작품을 봐도 이런 식으로 옵션을 조정해서 볼 수 있으면 소비층도 늘어나고 좋을 것 같다. 욕을 뺀다든가, 신체 절단 장면을 뺀다든가 하는 식으로. 제작자의 의도도 중요하긴 하지만, 다변화되는 사회에서 작품을 100% 주어진대로 소비하는 것도 시대와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내가 성인밖에 볼 수 없는 잔혹한 이야기는 그러려니 하거나 재미있어 하면서도 쌍욕은 거북해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역시 욕설이 내 생활과 가장 가까운 폭력이기 때문일 것이다. 욕설과 언어 폭력은 조금만 재수가 없어도 내일 당장 당할 수 있고, 어쩌면 내가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나만은 깨끗하고 무관하다고 편히 구경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욕설이라 불편한 게 아닐까. 아무튼 영혼을 멍들게 하는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쉴 때는 사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도 열심히 보지 않는 사진을 위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