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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30. 2016

의외로 택배는 수령이 더 어렵다



농담처럼 한민족이 배달의 민족이기 때문인지 요즘은 매장에 가서 사는 것보다 인터넷을 통해 택배로 사는 게 훨씬 많은 것 같다. 먹을 것도 배달시키는 게 편하고, 전자기기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편이 훨씬 싸게 살 수 있고, 책도 대강 읽어볼 필요도 없이 반드시 사야 할 거라면 굳이 서점에 갈 필요가 없다(도서정가제 변경 이후로는 서점에서 직접 보고 사는 게 낫지만). 심지어 도시락을 매일 집까지 배달해주는 서비스도 있고, 꽃을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서비스도 있다. 개인적으로 옷과 신발만은 매장에서 사고 있었지만, 이것도 노하우가 생기니까 인터넷으로도 꽤 살만하게 되었다. 당연히 대리점에서 처리해야 했던 핸드폰마저 인터넷으로 사고 개통처리까지 할 수 있다. 이대로라면 택배로는 절대 살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들, 예를 들어 안경 같은 것도 집에 앉아서 시력을 맞추고 옵션을 선택해서 주문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이 택배라는 게, 왜 아직까지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문제가 많다. 일단 너무 반가운 나머지 택배라고 하기만 하면 문을 열어주는 상황부터 심각하다. 그 어떤 신분 증명 없이 택배요, 하면 받을 게 있었는지 없었는지 생각하기도 전에 누구나 문을 열어버리는데, 굳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이건 미친 짓이다. 유니폼은 물론이고 정당한 신분 증명서와, 발신인, 수신인, 그리고 내용물이 뭔지까지 확인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에서도 연쇄 살인마 장경철이 “열려라 참깨”처럼 “택배 왔어요”하고 유유히 가정집에 침입하여 범행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누구나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자다가도 깨어날 지경이다. 


수취인이 없다고 박스를 문 앞에 대충 놓거나 양수기함에 놓고 가버리는 것도 문제다. 양수기함에 넣으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양수기함에서 택배를 꺼낼 때마다 이 아파트의 양수기함 몇 군데에 이런 식으로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택배 박스들이 잠들어 있고, 그걸 누군가 털어가도 대책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최근에 모 사이트에서 급전을 마련하는 방법으로 양수기함을 털면 된다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것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혀 고쳐지지 않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 택배 기사들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업무량에 시달리는 데다가 이것을 안전하게 정상적으로 소화될 인프라가 없는 상황에서 택배량만 늘고 있기 때문이다. 주차장은 없는데 차만 늘어나는 형국이다. 잘 생각해보면 택배가 오는 시간은 거의 받을 사람이 없는 시간인데, 이쯤 되면 당연히 상품이 안전히 보관되고 수취인이 나중에 찾아가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택배 무인 수거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 게 꼭 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미 적었듯이 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취생 팁 같은 걸 볼 때도 있는데, 여자 혼자 살 때는 창가에 남자 속옷을 걸어놓고 현관에도 남자 신발을 놓는 게 좋다거나, 택배를 받을 때 마치 집안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오빠가 좀 받아!" 같은 소리를 한 뒤에 나가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이런 걸 보면 역시 뭔가 단단히 잘못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실질적인 위기감을 느끼는 여자들의 곤란에 비할 수는 없지만, 나도 택배 받기가 영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제법 있다. 일단 중고로 뭘 사는데 조건이 착불이면 아예 포기해 버린다. 착불 택배는 경비실로 가기 마련인데, 얼마가 나올지 모르는 택배비를 미리 전달하기도 번거로울뿐더러, 귀찮은 일을 부탁해놓고 나중에 잔돈을 달라고 챙겨 나오는 게 영 무례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착불이 아니더라도 가족들에게 자랑하기 뭣한 물건은 택배로 사기가 힘들다. 가령 표지에 살색이 대담하게 사용된 책이나 피규어 등을 사자면(어디까지나 예일 뿐입니다) 내가 직접 받을 수 있도록 철저히 시간을 계산해야 하는데, 택배라는 게 배송 시간이 정확히 뜨지 않는 데다가 뜬다고 해도 그게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걸 집에서 편안히 받아볼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고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학교 동아리방으로 시켜야 한다. 이래서야 택배로 사는 의미가 별로 없지 않은가?


정말이지, 기술과 제도의 발전 속도가 맞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라지만 이 불편은 정말 실생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택배의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서 고객이 주문할법한 상품을 미리 가까운 곳에 준비해두고 무인기로 배송할 수 있을 정도라 공상과학소설 못지 않은데, 그것을 수령하는 시스템은 무슨 2차대전 수준에서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메이드나 집사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택배를 받아주는 로봇이 필요하다


물론 발전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 주민센터에서는 여성택배수령함을 운영하고 있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고 실효성도 의문스러운 데다가, 몇몇 쇼핑몰에서 운영하는 편의점 수령 서비스는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적용 쇼핑몰이 너무 적다. 고객의 차 트렁크로 배송해준다는 신기한 서비스도 개발되고 있다곤 하지만 이건 접근 권한을 스마트폰으로 제어할 수 있는 차가 필요하다. 당장은 모든 택배에 적용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는 셈이다.


그래서 생각한 건데, 배송 대행 서비스가 하듯이 사서함을 운영하고 이걸 2차 배송하는 업체가 생겨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택배를 일단 받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찾아온 고객에게 건네주거나, 전화하면 그때 음식 배달처럼 30분 만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것 참 기막힌 아이디어 아닌가-해서 찾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슷한 시도가 이미 실패한 모양이다. 그런 것 없이도 당장 택배 시스템이 돌아가긴 하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정말이지 택배 시스템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누가 제발 배송 로봇 말고 수령 로봇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제대로 된 수령함이라도.



(2015.04.29.)



-후기


이렇게 쓰긴 했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위에 적은 "여성안심택배 수령함"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동은 주민센터에 설치되어 있는데, 자세히 알아보니 주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더군요. 남녀노소 누구라도 핸드폰만 있으면 쓸 수 있습니다. 택배 기사가 보관함에 물건을 넣으면 핸드폰으로 비밀번호가 전달되어, 이것으로 찾으면 되는 시스템이죠. 무료로 쓸 수 있고, 보관 기한이 지났을 경우에만 이용료를 냅니다. 택배를 찾으러 가는 길이 좀 멀긴 하지만 여간 편리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번은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비밀번호로 열고 보니 보관함에 아무것도 없었던 거죠. 혹시 착오가 있어서 직원에게 맡긴 것은 아닐까 주민센터 직원에게 물어보니 우리는 전혀 아무런 연관도 책임도 없다고 하고, 기사님에게 전화를 해보니 제대로 넣었다고 하고... 별 수 없이 택배함 관리처에 문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영민한 목소리의 담당자분이 다른 곳에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며 CCTV를 확인한 뒤에 의심되는 보관함을 원격 시스템으로 잠금처리한 뒤 택배함 앞으로 가서 다시 전화를 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대로 했습니다. 보관함 앞에서 전화를 걸었죠. 그러자 담당자분이 잠금을 해제했고, 저는 원래 택배가 있었어야 할 칸의 바로 윗 칸에서 제 택배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진상은 이랬습니다. 기사님이 여러개를 넣는 과정에서 제 것을 '물건을 찾아간 뒤 제대로 닫지 않은' 보관함에 넣어버리고 그 아래 넣었다고 믿은 것이죠. 즉, 제가 관리처에 연락하기 전에 누군가 그 보관함을 사용했다면 제 택배는 도난당하고 형사 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CCTV와 보관함 사용 기록을 보면 범인은 금방 나왔겠지만, 어쨌든 번거로운 일이 되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아무튼 전화로 지령을 듣고 눈앞의 기기가 원격으로 조종되는 모습을 보자니 매트릭스에 들어온 기분이 들더군요. 


어쨌든 그런 사고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인택배함은 무척 간편하고 매력적입니다. 전국적으로 확충되면 좋겠어요. 


(2016.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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