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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Oct 19. 2022

프린터와의 전쟁



우리집은 굉장히 오랜 옛날부터 프린터를 당연하다는 듯이 보유하고 있었다. 좋든 싫든 서류 따위를 인쇄할 일은 생기기 마련이니까 필수 가전으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의외로 인쇄를 할 일도 없고, 가끔 필요하면 회사 사무실에서 슬쩍 인쇄한다는 모양이다. 프린터가 너무 많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아예 감사를 한 회사도 있다지만, 어쩌다 등본 한두 장 정도 뽑는 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우리집의 첫 프린터는 도트 프린터였다. 퍽 낡은 방식인데, 내가 아는 선에서 설명하자면 타자기처럼 잉크가 묻은 리본을 때려서 종이에 잉크를 옮기는 것이다. 당연히 소리가 시끄럽다는 단점이 상당한데다가, 특히 우리집에서 쓴 모델은 용지도 미국식 레터지 사이즈였다. 심지어 필름처럼 좌우로 톱니가 물고 돌아갈 구멍 부분이 붙어 있는 것도 모자라서 종이 한 박스가 다 한 장으로 이어져 있어 나중에 일일이 다 뜯어야 한다는 것도 몹시 번거로웠다. 다만 무슨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도 길게 말린 용지에 지잉지잉 소리를 내며 인쇄하는 영수증 프린터 따위가 이 방식이라니까, 낡았지만 신뢰도가 높은 인쇄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도트 프린터 다음으로는 보편적인 잉크젯 프린터를 쓰기 시작했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프린터 광고도 많이 했는데, 그중에서 앵무새가 나오는 광고의 제품이었을 것이다. 제품자체는 무난했다. 다만 잉크젯 프린터를 저렴하게 써보려는 시도에서 오는 재난이 만만치 않았을 뿐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보드게임 관련 자료나 TRPG관련 자료 따위를 많이 뽑아서 잉크 소모가 적지 않은 편이었는데, 그에 비해 카트리지에 든 잉크는 그다지 충분치 않아서 여차하면 새 카트리지를 사야 했다. 당연히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재생 잉크’라고 해서 업체가 다 쓴 카트리지에 잉크를 다시 채워 파는 것을 쓰기로 노선을 변경했다. 그러나 이것도 여차하면 새것을 사야하는 문제만은 마찬가지라, 조금 지난 뒤부터는 아예 잉크를 충전하는 키트와 벌크 잉크를 사서 리필을 직접 하기 시작했다. 프린터와의 기나긴 전쟁의 막을 열고 만 것이다.


프린터와의 전쟁에서 가장 골치아픈 점은 뭐니뭐니해도 손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잉크를 다루는 이상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 장갑을 끼면 그만 아니겠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장갑을 끼고 작업하는 것도 마냥 쉽기만 한 일은 아니다. 잉크가 묻은 장갑으로 무심코 뭘 잡았다간 거기도 더러워지니까 여차하면 장갑을 벗어야 하는데, 비닐 장갑이나 라텍스 장갑 따위는 손쉽게 쓱 벗고 낄 수 없어서 그 과정 사이에 어딘가는 더러워지기 일쑤다. 게다가 잉크 리필의 신이 온대도 잉크가 넘치거나 새어서 흘러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기 마련이라 결국에는 잉크에 젖은 휴지와 신문지와 장갑 따위로 주변이 난잡한 꼬락서니가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아수라장에서 카트리지에 구멍을 내고 주사기로 잉크를 주입하고 다시 구멍을 막고 난리를 쳐도 네 가지 색깔 중 뭔가는 막혀서 안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 또 물티슈로 노즐을 닦아보기도 하고 온수에 담가보기도 하고 잉크를 더 넣어보기도 하고 세척액으로 청소도 해보고 난리를 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카트리지를 살려봤자 정상 상태가 얼마나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한 번 쓰고 버리게 만들어진 것이니 불평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다 언제인가 ‘무한 잉크’라고 해서 카트리지와 외부 대형 잉크 탱크를 호스로 연결하는 장치가 등장했다. 카트리지의 잉크 인식칩을 속이고 잉크를 지속적으로 공급해서 카트리지 리필을 할 필요 없이 탱크만 채워주면 되는 개념이다. 잉크 리필에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던 나는 곧장 이 방식이 채용된 복합기를 사서 쓰기 시작했고, 그럭저럭 만족했다. 일단 카트리지에 주사를 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 하나만 해도 아름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잘 돌아갈 때나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오래도록 사용해 보니 문제가 없진 않았다. 사용하지 않는 동안 카트리지 노즐이 굳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해서 헤드 청소 기능을 몇 번이나 돌려보고, 그래도 안 되면 예전과 마찬가지로 배변에 익숙하지 않은 아기 고양이 항문 닦아주듯 물티슈로 노즐을 닦기도 하고 반신욕을 시켜주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틀에 끼우고 주사기로 강제로 빨아내서 잉크를 꽉 채우는 동시에 노즐도 뚫어야만 했다.


고된 일이라곤 할 수 없겠지만, 이럴 땐 이렇게 하면 반드시 해결된다는 법이 없어서 바쁠 때는 이 작업이 사람을 미치게 하곤 했다. 오늘 중으로 뽑아야 할 문서가 있는데 한 시간씩 싸우고 있자면 분통이 터져 죽을 판이었다. 게다가 한번 잘 고쳐놓으면 오래도록 잘 작동할 거라는 보장조차 없어서 고치는 보람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결국 문서 인쇄 전용으로 흑백 레이저 프린터까지 마련하긴 했지만, 레이저 프린터는 ‘무한’이 아니기에 그다지 쓰이지 않았다. 여전히 레이저 프린터는 뒷베란다 구석에 처박혀 있다.


이리저리 달래가며 쓰던 복합기는   지나자 슬슬 고칠  없는 지경이 되었고, 결국 2019년말에  복합기를 고르게 되었다.  선택의 기로가 제법 어려운 편이었다. 무한잉크를 쓰는 것은 대체로 보드게임 관련 자료 때문이었는데, 그때쯤에는 굳이 직접 한글 자료를 뽑지 않아도 충분할 만큼 한글판 보드게임도 쏟아지고 있었고, 자작 게임을 만들 여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예 정품으로 등장한 무한 공급식 복합기는 비싸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고민 끝에 다른 프린터보다 인쇄를 많이   있어 경제적이라는 모델을 선택함으로써  넌더리나는 프린터 전쟁에서 손을 떼기로 했다. 개조된 물건을 끊임없이 어르고 달래며 돈을 아끼는 짓을 그만두고 편해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프린터와의 싸움이 이렇게 무섭다


그러나…… 새로 산 복합기를 좀 써보곤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무지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잉크가 금방 떨어졌던 것이다. 어쩌다 이미지 몇 장 좀 뽑으면 잉크가 없다고 프린터가 비명을 질러댔다. 그래서 좀 알아봤더니 광고에서 말하는 인쇄 매수란 일반 텍스트만 뽑을 때에 가까워서, 나처럼 용지 전체를 그림으로 채워서 뽑곤 하는 사람에겐 아무 쓸모도 없는 정보였다. 이래서야 여차하면 카트리지를 주문해야 하던 옛날과 다를 것도 없었고, 치밀하게 계산해본 결과 잉크를 계속 사서 쓰는 게 엄청난 손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눈물을 머금고 무한잉크 키트를 사서 복합기에 설치하고 지금껏 쓰고 있다. 그나마 잉크 역류 방지 장치와 전용 잉크 팩 등등이 적용된 모델이라 구입하면서 기술이 많이 발전한 덕에 고생은 덜 하겠구나 싶었는데, 이게 웬걸, 나을 게 하나도 없었다. 사자마자 한 색깔 공급이 안 돼서 교환을 받은 것부터 이상하다 싶었는데, 한참 쓰다 보니 카트리지 인식이 안되어 교체한 적도 있고, 탱크에서 샌 잉크가 바닥을 적신 적도 있으며, 잉크 팩에 꽂혀서 잉크를 빨아들이는 죽창 모양의 주입구가 부러져버리기도 했다. 고장의 강도도 들어간 비용도 구세대 제품보다 더 심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게도 약간의 손재주는 있기에 굵은 주사기 바늘을 에폭시 접착제로 고정해서 수리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도 여차하면 한 색깔이 나오지 않아서 카트리지를 청소하고, 노즐로 잉크를 빨아내고, 호스에서 공기를 제거하려고 호스 끝에 주사기를 꽂아서 빨아내고, 카트리지에 잉크를 주사로 채워보기도 하고, 그래도 안 돼서 안 나오는 색깔만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수십장 뽑아보기도 하며 아주 오랜 시간을 버렸던 것을 생각하면 사리가 나올 지경이다.


자연히 이 난리를 한 번 칠 때마다 돈을 더 주고 아예 정품 무한 잉크 제품을 샀다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시간도 아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앞으로 프린트를 딱히 많이 할 것 같지 않은데 굳이 비싼 제품을 살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판단 대신에 기왕 사는 거 좋은 거 사서 잘 쓰자고 큰 결심을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 지금 이 선택지의 결말을 봐서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그때는 ‘카트리지 하나로 많이 뽑을 수 있는’ 평범한 제품을 적당한 가격에 편하게 쓰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므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반복할 게 분명하다. 눈속임 광고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때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던 것이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면 한탄은 적당히 하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여러모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고로 오늘도 노즐을 청소하며 그러려니 하려는데…… 만약 이틀 걸려도 수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때는 새 프린터를 살 준비도 해야겠구나 싶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일단 기분은 좀 나아지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 게다가 미래의 내 시간을 무한정 끌어 쓸 수도 없는 만큼, 언젠가는 다가올 타협점을 위해 조금씩 돈을 모으기로 하자.

(2022.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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