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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20. 2016

사치의 방향과 자유


"여자들은 모두 명품백을 좋아한다!” 라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여러모로 잘못된 생각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명품백을 갖고 싶어서 목걸이를 잃어버린 마틸다처럼 열심히 일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가방이라는 것 자체에 아무런 애착이 없어서 잰스포트든 에코백이든 비닐백이든 개의치 않고 쓰는 여성도 있고, 있으면 좋겠지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비윤리적인 취미라도 가진 것처럼 범주화해서 선언하면 거기 해당하는 사람도, 해당하지 않는 사람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A는 모두 B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선언은 대체로 오류를 포함하고 있고, 변변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곤 하는 것이다. “남자는 모두 리그 오브 레전드를 좋아한다!”, “남자는 모두 스포츠를 좋아한다!”, “부자는 모두 골프를 좋아한다!”, “한국인은 모두 김치를 좋아한다!” 등의 범주화 선언이 그러한 것처럼. 


한편, “명품백을 좋아하는 것은 사치다!” 라는 생각 역시 별로 권장할만큼 우수한 것은 아니다. 사치라는 것 자체가 필요 이상으로,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한다는 뜻인데, 누군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의 분수가 어떤지 타인이 판단하는 게 정당한지는 차치하더라도 정확하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누가 무엇을 사든 말든 남이 뭐라고 할 정당한 이유는 없는 셈이다. 

핸드백 구입에 대한 비난은 몰이해에서 나오는데, 사실 이해할 수 없으면 평가도 하지 않는게 맞다.


그렇긴 해도 나라고 고가의 가방을 여럿 구입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기왕이면 더 싸고 기능적인 걸 사면 안 되나?’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것은 아마 내 안에서 가방에 대한 가치가 그렇게까지 높지 않고, 디자인보다는 기능성에 더 높은 점수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싸고 기능적인 가방’만을 찾다 보면 그 종착지는 아마도 시장에서 파는 잰스포트의 짝퉁 백팩이 될 것이다. 이 물건들은 내가 아는 한 가장 저렴하고 적재량도 많고 천이 질겨 오래 쓸 수 있다. 모든 여성이 새침한 미니스커트와 블라우스를 차려입은 뒤 그 위에 백팩을 매고 데이트에 나서서 만오천 원에 샀는데 25리터나 들어간다고 기능성을 뽐내는 세상은 어째 초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가방(백)에 대해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바에 따르면, 가방에는 가방이라는 기능 이상의 가치가 있으므로 단순히 끈 달린 주머니로 생각해선 안 된다. 가방은 가방으로서 기능에 충실하면서, 아름다워야 한다. 당연히 이런 물건은 비싸진다. TCG에서 발동 비용이 낮으면서 능력이 좋은 카드는 거래가가 비싸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게다가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옷, 벨트, 구두, 장신구 등과 매치하려면 똑같은 가방이라도 여러 색, 여러 스타일이 필요해진다. 역시 TCG로 비유하자면, 자기가 가진 다른 카드들과 콤보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TCG를 하다 보면 새로운 덱에 딱 필요한 카드를 살 수도 있고, 새로 뽑은 카드에 맞춰 새로운 덱을 짤 수도 있다. 요는 '똑같은 가방이 있는데 왜 또 비싼 걸 사겠다는 거야!’라는 말은 ‘전에 덱 짜놓고 무슨 카드를 또 사겠다는 거야!’ 라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불합리하다는 뜻이다.


옷과 소품의 매치에 신경써 본 적도 없고 TCG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누구나 남이 보기에 일견 쓸모 없고 사치로밖에 보이지 않는 소비품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지? 아무리 봐도 똑같아 보이는 골프채를 이것저것 사고 또 사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기능상 아무런 차이도 없는 손목시계를 몇 개씩 사 모으는 사람도 있고, 드라이버나 핸드드릴에 군침을 흘리는 사람도 있으며, 얼굴은 다 똑같아 보이는 피규어를 계속 사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누가 보기에는 ‘애들이나 할만한 것으로 보이는 말판놀이’를 끊임없이 사고 파는 사람도 드물게 있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 각자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대체로 합당한 수집의 이유가 나온다. 골프채나 공구는 비슷해 보여도 각각 쓰임새가 다르고, 피규어는 제각각 다른 캐릭터이거나 같은 캐릭터라도 의미가 다르며, 보드게임은 하나하나가 다른 게임이다. 이것들을 모두 ‘합리적 소비’라는 냉철한 기준으로 ‘그거 없다고 죽는 거 아니잖아’ 하고 잘라내다 보면 뭐 하나 남지 않는다. 식의주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것 말고 대체 어떤 문화가 합리적이란 말인가? 밥조차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것처럼 아이스크림 같은 형태의 우주식으로 때우는 게 가장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대부분 행복해지기 위해서 사는 거니까 누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언가를 산다면 딱히 뭐라고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만약 그것을 사기 위해 보편적 행복의 구성물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희생하거나 훼손해서 명백히 전반적으로 불행해질 게 뻔하다면 그건 정말 사치가 맞겠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요는 평소에 돈 좀 아끼거나 고된 일을 해서 뭘 사는 것 정도로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일하고 돈을 모으고 번식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이라면 삶이 너무 끔찍스럽지 않은가?


(2015.06.10.)



-후기


이 글을 쓴 게 작년인데 이른바 '명품백'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멍청한 여자들이 몸을 팔아 명품백을 산다, 쯧쯧'이라는 내용의 작품들이(작품이라고 하긴 싫지만) 몇이나 발표되었죠. 슬슬 명품백 된장녀 어쩌고 하는 소리는 빨간 마스크처럼 도시전설의 영역에 편입시켜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멋대로 가치를 평가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거나, 아니면 다 이해한다고 자신하기 때문이겠죠. 써놓고 보니 후자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긴 합니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그나저나 본문에는 저의 사치로 보드게임을 예로 들었는데, 최근 들어서 그보다 훨씬 더 남이 이해하기 힘든 소비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로 전자담배인데요,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펜 정도 사이즈보다 훨씬 큰 모드(MOD) 기기에 입문하면서 무화기(액상을 저장하고 기화시키는 부분)와 액상, 향료 따위를 스스로 봐도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사들이고 있습니다. 니코틴 섭취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필요한 건 딱 하나인데 말이죠. 그런 것들을 보면 정말이지 사람은 '쓸모없는 것'을 위해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2016.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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