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Apr 14. 2016

발암의 노래를 들어라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몹시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암 걸리겠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으나 이 표현은 고통의 무게에 대한 표현으로 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지, “발암물질” “발암주의” 등의 표현으로도 활용되며 언어 생활 속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듯하다. 앙골모아 대왕의 강림 예정 시기를 전후하여 나타난 “존나”가 그러했듯이. 


언어야 사회성만 획득하면, 그러니까 말했을 때 알아듣는 사람만 충분히 많다면 딱히 무슨 심사를 거치지도 않고 통용되는 것이니까 이 ‘발암’ 표현이 부조리하다거나 비인간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듣기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느낀다. 암 걸릴 것 같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듣느니 그냥 상욕을 섞어 불평하는 것을 듣고 말겠다. 


‘암’이라는 건 희화화해서 즐겁게 쓸만한 소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미 섹스, 동물, 동성애, 인종, 성별, 외모 등등 별의별 소재가 희화화되고 욕이나 표현으로 활용되는데 왜 ‘암’만은 아니냐? 그것은 바로 암이 너무나 뚜렷하고 실체적인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비교해보자. 

“개새끼!"

이 욕은 어지간히 뜻밖의 상대에게서 듣지 않는 한, 아무리 들어도 영혼에 상처를 입을 정도로 모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부모를 욕하는 것이긴 하지만 딱히 사실에 근거한 모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무리 나를 개새끼라고 불러도 엄연히 우리 가족은 호모사피엔스고 이건 과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만약 판타지 세계에서 개 머리를 한 종족인 코볼드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개가 이 말을 듣는다면 대단히 모욕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들에게 ‘개새끼'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특질을 조롱하는 차별적 언사다. 그러니까 공장지대에 코볼드가 이주하여 임금도 제때 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세계관이라면 이런 욕은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니거”라는 단어가 갖는 위상과 비슷하리라.


그럼 다음은 어떤가?

“교통사고 나서 뒈질 놈."

일상적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운전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종종 들을 수 있는 저주다. 이건 대상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소름 끼친다. 이 저주는 뚜렷한 현실과 상황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에 대해 우리는 아주 상세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을 실제로 교통사고를 겪었거나 교통사고로 가족이나 친지가 죽은 사람이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 경우에 이 저주는 명백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말이 될 것이다. 


암은 단연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한 공포감을 지닌 단어다. 


그럼 다시 

“암 걸리겠다."

라는 표현으로 돌아오자. “암 걸려 죽어라.” 라는 게 아니니까 이건 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의 감정에 대한 격한 표현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듣는 이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면 암이라는 단어는 얼마만큼의 현실감을 지니고 있는지? 이건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누구나 한두 다리 건너면 누군가는 암으로 사망했거나 암을 치료했거나 암으로 의심되어 조직검사를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당장 나만 해도 친척 두 명, 지인의 부모 중 두 명이 타계했고, 친구 한 명, 지인의 부모 한 명, 어머니 친구 두 명이 겨우 치료에 성공했으며, 친구가 진료를 받은 적이 있고, 아버지가 조직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암 걸리겠다는 표현은 욕이 아니니까 ‘누가 암 걸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린데 유난 떨고 난리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럼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건드릴지도 모르니까 암이라는 단어도 쓰면 안 되겠네’ 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논리적으로는 맞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딱히 남을 욕하는 게 아니니까 이건 표현의 자유에 포함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외래어 대신 순우리말을 쓰자는 식으로 이런 표현을 뿌리 뽑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표현을 보고 있자면, 암이라는 공포를 사람들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괜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신이 재미없는 인간 같아 바보 같기도 하고, 암의 공포를 엿본 게 무슨 훈장이나 벼슬도 아닌데 남에게 뭐라고 하고 싶은 자신이 꼰대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뭔가 결제하며 공인인증서 따위와 씨름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으로 ‘암 걸리겠네’ 하고 생각하는 때도 있어 자신의 언어중추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암 걸리겠네’를 처음으로 유행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그 능력으로 더 강렬하고 재미난 표현을 생각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리고 1990년대에 배운 ‘존나’를 2010년대까지 쓰고 있는 것처럼 2010년대에 배운 ‘암 걸리겠네’를 우리는 2030년대까지 쓰게 되는 걸까? 만약 쓰게 된다면, 그때에는 누구나 암을 웃어넘길 수 있을만큼 의학이 발달했으면 좋겠다.


(2015.05.27.)



-후기


PC함이란 무엇일까 요즘 자주 생각합니다. 그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특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체 없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저질러진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는 언피씨함 뿐이고, 피씨함이란 그런 문제가 없는 일시적 상태를 가리키는 반대급부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죠. 또렷하고 손에 쥘 수 있을 것처럼 구체적인 불행함에 비해 행복은 너무나 막연해서 불행하지 않은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런 예와 비슷하군요.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아닌 것이 행복이라니, 이 얼마나 덧없는 변명같은 표현인지.


그건 그렇고 요즈음은 발암이 어쩌고 하는 표현이 상당히 줄어든 것 같습니다. 한때 유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인지 그 단어는 다른 단어로 대체되는 기색도 없이 그냥 원래 없었던 것처럼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무척 반가운 일이군요. 


(2016.04.13.)

매거진의 이전글 친절하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