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Sep 29. 2022

보조 배터리는 영혼의 필수품

신세대의 줄임말 맞추기 퀴즈에서 보조 배터리를 ‘보배’라고 줄여 부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름대로 위트 있는 줄임말이다. ‘보조 배터리’라는 단어가 좀 길기도 하고. 하지만 ‘보배 좀 빌려줄래?’하고 줄여서 부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보조 배터리가 아무리 중요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유난스럽다는 느낌도 들고, 유행 다 지난 사어를 뒤늦게 쓰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어로는 파워 뱅크라고 하고 일어로는 모바일 배터리라고 부른다는데, 나는 보조적인 수단임을 강조하는 ‘보조 배터리’라는 명칭이 가장 마음에 드니까 이대로 부르려 한다. 보조 배터리야, 안녕?

한국에서 보조 배터리가 대중화된 것은 아이폰이 국내에 출시된 이후부터일 것이다. 안드로이드 진영은 분리형 배터리를 교체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아이폰은 그게 불가능해서 전력 공급용 외장 배터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스마트폰 등장 전인 2005년 겨울부터 PDA를 썼던지라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보조 배터리를 갖고 다녔다. PDA도 대체로 배터리가 분리되긴 하지만, 내가 처음 산 모델은 저가형이라 배터리 일체형이었던 탓이다.

그래도 그렇게 외장 배터리를 연결한 PDA를 적외선 통신 방식 무선 키보드와 안테나로 연결해서 글을 쓰고 있자면 오래된 007영화의 소품처럼 레트로한 첨단 기기의 멋이 좀 나는 편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건 얼마쯤 하냐고 물어본 적도 있는데, 태블릿과 블루투스 키보드가 보편화된 요즘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시답잖은 한편으로 17년이나 지났는데도 보조 배터리만은 모양새가 똑같으니 배터리 기술의 발전이 더디긴 더디구나 싶다.

보조 배터리는 기기를 충전하는 것 말고 딱히 다른 기능을 하지 않기에 교체 주기가 상당히 긴 편이고, 나는 지금까지 일곱 개의 보조 배터리를 사용해왔다. 처음 장만한 게 PDA시절에 쓰던 2500mAh 정도의 모델, 그다음이 5000정도 되는 것이었다. 둘다 기성 18650셀이 들어간 것으로 한 개냐 두 개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는데, 둘 다 원통형의 기성 배터리를 넣은 물건인 만큼 크고 무겁다는 단점이 컸다. 10400짜리 벽돌 같은 무게에 알루미늄 케이스로 마감된 샤오미 제품이 많이 팔렸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이건 아마 셀 네 개가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이것에 USB 조명을 꽂고 받침을 만들어 지금도 야간용 랜턴이나 스탠드처럼 쓰고 있다. 길게 쓰는 물건이 아니라 수명 손상이 느껴지지 않기에 잘만 하면 죽을 때까지 쓸지도 모르겠다.

이런 구세대 제품 이후로는 아예 전용으로 만들어진 배터리 팩이 들어간 물건들을 쓰기 시작했다. 아마 리튬이온 배터리 제작 단가가 낮아진 덕이 아닐까 싶다. 이런 제품 중에서 지금도 기념으로 잘 갖고 있는 배터리가 왓챠(그때는 왓챠 플레이였다) 런칭 파티에 당첨되어 기념으로 받은 물건인데, 2500 정도의 작은 용량이지만 카드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작고 가벼워서 요긴하게 잘 써먹었다. 지금도 판촉용으로 그런 모델이 나오긴 할 텐데, 용량이 너무 작아 쓰는 사람이 보이진 않는다.

2016년에는 나도 5000짜리를 새로 샀다. ‘너의 이름은.’ 이미지가 인쇄된 케이블 일체형이었다. 충전 케이블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 아주 간편한 반면에 기본 충전 단자가 5pin이고 라이트닝용 젠더가 하나 더 들어있을 뿐이라 주력 기기 충전 단자가 C타입으로 넘어간 뒤로 쓰기가 좀 애매해졌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원래 모양으로 깔끔하게 선을 수납해서 갖고 다니길 포기하고 C타입 젠더를 항상 끼워서 들고 다녀야 했는데, 빈번히 쓰다 보니 노후되어 결국은 폐기하고 말았다. 좋아했던 그림도 다 닳아버렸고.

이런 일체형 모델은 2020년 정도까지 흔히 볼 수 있었고 그 시대 물건이 지금도 쓰이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뒤로는 시장에서 새 제품이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종종 발화 사고가 일어난 탓인지, 아니면 대세가 된 고속 충전을 감당하기 어려운 형태였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5000mAh도 너무 부족하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 5000짜리 배터리 말고도 장시간 외출용으로 10000짜리 보조 배터리도 따로 보유하고 있었는데, 5000짜리를 버리고 나니 어째 짧은 외출에 갖고 다닐 가벼운 배터리가 아쉬워서 5000짜리를 새로 하나 구입했다. 이때 그냥 적당히 쓰던 것과 비슷한 모델을 사려 했는데 도통 찾을 수 없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 고속 충전, 무선 충전이 모두 가능한 5000짜리 배터리였다. 무선 충전이 되면 케이블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빨리 충전해야 할 때는 케이블로 고속 충전을 하면 되니까 편리하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무선 충전이라는 것이 느리기도 하고 잘못 건드리면 충전 범위에서 벗어난다는 신뢰성 문제가 있는지라 결국 케이블을 꼭 지참하게 되었으니, 확실히 간단히 갖고 다닐 보조 배터리는 케이블 일체형이 편하긴 하다.

그런데 요근래 1년 사이에 절실히 느낀 것이, 5000mAh의 배터리가 상당히 빠듯하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외출 시간이 서너 시간만 되더라도 5000짜리 보조 배터리를 끝까지 써버린다. 물론 이건 내가 스마트폰으로 전력 소모를 심하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지하철로 이동하는 내내 음악을 들으며 전자책을 읽는데, 그 사이에 만보기와 스마트밴드, 무선 이어폰이 지속적으로 배터리를 소모하고 있다. 심지어 모임을 했다면 사진도 몇 장씩 찍고 편집하고 전송하니까 한 시간에 평균 1000~1500mAh 가량의 전력을 소모하게 된다. 게다가 내 주 사용 기기인 갤럭시 S10e는 배터리가 매우 부족한 기기라서 여차하면 배터리가 50%미만으로 떨어지는 데다 나는 그 꼴을 불안해서 보지 못하는 이상한 성격이기에 5000짜리 보조 배터리는 외출만 하면 동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5000mAh짜리 보조 배터리를 다 쓰고 스마트폰 배터리가 60%인 상태로 귀갓길에 오르곤 하는데, 그놈의 배터리 불안증 때문에 요즘은 5000짜리 대신 10000짜리 배터리만 들고 다니게 되었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항상 60% 이상이거나, 그렇게 다시 충전할 보조 전력을 갖추고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고 불안하지 않다. 이런 불안 심리를 갖게 된 데에는 겨울에 40%만 되어도 픽픽 꺼지던 아이폰 사용 기간이 크게 한몫하지 않았나 싶지만, 잘 생각해보면 현대 사회의 기술 발전 상황이 좀 이상한 탓도 있다. 2017년에 비해 스마트폰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것이 게임의 그래픽을 제외하면 달라진 게 거의 없고 인간의 감각과 뇌도 똑같은데 스마트폰은 5년이 지난 지금도 항상 배터리 부족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물론 스마트폰이 더 빠른 속도로 더 큰 화면에 더 많은 광고 이미지와 영상을 띄워대는 반면에 차세대 배터리 보급은 더디니까 어쩔 수 없긴 하나, 아무래도 기술 발달, 특히 웹 환경은 자원을 아끼는 방향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런 웹 환경에서 굳이 사지도 못할 남의 스마트폰 자랑을 2배속 초고화질로 보고 또 보는 내 잘못도 크긴 하지만…….


가득찬 보조 배터리는 현대인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다


이야기를 다시 보조 배터리로 되돌리자. 진짜인지 아니면 누가 웃자고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한때 스마트폰 배터리를 분리형으로 만들면 편리하지 않겠냐는 아이디어를 초등학생인가 중학생인가가 냈다는 이미지가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보조 배터리를 갖고 다니는 게 당연시된 탓인지, 아니면 최신 스마트폰은 오래 가서 그런지 이제는 보조 배터리를 갖고 다니는 게 참을 수 없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당장 나라도 배터리가 교체형인 대신에 크고 무겁고 배터리 용량은 작은 스마트폰을 쓸 것이냐, 아니면 배터리가 일체형인 대신에 작고 가볍고 용량이 크고 방수도 되는 스마트폰을 쓸 것이냐 골라야 한다면 휴대성이 높은 쪽을 고를 것이다. 항상 가방을 갖고 다니니까 손이 가볍고 가방이 무거운 편이 낫기도 하고, 보조 배터리 하나로 여러 기기를 충전할 수 있으니 범용성을 생각해도 보조 배터리가 나은 선택이 되고 만 탓이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나의 부모님은 대체로 보조 배터리를 귀찮아한다. 옛날에는 교체식 배터리가 작고 가벼워서 재킷 주머니에 넣어도 부담이 없었기에 교체용 배터리도 곧잘 소지하고 다녔는데, 근래에 들어서 일체형이 된 이후로는 어지간해선 보조 배터리를 챙기려 하지 않고, 챙겨가면 남의 스마트폰 충전해주느라 바쁘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소지한 기기가 하나니까 범용성이 눈곱만큼도 장점이 아니게 되는 탓이다. 이런 경우를 생각하면 플래그십 스마트폰 중 배터리 교체형이 하나씩 나와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업이 특수목적용이 아니면 굳이 그런 제품을 지속적으로 내줄 것 같지는 않고, 오로지 저전력 기술만 발전해서 충전 없이 하루 이상 너끈히 과격하게 쓸 수 있는 스마트폰이 나오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다음 세대에는 아마 그런 제품을 쓸 수 있겠지. 그러면 보조 배터리가 당연했던 내 세대는 애들한테 혹시 모르니까 나갈 때 보조 배터리 하나 꼭 챙겨가라고 잔소리를 하고, 애들은 무슨 선사시대도 아니고 귀찮게시리 뭐 그런 걸 갖고 다니라고 하냐고 짜증을 낼 것이다.

늙는 얘기를 하니까 문득 생각이 났는데, 체력에 대한 별 생각도 걱정도 없이 대충 돌아다녔던 예전과 달라서 요즘은 가방에 카페인이 함유된 사탕을 꼭 소지하고 다니며 지치면 먹는다. 생물은 일체형 배터리인데다가 심지어 잘 쓰지 않으면 순식간에 노후되는 문제가 있는지라 이런 식으로 외장 배터리를 갖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내 가방에는 전자기기 먹일 에너지와 나 먹을 에너지가 다 들어 있는 셈인데, 이것들을 보자면 갈수록 삶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비효율적인 방향으로 퇴화하는 것 같아 암담해지기도 한다. 지구를 벗어나는 로켓의 무게 대부분이 연료의 무게고 연료가 많이 들어가는 이유가 연료 자체의 무게를 쏘아올릴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데, 나도 시간이 가면 그런 꼴이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다행한 점은 인간을 위한 것이든 전자 기기를 위한 것이든 외장 배터리는 남이 필요로 할 때 내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외출 중에 일행에게 사탕을 나눠줄 때도 있고 외장 배터리를 빌려줄 때도 있는데, 이런 행위가 사람을 절박하지 않지만 은근한 곤경에서 구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묵직한 잡동사니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것도 제법 보람있는 일이다. 앞으로도 외출할 때면 사탕과 보조 배터리는 꼭 챙겨 다닐 생각이다. ‘손수건이란 남을 위해서 갖고 다니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보조 배터리와 사탕도 남을 생각하며 기꺼이 갖고다닐 만한 물건이 아닐까……라고, 요즘도 무거운 가방에 고통받는 자신을 속여본다.

작가의 이전글 평온하지만 재미없는 잠을 잘 자려는 시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