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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30. 2022

꽃 피는 봄이 싫어지는 마음과 타협하며


봄이 와서 날씨도 풀리고 꽃도 피기 시작하면 대체로 반가워하고 구경 다닐 생각을 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인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요근래 10년 정도는 봄이 오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마음 깊이 기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어제는 가까운 친구들을 만나서 봄이 오는 것도 꽃이 피는 것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싫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더니 안 그럴 사람이 왜 그렇게 흉한 말을 하느냐는 식의 걱정 가득한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새삼스럽게 못난 사람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만 자신을 위해 변명을 좀 하자면, 나는 봄과 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봄이 옴으로써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 봄을 맞이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마음가짐, 꽃을 즐기기에 합당하지 않은 정서 상태가 싫은 것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이 싫은 것이 아니라, 타인과 견줄 만한 행복의 조각을 이제는 갖고 있지 않고, 앞으로도 가질 수 없을 거라는 (검증되지 않은)전망이 싫은 것이다.


이런 식의 암담함에 젖어있자면 ‘거 날도 좋은데 좀 나가서 걸으면서 바람도 쐬고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지 갑갑스럽게 살면 쓰나’ 라는 식의 조언을 듣기도 하고 스스로 떠올리기도 한다. 사실 과학적으로 틀린 말도 아니라 그대로 실행하기도 하는데, 그런다고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좀 익숙해질 뿐이다. ‘고통을 이기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익숙해지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라고 거창하게 말한다면 과연 맞는 말이라고 끄덕이는 수밖에 없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아예 카메라를 들고 나가서 사진을 찍고 다니기도 했고, 굳이 혼자 경마공원까지 가서 벚꽃 엔딩을 들으며 꽃길을 오가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작업하며 오랜 시간을 보내던 시절에는 점심을 먹고 괜히 길을 쏘다니기도 했다. 꽃이야 뭐 딱히 무슨 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름다울 뿐이니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진 찍고 구경하고 다니는 게 봄을 즐기는 합당한 방법으로 느껴졌고, 실제로 나도 즐거웠다. 그때라고 지금과 달리 같이 다니며 꽃을 보고 사랑을 노래할 사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단순히 몸과 마음이 약간 더 건강했을 뿐인데도 그런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영영 꽃이 피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 짱구 엄마와 서울 부산 지하철 안내 방송으로 익숙한 강희선 성우의 인터뷰를 봤다. 강희선 성우 이전에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여러 성우로 바꿔가면서 녹음했는데, 방송에 대한 항의가 끊이지 않아서 강희선 성우에게는 최대한 중립적이고 무미건조한 어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아무리 친절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안내해봤자 마음이 심하게 상하거나 심사가 뒤틀린 사람에게는 거슬리기 마련이라, 아예 감정의 동요가 일어날 수 없게 해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구대로 건조하게 녹음한 이후로는 항의가 들어오지 않았다는데, 이 일화를 듣고 나니 나는 자신이 지하철 안내 방송이 친절하다는 이유로 항의 전화를 하는 사람에 가까워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싫은 것은 자신의 마음인데 애꿎은 봄에 화풀이를 할 게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좋아하면 다시 봄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여기저기서 희망을 주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자기 자신부터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이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잘 살펴보면 아무래도 자신을 좋아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누구보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이런 자를 좋아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심각하다.


그러니 결국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말고 받아들이는 것’ 정도로 타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매일같이 넌더리를 내고 발악하며 살지 않듯이, 피폐하고 처참한 심정이 든다고 해서 자기 심정을 혐오하거나 경멸하고 살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 얼굴도 내 마음도 평생 같이 살 수밖에 없으니 적당히 정붙이고 살아야 한다. 얼굴에는 스킨과 로션을, 마음에는 적당한 운동과 알약을 챙겨주면 더 좋고.


아무튼 봄이 오고 꽃이 피기 시작한 풍경이 두렵다는 느낌마저 들고 있었는데, 타협안을 생각해 보니 이것도 ‘초라한 나의 삶을 비웃는 운명의 상징……’ 뭐 요 따위로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가장 낫겠구나 싶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그대로 좋다고 생각해야지, 내 마음이 행복해질 때까지 눈을 가리고 봄을 피해봤자 얻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주에는 꽃피는 궁궐에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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