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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20. 2016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식 판타지

성적 판타지라는 말이 있다. 성생활에 대한 (대체로 이룰 수 없는) 환상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하이힐을 신은 발로... 아니,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었지.


아무튼 성적 판타지를 두어 가지 품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요즘은 그따위 무의미한 것보다는 '휴식 판타지'가 부풀며 손으로 잡을 수 있을 것처럼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다. 마치 자살 기도자가 절박한 상황에 빠질 때마다 자살 플랜을 구체적으로 세워보는 것처럼 '난 언젠가 이렇게 신나게 쉬어 버릴 거야' 라는 계획을 짜 보는 것이다. 아마 삶을 영위하는 장기적 활동 자체에 질려버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계획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을 것이다. 


예전에 본 어느 기사에서, 자녀의 나이가 어린 엄마들의 판타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에어콘 시스템이 잘 된 깨끗한 호텔방에서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이 1위를 했다는 소식을 보았다. 나는 소소한 감탄을 했다. 나 역시 거의 같은 판타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모히또에 가서 신나게 수영하고 몰디브를 마시며 몸을 멋지게 그을려야지' 처럼 사치스러운 판타지가 아니다. '내일 아침은 일어나자마자 삼겹살에 소주를 먹어야지'보다 약간 더 실현 가능성이 낮은 판타지다. 


아무튼 이 판타지는 수십 수백 번의 공상을 거친 끝에 상당히 구체화되고 있다. 일단 호텔 예약 앱을 깔고, 저렴한 방을 예약한다. 요즘은 이벤트가 많아서 그렇게 대단한 비용이 들지도 않는다. 모텔 산업이 대단히 발달한 덕에 모텔을 잡아도 방이 어지간한 비즈니스 호텔 못지 않을 지경이다. 화장실에서 고상한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모텔도 있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다. 월풀이 있으면 더 좋고.


어쨌든 어디든 체크인하고 나면 할 일은 정해져있다. 기분좋게 목욕을 한 다음 광란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혼자 가는 게 기본 전제니까 로맨틱이고 나발이고 없다. 거기 있는 것은 나를 아무렇게나 내다버린 듯한 휴식 뿐이다. 


휴식으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물론 영화와 독서다. 능동적으로 할 게 거의 없으면서 나를 즐겁게 하는 최고의 콘텐츠 유희다. 그리고 거기에 앞이 안 보일 정도의 흡연과 코가 비뚤어지게 취하고도 남아 돌 정도의 맥주, 칵테일, 위스키를 곁들여야 한다. 딱히 먹고 싶은 건 떠오르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는 성욕은 물론이고 식욕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눅눅한 콘프레이크만 먹게 된다 해도 만족이다. 


그리고 그렇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다, 정말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면 그대로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또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러다 이렇게 중얼거려야 한다.  "아, 심심하다, 더럽게 할 거 없네."


지겨울 정도의 휴식이 앞으로 몇 번이나 남았을까?



생각해보면 참 별 것도 아닌데 왜 어려울까? 호텔 할인 앱을 깔고, 방을 예약하고, 가서 단순히 늘어지기만 하면 그만인 일이고, 여기에는 막대한 돈도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은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환상의 영역으로 느껴진다. 최근에야 깨달은 거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휴식에 필요한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휴식에 필요한 에너지'라고 하면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뜻밖에도 이것은 정말이다. 달리는 자동차가 급히 멈춰서려면 관성에 저항하는 에너지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은 저쯤에서 속도를 줄여야겠군, 하는 예정을 갖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런 예정없이 지낸 탓에, 멈추는 것보다는 속도를 유지하는 쪽이 에너지 면에서 더 경제적인, 꽤나 이상야릇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애초에 잠깐 쉬러 간 카페에서도 이 글의 전반부를 작성했으니 말 다했지.


그리하여 결국은 장황한 휴식 판타지만을 부풀리게 되는 것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성적 판타지가 말도 안되는 방식의 쾌락으로 점철되기 쉬운 것처럼, 이렇게 달성될 가망이 보이지 않는 휴식 판타지 역시 점차 ‘이렇게만 하면 더할 나위없이 행복할 거야’ 하는 망상으로 치닫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식으로 하루이틀 쉬어 봤자 딱히 대단할 것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인생에서 극단적인 쾌락은 신기루에 불과하고 진짜 즐길 수 있는 것은 그 신기루를 향해 달려가는 길의 평탄한 즐거움 뿐이 아닌가.


다만,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할래야 할 수도 없다’라는 감각만은 너무나 그립다. 내게도 그런 날이 분명 있었던 것이다.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친구들과 함께 리조트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던 순간은 신나는 게임이나 음주 따위가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텅 빈 거실로 대충 기어나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로마 귀족처럼 소파에 길게 누워 호박색으로 빛나는 위스키를 홀짝이던 때다. 어찌나 느긋하고 방탕한 순간이었는지. 나는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술과 햇살을 즐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뇌를 쓸 필요조차 없었다. 부끄럽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5위 안에 드는 것 같다.


내게 과연 그런 시간이 다시 찾아올까? 순위를 갱신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런 생각을 해보지만 정답은 없다. 열심히 살다 보면 어쨌든 10년에 하루 정도는 그런 환상적인 날도 오지 않겠어, 하고 또다시 액셀을 밟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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