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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06. 2016

친절하지 않은 정도는 괜찮다

다양한 서비스업이 등장하고 이것을 이용하는 빈도도 높아지면서 ‘친절함’에 대한 기대치도 그 선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웨이트리스가 서빙하면서 미소 짓지 않았다고 화를 낼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혹은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화를 낼 수도 있고, 드물지만 비행기에서 땅콩의 포장을 뜯어주지 않았다고 난동을 부리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이런 경향은 사회가 각박해져 너도나도 위에서 받은 억압을 어딘가에 풀고 싶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우를 받고 싶어져서 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강도 높은 친절의 요구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고역스러운 것이다. 나는 공익근무를 하면서 꽤 오랜 기간 주차요금 정산도 담당했는데, 당장 뭘 주는 건 없으면서 돈만 달라고 하는 서비스란 당연히 좋은 말을 듣기가 힘들다. 그래서 “2000원 나오셨습니다.” 가 괴이한 표현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써야 했고 아무리 어처구니없는 경우를 당해도 뒤에는 그럭저럭 웃는 얼굴을 보여줘야 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서비스가 아니라 자기방어에 가까웠다. '내가 공손한 노예처럼 굴지 않으면 누군가는 날 공격할 수 있고 난 거기 대항할 힘이 전혀 없으니 일단 기자’하는 생각이 서비스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건 무슨 귀족이 행차할 때 죽기 싫어서 머리를 조아리는 것도 아니고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만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살기 위해 웃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빈민가에 행차한 폭군이 된 듯한 기분이라 씁쓸하다.


이게 악순환을 낳은 것인지, 자기가 서비스를 이용해주는 이상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은 자기 아랫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서비스에 있어서 누가 누구의 위나 아래가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서비스업이 반드시 친절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고객님, 주문하신 방망이는 현재 제작이 어렵습니다. 요청에 부응하지 못하여 무척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데 가 사우, 난 안 팔겠소.”라고 말하는 사람도 어디엔가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친절한' 서비스에 대한 지속적인 요구는 일종의 학대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데 서비스업에서 친절함이란 무얼까? 나는 '거래하는 상품 이외의 수단으로 이용자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 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맥도날드에서 미소를 주문한 고객에게 웃어주면 그건 친절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판매자에게는 제공하기로 한 적도 없는 것을 제공할 의무가 없고 구매자에게는 구매하기로 한 것 이외의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따라서 친절하지 않은 것까지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친절하지 않은 것’과 ‘불친절한 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꽤 다르다고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주문했을 때,


“주문하신 라면 나왔습니다. (웃으면서) 맛있게 드세요."


이렇게 서빙한다면 이건 명백히 친절한 것이다. 한편


“(무표정으로)주문하신 라면입니다."


이렇게 서빙하면 이건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 


“라면 시킨 거 누구요?"


이건 명백히 불친절한 것이다. 


“어떤 놈이 라면이야?"


이건 물론 무례다. 


즉, 의도를 갖고 구매자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시점에서 불친절이 시작되고, 이게 아주 맹렬하고 적극적이면 무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구매자의 기분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기계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태도라면 그냥 친절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서비스업이라도 친절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다른 곳에 비해 친절하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거나 다른 곳을 이용하겠다고 발걸음을 돌릴 수는 있지만 천하에 빌어먹고 저주받을 곳이라고 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역시 로봇이 아니고 인간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 아침 급히 집을 나오다가 새끼발가락을 모서리에 심하게 박는 통에 뼈에 금이 갔을지도 모르고, 어제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에 다녀와 심란할지도 모른다. 물론 나라고 딱히 그걸 헤아려줄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의 심리 상태가 내 권리나 심리 상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면 그 나름의 사정이 존재해도 괜찮다. “유리가면"의 츠키카게 선생이 연기 중에 우는 마야를 보고 윽박지르듯이 ‘가게에 들어서서 제복을 입은 이상 넌 인간이 아니라 웨이트리스야! 가면을 깨뜨려선 안 돼!’라는 논리는 주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지만, 서비스업은 딱히 사상과 진영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 “넌 친절하지 않으니까 불친절하기 짝이 없군!” 하고 매도할 수는 없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친절하지도 않고 불친절하지도 않은 중립지역에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상종 못할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남들은 다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까지 주는데 넌 왜 내가 요구하지 않은 것을 주지 않는 거야!”라고 요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경우가 줄어들고 서로 좀 무뎌져야 모두 덜 피곤해지지 않을까?



(2015.05.20.)



-후기


이 글을 쓴지가 일 년이 다 되어 갑니다만 세상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뭐, 대단히 주목받은 성명도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모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여직원은 반드시 잔머리 없이 깔끔하게 머리를 묶고 화장하고 꼭 붉은 립스틱을 발라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든가, 어느 기업에서 직원이 휴게실 불을 끄지 않았다고 직원 휴게실을 폐쇄해버렸다든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면 이 사회는 노동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 거면 로봇을 고용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주장하고 싶기도 한데, 정말 서비스업에 로봇이 투입되면 그만큼 일자리가 사라지는 거니까 막막하기만 합니다. 첨단화된 야만 사회라고나 할까요? 이 글의 예전 후기에도 쓴 말이지만, 정말 누구나 한 번은 서비스업에서 대중의 악의를 느껴봐야 합니다. 아니면 어릴 때부터 감정 노동자를 대할 때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치든가요.


(2016.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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