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May 11. 2016

시계 약과 기술과 서비스와 가격의 댄스


손목시계의 생명은 첫째가 정확성이고 둘째가 심미성이라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정확한 시계이기도 한 핸드폰을 누구나 가지고 다니면서부터 정확성의 중요도가 좀 낮아지고 심미성의 중요도가 부각된 것 같긴 하지만, 투박하고 시간이 잘 맞는 손목시계는 찰 수 있어도 예쁘고 시간이 제멋대로인 손목시계는 찰 수 없다. 제아무리 혼을 빼놓을 정도로 예뻐도 시간이 맞지 않으면 그건 그냥 예쁜 쓰레기일 따름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무리 로또에 당첨된다 하더라도 나는 쿼츠 시계를 고집할 것 같은데, 쿼츠 시계는 당연히 동력원이 되는 전지를 가끔 갈아줘야 한다. 지금 애용하는 시계는 계기가 많아서 그런지 일 년에서 일 년 반 정도 가는 것 같다. 얼마 전에도 때가 되었는지 시계가 멈춰 버렸다.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


사실 손목시계가 멈추는 게 컴퓨터가 멈춰 버리는 것처럼 대사건은 아니다. 그대로 차고 나가 시계방에 가서 약을 바꿔달라고 하면 고작 1분 남짓한 시간 내에 원상복구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골치아프다고 생각한 이유는, 시계 뒷판을 열고 약을 교체할 뿐인 그 서비스에 무려 8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시계 뒷판을 열 공구를 사기로 작정했는데, 문제는 그때 시계 약까지 한꺼번에 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타입이 들어가는지 알려면 뒷판을 따야 하는데, 뒷판을 따려면 공구를 사야한다. 그래서 시계 판매점에 전화 문의를 하기도 했는데, 사장은 열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했다. 다른 가전제품은 어떤 전지가 들어가는지 설명서 따위를 뒤져보면 아주 간단히 알 수 있는 반면 손목시계는 그게 영 쉽지 않다. 애초에 복잡한 기능이 들어간 시계가 아니면 설명서 따위 있지도 않으니까. "약은 약사에게, 시계 약은 시계사에게.” 그게 바로 거대한 시계 산업을 지탱하는 율법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은 공구를 먼저 주문해서 시계 뒷판을 열어봤다. 다른 시계에 비해 뒷판의 홈이 얕아서 내가 사실은 이걸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지만, 결국은 열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손톱보다도 더 작은 전지의 모델명을 알아냈고, 그 모델과 호환되는 전지를 오픈마켓에서 찾아냈다. 그리고 두 가지 이유로 깜짝 놀랐다. 


첫 번째 놀라운 점은, 시계 전지라는 게 할인가로 찾으면 하나에 기껏해야 900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계방에서는 시계 뒷판을 여는 간단한 기술과 공구, 전지, 그리고 관련 지식이 있다는 이유로 900원짜리 전지를 8000원에 갈아주고 있었다.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원래 끼워져 있던 전지는 오래 가지 못하는 알칼라인 전지로, 고작 600원짜리였다는 것이다. 나는 자주 가던 시계방에서 재작년에 오래 가는 것과 싼 것 중 무얼로 하겠느냐는 말에 가격을 물으니 각각 8000원, 6000원 정도를 불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작년에는 그걸 묻지 않기에 당연히 오래 가는 것만 취급하게 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600원짜리를 8000원에 갈아준 것이다. 교체에 드는 노력은 완벽히 똑같은데 원가 300원 차이를 2000원 차이로 불린 것도 어처구니 없지만 말도 없이 저가형 전지를 비싼 값으로 끼워 준 것도 분통터지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 간다는 전지를 열 개 주문했다. 너댓 개만 사도 충분하지만 배송료가 아까워 그래야 했다. 


그래서 다음날 도착한 전지를 넣은 시계는 이상 없이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 보고 있자면 왜 시계약을 직접 갈 생각을 이제서야 한 것인지 한스러울 지경이다. 


시계는 현대까지 남은 고전적 기술 공예의 정점 중 하나지만... 쿼츠 시계는 역시 가전제품일 뿐이다.


나도 어떤 서비스를 받으면서 "원가는 고작 얼마인데 얼마에 팔아먹다니!" 하는 태도는 별로 논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서비스 비용에는 인건비가 포함되어야 하고, 거기에 그 사람이 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존중도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치과에서 ‘고작 몇 분만에 이 하나 뽑고 이렇게 돈을 많이 받다니’ 하고 불평하는 고객에게 의사가 ‘원하시면 얼마든지 천천히 뽑아드릴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얘기도, 순식간에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가 이 작품을 만드는 데는 수십 년이 걸렸다고 대답했다는 얘기도 그런 ‘사람의 노력에 대한 존중’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시계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에는 고작 일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아주 간단히 전지를 교체했을 뿐으로 보이지만, 실제 시계사가 어떤 시계든 순식간에 열어 알맞는 전지를 끼워넣고 그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 상황에 대처하는 기술을 얻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노력에 대해 비용을 지불해온 것이다.


…라고 생각하려고 애써 노력해봤지만, 600원짜리를 말도 없이 비싼 값에 넣어 줬다는 걸 생각하면 역시 분통이 터진다. 물론 바로 위에 적은 것처럼 정말 존경할 만한 시계사도 있다. 겨울에 시계가 고장나서 모처의 수리 전문 시계사를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는 내가 특수 공구 없이는 절대 열지 못했던 뒷판을 롱노우즈 플라이어(펜치) 하나로 페트병 뚜껑 따듯 간단히 열고, 확대경으로 들여다본 것만으로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고, 수리에는 얼마가 들 거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심지어 뒷판에 난 흠집을 보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이런 전문가에게는 정말 감복해서 부르는 대로 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600원짜리 전지를 900원짜리인 것처럼 8000원에 갈아준 시계사는 아무리 노력해도 존경할 수가 없다. 적어도 내 시계 약을 바꾸는 방법에 있어서는 나도 공구를 사는 것만으로 그와 비근한 수준의 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 시계방은 영원히 가지 않겠지. 아니, 1년 이상 가는 전지를 10개나 사버렸으니 시계가 고장나지 않는 한 나는 시계방에 가지 않고 이 시계를 10년 이상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1년에 7000원쯤 버는 셈이니, 이 돈을 차곡차곡 모으면 조만간 애플워치를 살 수 있겠지.


(2015.07.01)



-후기


이 글을 쓴 뒤로 시계약을 한 번 더 갈았으니까, 이미 공구와 전지들을 사는 데 들인 비용은 회수한 셈입니다. 허허, 이것 참. 

그나저나 어릴 때부터 시계를 차서 손목시계는 외출의 기본 아이템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핸드폰의 보급 이후로는 꼭 그렇지도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정말 완벽히 정확한 회중시계를 다 하나씩 들고 다니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결국은 액세서리로서의 기능이 더 부각된 셈인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시계들을 구경하고 다녀도 쿼츠든 기계식이든 스마트워치든 제 마음에 쏙 드는 모양의 시계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스마트워치 화면을 포함해도요. 그래서 8년인지 9년인지 전에 산 시계를 계속 차고 있습니다. 이러다 평생 차겠어요. 일반 손목시계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스마트기기가 하루빨리 보급되길 바랍니다. 


(2016.05.11.)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과 어색함과 스마트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