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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16. 2016

죽어라, 소주


누군가 소주는 좋은 술인가 묻는다면, 나는 아주 번민할 것이다. 술의 품질만 두고 생각하면 소주는 술비린내 풀풀나는, 끔찍스런 물건이 틀림없다. 그건 술이 아니라 물에 알코올을 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맑고 깨끗해서 아주 잘 넘어가네 부드럽네 어쩌네 하는 광고를 보고 있자면 소송이라도 걸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주는 가격대 성능비가 훌륭하고 나름대로 고유한 맛을 갖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 중 하나가 아닌가.


그렇다면 누군가 소주를 좋아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까? 이건 좀 생각해볼 일이다. 만약 소주가 아니라 맥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매일 저녁 맥주 한 캔을 마실 수 있는 삶은 꿈만 같을 것이다. 언제나 맥주를 원하는만큼 마실 수 있다면 나는 맥주에 빠져 죽을 게 틀림없다. 


여기에 견주어보면 나는 아무래도 소주를 싫어하는 것 같다. 매일 소주 한 병을 마실 수 있는 삶 따위는 피하고 싶다. 소주가 한없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더라도 나는 결코 거기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게 소주에 대한 내 느낌이다. ‘독’을 흔히 녹색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소주의 초록색 병은 위험신호다. 녹색병이 출몰하는 자리에 오래 붙어있지 않는 게 여러모로 이롭다. 


그렇다면 나는 소주를 싫어하고, 그따위 것은 절대 입에 대고 싶지 않고,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가? 문제는 바로 이 부분이다. 소주는 가급적 피하고 싶지만, 가끔씩 참기 힘들 정도로 마시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안녕? 난 소주고, 내일 아침  널 반쯤 죽일 거야.


가령 고기를 구워 먹을 때가 그렇다. 치킨에 맥주가 최고의 조합인 것처럼, 고기에는 소주가 가장 잘 맞는다. 지글지글 잘 구워진 고기를 상추에 싸서 먹은 뒤 들이키는 소주는 쓰고 차갑다가 식도를 넘어가면서 달고 뜨거운 것으로 변해 몸을 천천히 데우는데,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한 그 맛의 변화란 다른 술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신비로운 것이다. 고기에 맥주도 괜찮긴 하지만, 적당히 취하면서 고기도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역시 소주가 제격이다. 취해선 안 될 이유가 있지 않은 한 고기 구워 먹을 때 소주를 마시지 않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오뎅탕이나 순대국밥처럼 뜨거운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소주를 마시지 않으면 여름에 바닷가까지 가서 바다 구경만 하고 나오는 것 같은 허전함이 들어 견디기 힘들다. 국물과 소주의 길항작용은 항상 절묘한 균형으로 어울려 국물이 소주를 부르고 소주가 국물을 다시 부르는데, 국물의 맵고 짜고 뜨거움을 소주의 달고 쓰고 차가움이 달래는 것인지, 소주의 달고 쓰고 차가움을 국물의 맵고 짜고 뜨거움이 잠재우는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두 액체가 서로 마중물이 되어 퍼올리는 힘이란 무서운 것이라 그렇게 부어라 마셔라 즐기다 보면 절묘한 균형은 순 헛소리고 사람은 알코올에 떡이 된다는 것뿐이다. 


사람이 술을 마셔야지 술이 사람을 마시면 안 되지.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처럼 아주 상식적이기 짝이 없는 말이지만, 소주의 무서운 점은 그렇게 잘 어울리는 음식들과 함께 먹기 시작하면 대중을 잡을 수 없어서 항상 조금쯤은 더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배를 채우고 만복감을 느끼기까지 20분이 걸린다는데, 소주를 마셔서 취하고 그 취함이 슬슬 그만둬야 할 때라는 걸 인식하기까지는 한 시간은 걸리는 것 같다. 한 시간이면 술이 사람을 떡으로 만들고도 남을 시간이다. 취했다는 걸 알아도 조금만 더 취하면 더 기분 좋지 않을까? 하는, 앞뒤 없는 쾌락주의에 몸을 맡기게 된다. 악마가 따로 없다. 


술자리에서 주변 상황도 이런 비극을 부추기기 마련이다. 맥주로 시작한 술자리가 맥주로 끝나질 않고 소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내가 경험한 바, 이건 두 가지 패턴을 갖는다.


-주변의 소주파가 소주를 시킨다.


-또는 내가 얼큰한 것을 먹고 싶어진다. 


그 자리에 소주파가 많든 적든 있다는 것만으로 문제다. 나 같은 하이브리드파는 소주파가 많으면 많은 대로 휩쓸려 마시기 시작하고 적으면 적은 대로 참전하고 만다. 여러 명이 옆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짜장을 먹고 있을 때 옆에서 먹는 짬뽕 국물 한 숟가락이라도 얻어먹고 싶어지듯이 한 잔만 달라고 해서 끼게 되고, 한두 명이 소주를 마시고 있으면 ‘도와줘야 한다’는 이상한 의무감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특히 이 의무감이라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인데, 혼자 마셔도 상관없으니까 시키는 것일 텐데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상하게 쓸쓸해 보이고, 충분히 도와줄 능력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알량한 보신을 위해 외면하는 소인배가 된 듯한 기분이 들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옆에서 뭘 먹든 마시든 상관하지 않고 당당히 소주를 시켜 마시는 사람이란 대체로 소주 한 병쯤은 혼자서 너끈히 해치우고도 남는 사람이라, 이런 사람을 걱정한다는 건 거지가 재벌 걱정하는 꼬락서니나 다름없음을 아는데도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도 소주를 마시고 있지 않아도 안전한 게 아니다. 시원한 맥주와 튀김류 안주를 한참 동안 먹다가 메뉴를 보면 뭐에 홀린 것처럼 오뎅탕처럼 얼큰한 국물을 마시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의향을 물으면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들이 쏟아지기 마련이고, 그러면 당연한 수순으로 소주를 마시게 된다. 게다가 이런 호기로운 사람들 중에는 술이 떨어지기만 하면 재깍재깍 한 병을 추가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라 술은 국물을 다 먹어치울 때까지 마르지 않고, 나는 도중에 ‘아 난 취해서 안 되겠어’라고 절대 말하지 못하고 그대로 객기를 부리고 만다.


아무튼 그렇게 저렇게 소주를 마시고 간신히 막차에 올랐다가 정신을 잃고 잠들어 멀고 먼 종점까지 가거나, 내릴 곳을 지나쳐 반대 방향 열차로 갈아타고 또다시 내릴 곳을 지나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고 나면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인가 싶어 한심스럽고, 간신히 집에 도착해 겨우 씻고 시체처럼 잠들었다가 맞이하는 아침에 겪는 숙취도 설사도 끔찍스럽다. 소주를 마신 다음 날은 그래서 하루 종일 컨디션이 엉망이라 뭘 집중해서 할 수가 없다. 일상 속의 재난이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증오스러울 지경이다. 


그래서, 소주 따위는 지구 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긴 하지만… 역시 소주를 영원히 마실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쓸쓸한 기분이 든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소주는 해악과 함께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다져놓고 있어서 그게 없어지면 삶의 한 부분이 텅 비어버릴 것 같다. 달리 대체할만한 술이 없나 싶어도 그런 건 놀라울 정도로 도무지 찾을 수 없다. 끔찍하게도.


소주처럼 단점은 있지만 누군가의 삶의 몇몇 장면에서 도저히 떼어낼 수 없는, ‘결국 절 다시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따위 대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멋지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런 악역보다는 당연히 그냥 바르고 곱고 깔끔한 사람이 낫겠지?  


(2015.04.15.)



-후기


최근에 '술은 마실수록 주량이 느는 게 아니다. 다만 간이 망가질 뿐이다'라는 연구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반신반의할 만한 연구결과인데, 적어도 소주에 있어서는 맞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작년인가 공짜 소주가 생겨서 희희낙락하며 집에서 혼자 반 병쯤 마시고 다음날 아침의 숙취에 넌더리를 낸 뒤로 소주에는 입을 대지 않고 있습니다. 대신에 제사용 술이나 일본 소주, 혹은 위스키, 드라이 진 같은 걸 마시고 있죠. 이런 술들을 시험해서 얻은 결과는, 도수가 높으면 디테일한 차이가 있더라도 소주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고깃집에 가서 드라이 진을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미지 출처: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C%A3%BC#/media/File:Soju_jinro_gfd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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