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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06. 2022

가벼운 잡지, 무거운 잡지



잡지를 그럭저럭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병원에서 순번을 기다릴 때는 잡지가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고 또 매혹적일 수가 없어서 꼭 인테리어 잡지 따위를 뒤적이는데, 신기하게도 보고 나면 뭘 봤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재미난 것들로 눈요기를 한 기분이 남을 뿐이다. 내가 너무 머리를 비우고 사는 걸까? 하지만 어쩌면 그게 바로 잡지의 본분인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비우고 봐도 될 만큼 무난하고 재미있을 것. 하기야 잡지가 바로 스낵컬처의 원류 같은 것니까 그럴 만하다.


두 번째로 잡지에 손이 가는 곳은 비행기나 열차다. 잡지보다는 카탈로그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느낌은 대체로 비슷하다. 오, 이 시계를 이 값에? 이 선글라스는 좀 괜찮은데? 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책자를 뒤적이자면 그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특히 카탈로그의 좋은 점은 살 돈이 있든 없든 ‘한정 상품인데 질러보면 안 될까?’ 하는 욕구를 살살 자극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소유욕을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포르노인 셈인데, 오로지 기내에서만 강렬한 생명력을 갖기에 그 재미는 아주 각별하다. 같은 것을 우리집 화장실에서 봐도 별로 재미있지 않겠지.


내가 잡지를 언제부터 좋아했는가 따져보면 어린 시절에 과학소년을 재미있게 봤던 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아동용 전집류가 몇 질 있는 게 교육이나 교양의 척도 비슷한 역할을 했기에 우리집도 과학 전집이 제법 되었는데, 그 연장선에서 과학소년도 구독했던 것이다. 그래서 워낙 어릴 때 각인된 탓인지 지금도 과학소년이야말로 잡지의 이상향에 가깝다는 인식이 있다. 놀라운 과학 소식도 있고, 특집 기사도 있고, 만화도 있고, 게임북 같은 부분이나 퀴즈 따위도 있고, 독자 참여 코너는 물론이고 뭔가 만들 수 있는 창작 키트나 사은품도 있었으니 그야말로 질릴 틈이 없는 종합 선물 세트나 다름없었다. 이사 다니는 과정에서 중요한 부분(주로 만화)만 잘라내고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지금도 갖고 있었으면 행복의 한 조각으로 여기고 종종 꺼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여간 아쉽지 않다.


이후로는 컴퓨터 게임을 끼워주는 경쟁으로 불타오르던 게임 잡지들도 보고 ‘인터하비’라고 트레이딩 카드 게임의 원조인 ‘매직 더 개더링’을 주로 다루는 잡지도 보긴 했는데, 구독까지 하진 않았다. 그 잡지들은 부록이나 기사가 마음에 들 때 산 탓이다. 책장 사정을 생각해 보면 잘한 일이다.


그렇게 잡지를 구독하지 않다가 무슨 이벤트인가가 인연이 되어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2년 정도 구독했다. 이것도 과학소년 덕분에 과학 잡지에 호감을 품고 있어서 일어난 일인데, 재미로만 따지면 역시 과학소년이 나았던 것 같다. 게다가 내셔널지오그래픽은 비싸기도 여간 비싸지 않다. 그쪽에선 이런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꼭 비싸진 않다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값이 워낙 호된 데다가 비싸게 샀으니 버릴 수도 없는 일이고, 당연한 수순으로 책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 결국 구독을 포기했다. 그뒤로 종종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했으나 어쩐지 예전처럼 설레고 기다려지진 않는다. 과학쪽으로 훌륭한 유튜브 채널, 팟캐스트 채널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재작년쯤에는 ‘에픽’이라는 다산 북스의 계간 문예지를 충동적으로 구독했다.  나는 소설과 수필을 쓰면서도 문예지라곤 거의 볼 기회가 없었는데, 도서관에서 이 잡지를 우연히 발견하곤 구성이나 모양새가 마음에 들어 그야말로 충동적으로 구독하고 말았다. 실제로 모양만 좋은 게 아니라 내용도 제법 알차고 괜찮은 편이다. 그런데 볼 거리가 넌더리 날 정도로 쌓여 있는지라 우선순위에서 미루다보니 결국은 한 권 볼 동안 1년치 네 권이 쌓였다. 역시 문예지는 문예지라 잠깐 숨돌리면서 유튜브 보듯이 펼쳐서 호로록 몇 페이지 읽을 만큼 가볍진 않았던 탓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느긋하게 도서관에서 빌려 볼 것을…….


그에 비해 서울시에서 발간하는 ‘서울사랑’은 잡지의 본령에 잘 맞는 편이라 매달 편한 마음으로 보고 있다. 나는 작년인가 도서 대숙청으로 내 방 책장 중 몇 칸을 비우는 데 성공한 뒤 그중 한 칸에 독서대를 놓고 잡지를 펼쳐놓았는데, 이렇게 해놓으니 양치할 때 와서 읽기가 편하다. 한 번 읽어봐야 3분에 불과하지만 서울사랑은 그 정도 시간에 볼 만한 기사들로 꾸며져 딱 알맞다. 복지 혜택, 나들이 코스 추천, 지명의 유래 소개, 노포 탐방 에세이 등등 유용하고 즐거운 정보도 많아 대체로 만족도도 높다. 하루키 에세이에서 파스타 삶을때 읽기 좋은 무게의 소설 장르가 있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는데, 양치할 때 읽기 좋은가 하는 것도 잡지의 무게감 척도로 제법 괜찮은 것 같다. 


(잡지를 읽는 자세로 가장 뿌리깊게 각인된 모습)


작가로서 직업적 의무감을 갖고 봤거나 보는 잡지도 두 종 있다.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는 하드보일드 추리물인 ‘심야마장’으로 데뷔한 이후 ‘나도 추리 소설가니까 미스터리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얻어야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그런 의무감과 압박감 속에서 읽자니 어째 노동에 가까운 느낌이 들기 시작해서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순수한 독자였다면 즐겁게 읽었을 잡지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최근에 또 SF잡지인 ‘어션 테일즈’를 구독하고 말았다. SF 단편인 ‘자애의 빛’으로 상을 받고 ‘나도 SF작가니까……’라는 의무감 같은 것을 어쩌지 못한 탓이다. 이 계간지는 퍽 두껍기도 하고 인터뷰나 소설, 만화, 리뷰 등등이 다채롭기도 해서 잡지로서의 콘텐츠 만족도는 높은 편인데, 다른 것보다 매번 판형이 바뀐다는 특징이 놀랍다. 겉모양으론 똑같은 잡지라곤 상상도 못할 지경으로 바뀌는 것이다. SF의 방대함을 판형 자체로 표현했다고 봐야 하나…… 아무튼 재미있긴 한데 책장에 꽂아두기엔 재난이나 다름없다는 게 고민거리다. 옛날 ‘만들어볼까요’ 프로그램의 주제가에도 ‘똑같은 친군 재미없어요’라는 구절이 있지만 내가 택할 수 있다면 재미없고 똑같은 판형을 고를 것이다. 개성적인 잡지들을 모두 손쉽게 포용하기엔 책장이 여의치 않은 탓이다.


사실 어션 테일즈를 구독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잡지가 무서울 정도로 공간을 잡아먹는다는 것을 과학소년과 내셔널지오그래픽으로 이미 절실히 체험한 터라 전자책으로만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2호가 나온 뒤로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전자책이 안 나오는 게 아닌가.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종이책으로 1년 구독을 한 것인데, 구독을 하고 오래지 않아 3호가 나오면서 ‘전자책은 다음호가 나올 때 맞춰 출간’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더 기다려볼 걸 그랬다. 아무리 잡지에 손맛도 중요하다지만 나로서는 공간을 덜 먹는게 더 중요하다. 어션 테일즈는 대충 구겨서 한손에 들고 뒹굴대며 읽을 수도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 종이책 특전이라고 해봐야 지금까지 나온 것을 보면 미국 SF잡지 표지 일러스트 엽서 모음, 모래시계, 피라미드 모양의 유리 문진 정도로, 의미가 크거나 갖고 싶어서 안달나게 만드는 것들도 아니니까 나로서는 어느모로 보나 전자책 쪽이 나은 선택지다. 이미 구독했으니 열심히 손맛을 즐기며 감사히 보는 수밖에 없겠으나.


그건그렇고 어션 테일즈의 내용은 그야말로 더할나위가 없는데, 그만큼 읽는 내 마음이 편치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미스테리아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훌륭한 작가들이 많은데 그에 비하면 난 아무것도 아니구나’하는 괴로움이 뒤따르곤 하는 것이다. ‘월간 바둑’을 보는 바둑 기사의 마음이나 ‘빌리어즈’를 보는 당구 선수의 마음도 비슷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거야 누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익숙해지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으나…… 역시 잡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휘릭휘릭 뒤적일 수 있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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