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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23. 2016

지하철과 어색함과 스마트폰


얼마 전에 지하철에 탔다가 상당히 놀라운 광경을 봤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지하철에 탔는데, 두 아이를 자리에 앉힌 후 자신은 서서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아이는 얌전히 앉아 있었던 반면, 남자아이는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하며 주변을 돌아다니고 창밖을 보고 노선도를 구경하고 지루함을 어쩌질 못하며 그 여성을 ‘엄마’라고 불렀다. 굉장히 젊어 보였는데 엄마가 맞긴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아이는 엄마에게 얼마나 가야 하느냐고 물었고, 엄마는 40분이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그럼 그동안 뭐해? 하고 물었다. 그러자 엄마는 ‘자’라고 대답했다.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대답이었는데, 아이는 지하철에선 못 잔다고 했고, 엄마는 그냥 자라고만 했다.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보면서. 결국 여자아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기 시작했고, 남자아이는 자기 손가락을 구경하다가 다시 돌아앉고 일어나고 다시 앉기를 반복했다. 기다린다고 딱히 상황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그 아이 엄마를 매정한 엄마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엄마라고 무조건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고 계속 같이 놀아줄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당장 처리해야 하는 심각한 업무가 있어서 핸드폰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일 수도 있고, 애들이 지하철에 타기 전에 마트에서 매대를 뒤집어엎는다든가 십만 원은 하는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면서 바닥을 뒹군다든가 하는 통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지쳐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뒷사정을 모르는 나로서는 좀 치사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나잇대의 애들을, 심심함의 극한이나 다름없는 공간인 지하철에 태워놓고 자기 혼자 뭔가에 열중한다는 것은 육아 이전에 일행에 대한 배려가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굳이 애들이 아니더라도 할 것도 볼 것도 아무것도 없는 일행과 함께 지하철에 타 놓고 혼자만 쏙 빠져나간다는 건 너무한 처사다. 특히나 자기를 뺀 일행들이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황에선.


버스와 달리 지하철이란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으면 도무지 볼 게 없는 공간이다


애들을 돌볼 일은 없지만 가끔 그런 상황에 처하곤 한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 달리 할 건 없고, 그렇다고 핸드폰을 보면 무례하지 않은가 싶은 그런 상황 말이다. 가령 어떤 집단에 처음 들어갔을 때나 내가 속한 집단에 새로운 사람들이 왔을 때, 혹은 우연히 지인의 지인과 동석하게 되었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그럴 때면 정말 곤란하기 짝이 없다.  ‘ABC’나 ‘제로’ 혹은 ‘끝말잇기’ 따위를 하면서 시간을 죽이자고 제안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뭐든 말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 말이라는 것도 날씨처럼 뻔한 화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고, 그렇다고 자신의 신상이나 상대의 신상을 화제로 다루다 보면 무례할 수도 있을뿐더러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한 번 그런 적이 있었다. 친구A(여성)와 지하철에 탔다가 그 친구의 친구B(여성)를 만나서 셋이 그럭저럭 얘기를 하기 시작했는데, A가 먼저 내리는 통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A가 없으니 당신과 얘기할 일도 없다는 듯이 입을 딱 다물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대학 생활이 적응하기 어렵다느니, 그래도 재미는 있다느니, 과도 같으니 서로 연락처나 알아두자느니 하는 얘기를 늘어놓았고 그럭저럭 그 어색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뒤였다. 연락처를 교환한 게 화근이었다. 의욕 넘치는 새내기였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단 연락처는 교환하자는 신조로 행동했을 뿐인데, B는 그걸 적극적인 구애의 제스처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런 오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해서 오해는 별 해프닝 없이 끝나버리긴 했지만, 나중에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좀더 영악하게 행동했으면 내 인생도 어느 정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럴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러 사람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서 그걸 화젯거리로 삼아야 하는데,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요즘은 스마트폰에 관련된 얘기를 하면 대체로 어렵지 않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스마트폰 앱, 게임들은 누구나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써볼 수 있어서 다른 얘기에 비해 관심도가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무슨 앱을 쓰는 걸 보여준다고 상대가 ‘이 사람 지금 대쉬하는 건가?’라고 오해할 일도, ‘이상한 걸 자랑하네, 별꼴이야 정말!’ 하고 기분 상할 일도 없다. 관심이 없더라도 그냥저냥 신기하다고 넘어가는 정도다. 그리고 그렇게 스마트폰을 화제로 삼고 나면 각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별로 매너없는 일로 느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제 안심이다. 스마트폰이란 정말 대단한 물건이라고 몇 번이고 말했지만 역시 한 번 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남과 얘기하거나 뭘 하는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장시간 들여다보는 게 무례하다는 얘기가 아주 많고 나도 그건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실외에서는 모자를 쓰고 실내에서는 벗는 게 당연한 예의였는데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몇 년 뒤에는 아이들과


‘옛날에는 남과 얘기하다 말고 스마트폰을 보는 게 무례한 일이라고 여겨졌단다.’

‘우와, 조선 시대도 아니고 미친 거 아니에요?'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슷하게 아이들과 뭔가 다른 걸 하고 놀지 않고 스마트폰을 던져주거나 애니메이션을 틀어주는 것도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고 있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나는 지하철처럼 딱히 놀만한 건덕지가 없는 상황이라면 그게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부모가 되었다고 갑자기 언제 어디서 뭘 할지 알 수 없는 지성체의 관심을 사로잡으면서 교육적이기까지 한 놀이나 말을 쉴 새 없이 생각해낼 수 있는 능력과 에너지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에 열 살쯤 어린 애들과 공놀이를 한 적이  몇 번 있는데, 그때 나는 한두 번이면 모를까 이런 짓을 매일 하다 보면 정체모를 광기에 사로잡히겠군, 하고 생각했다. 뽀로로가 괜히 뽀통령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어쨌든, 몇 분간 자기에게 주어진 광대한 시간을 어쩔 줄 모르는 꼬마를 보면서 나는 나라도 태블릿을 꺼내서 뭔가 재미나고 신기한 게임을 구경하게 해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했지만, 금방 내가 내릴 역에 도착해서 그대로 책을 읽다 내렸다. 그래서 그 뒤로 심심한 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성화에 지쳤거나 자기 일이 끝난 엄마가 뭔가를 보여주거나 같이 놀아줬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그대로 밤의 여왕처럼 잠이나 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딱히 내가 진지하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2015.04.22.)



-후기

예전에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책은 안 읽고 핸드폰만 만진다는 비난을 자주 접할 수 있었는데, 스마트폰의 시대가 된 이후로는 그런 얘기도 좀 줄어든 것 같습니다. 비난하고 싶지 않게 된 게 아니라,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어진 게 아닌가 싶군요. 어쨌든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스마트폰을 쓰면서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많은 양의 텍스트를 읽고 있다고 합니다. 출판계에 한 발을 걸친 저로서는 나름대로 고무적인 일이군요. 그러나 그런 저조차도 요즘은 이동시간이 20분 미만이라면 지하철에서 게임을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뭘 하면 어때요. 남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됐지.


그나저나 너무나 싫어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것조차 불쾌한 사람과 지하철에서 동석할 수밖에 없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절 구원해줬던 것은 아이패드와 앵그리버드였습니다. 제작사는 그만한 돈을 벌 자격이 있어요.


(2016.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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