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Nov 08. 2023

사운드의 낙원을 떠나며



하이파이라 부르는 고성능 오디오 장비에 빠지면 돈이 남아나질 않는다는 얘기가 취미와 비용 얘기만 나오면 빠지지 않는데, 나도 이런 무서운 길에 매료된 적이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서, CDP라는 고대의 문명을 향유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학창 시절이다. 그때는 ‘스마트폰’ 이라는 만능의 디지털 기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어려울 일이었나 싶은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3.5파이 이어폰 단자조차 탑재되지 않았으니 다른 문제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벨소리가 16비트인가 32비트인가로 나온다고, 진짜 음악 소리 같다며 입을 벌리고 감탄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아니, 엊그제는 너무하고, 한 10년 전쯤 일어난 일 같다.


제법 대중적으로 보급된 디지털 기기가 그 모양이었던지라 음악을 향유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기기가 각축전을 벌인 기간이 3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전쟁은 CDP가 전통의 강자로 군림하던 판세를 MP3P가 뒤집는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제3세력으로 MD가 자기 나름대로 마니악한 영역을 구축했다. 이때 나는 어쩐지 MP3P가 별로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CD에 오래도록 천착했다. 다른 것보다 집에 이미 오디오를 두고 있어서 CD로 음악을 듣는 게 당연했다는 이유가 컸던 것 같다. CD 음원을 MP3P로 들으려면 음악을 컴퓨터로 추출해서 파일을 새로 만들어 넣든지 음원을 다시 다운받아서 넣어야 한다는 게 귀찮다는 점도 있긴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보유하지 않은 음원을 다운받아서 CD로 굽고 앨범 표지까지 인쇄해 꽂아두곤 했으니, 귀찮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음악을 ‘음반’으로 듣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서론이 길어지는군. 아무튼 CD를 고수하는 음반 원리주의자들은 음반을 책 빌려주듯 서로 빌려주고 들어보고 감상을 나누는 미풍양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일을 복제해서 이메일로 보내줘도 똑같이 음악 얘기를 할 수 있는데 왜 음반을 직접 빌려주는 게 더 아름다운 일인가? 그것은 아마도 동시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는 실제 물건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빌려주면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 되고, 상대가 빌리길 거절하면 운반과 제안은 헛일이된다. 게다가 상대가 빌려가면 손망실의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는데, 이를 감수하고 실재 물건을 빌려준다니 얼마나 큰 비용을 치루는 일인가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하길 바란다는 이유만으로 무슨 대가도 없이 번거로운 노동을 감수하는 심리에는 혼자임을 견디지 못해 동일한 감정을 나누고 정보를 교류할 이를 갈구하는 사회적 존재의 애처롭게 빛나는 본성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음반 원리주의자로서 같은 음악의 즐거움을 누릴 친구들을 찾아 부지런히 음반을 돌려가며 들었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먼저 무서운 길로 빠져들었다. 진짜 좋은 소리로 음악을 즐기고 싶다며 십수만 원대의 이어폰을 사들인 것이다. 학생으로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지출이었다. 음반 몇 장에 달하는 돈을 쓰면서까지 소리를 업그레이드할 가치가 있었던 걸까? 많이 듣는 것과 잘 듣는 것의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다. 단순히 그때 친구의 투자가 옳았는지 따지는 것도 어렵다. 분명 새 이어폰이 얼마나 대단한지 빌려서 들어봤을 게 분명한데도 머릿속에 인상이 남아있지 않다. 그 친구가 이어폰이 금속제라서 CD플레이어와 같이 넣어두면 표면을 다 갈아버린다고 웃었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하지만 그때 들은 소리에 감탄한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번들 이어폰만 쓰는 것에 위축감을 느낀 것인지, 나도 대학 입학 이후로는 괜찮은 이어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다만 망설임없이 십수만 원을 투자할 배짱이나 돈은 없었던 터라 가성비로 유명한 모델들을 전전했다. 당시 흔히 그랬듯이 저음이 좋다는 이유로 젠하이저를 먼저 주력 기기로 삼았는데, 그 뒤로는 헤드폰을 처음 만들었다는 베이어다이나믹의 이어폰을 샀다. 빼어난 공간감이 마음에 든 나머지 단선이 될 때마다 사설 수리업체에 보내서 수리도 받았다. 두 번인가를 수리받은 이후로는 클립쉬의 인이어 이어폰을 사봤다. 모델명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 클립쉬의 이어폰은 7만 원 전후였을 텐데, 소리가 아주 명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써보는 인이어 타입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러나 유선 이어폰에게 단선은 역시 숙명인 듯, 이것도 단선이 되어 용산의 수입사까지 찾아가 수리를 받은 기억이 난다. 그럭저럭 괜찮은 이어폰을 사서 좋은 소리로 좋은 음악을 듣는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던 셈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값나가고 좋은 이어폰 찾아 쓰기를 거의 그만두고 말았다. 아무리 아껴봐야 결국은 선이 끊어진다는 사실에 상당히 넌더리가 난 탓이다. 이거야 원,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아닌가……. 대신에 ‘칼국수 케이블’이라고 해서 줄이 넓고 평평해서 잘 꼬이지도 않고 어지간해선 단선도 안되는 LG의 스마트폰 번들 이어폰인 ‘쿼드비트’를 애용하게 되었다. 튼튼할뿐더러 심지어 소리도 아주 맑고 청량했던 터라 더할 나위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쯤엔 슬슬 집밖에선 팟캐스트나 오디오북만 듣고 음악 듣기는 거의 그만뒀으므로 이용 패턴에도 부합했다. 이후로 스마트폰에서 이어폰 단자가 사라져서 유선 이어폰 살해자이자 무선 이어폰의 근본이라 불리는 에어팟을 주력 이어폰으로 쓰게 되었지만, 이보다 음질이 좋은 기기를 찾아나설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음악을 사랑하는가 소리를 사랑하는가 종종 생각해볼 일이다)


실외에서 음악을 거의 듣지 않게 된 데에는 실내에서 듣는 음악의 품질이 훨씬 낫다는 느낌을 받은 탓도 있었다. 먼 옛날부터 쓰던 삼성 오디오가 세 번인가 고장난 뒤로 그보다 출력도 음질도 훨씬 빼어난 파나소닉 오디오 컴포넌트를 집에 들였기 때문에 음악은 그 어떤 이어폰으로 듣는 것보다 집에서 오디오 스피커로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 생각을 정답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조용한 장소를 다니다 적절한 배경음을 발견하는 기쁨은 집에 모셔둔 스피커로는 구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나의 경우는 음악을 듣는 비중이 낮아진 데다 음악을 감상하기 좋은 장소를 다닐 일도 별로 없어서 이어폰을 통한 음악 감상의 가치가 낮아졌고, 반대로 풍성한 소리가 방을 채우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도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닌데…… 다행히도 대형 스피커 따위에 매료되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넘볼 걸 넘봐야지.


그런저런 방황을 거쳐서 요근래에는 그냥 뭘 들을 일이 있으면 그냥 아무것으로나 듣게 되었다. 스마트폰 스피커로도 듣고, 아이패드 스피커로도 듣는다. 내 손에 있는 카메라가 최고의 카메라라는 말이 있듯이 스피커도 바로 조작할 수 있는 게 최고다……라고 말하면 약간 과장이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라면 편이성을 더 우위에 두게 된 탓이다. 한때는 블루투스 기능이 없는 오디오로 스마트폰 음악을 송출하겠답시고 블루투스 신호를 받아 소리를 외부 스피커로 전달하는 기능이 있는 소형 블루투스 스피커를 오디오에 연결해보기도 했는데, 몇 번 쓰다가 귀찮음을 이길 길이 없어 그만두고 말았다. 게다가 요즘 주로 듣는 음악이 시티팝이나 피아노 독주, 기타 독주 같은 것들이라 그다지 풍성하지 않은 스피커로 들어도 레트로한 맛이랄까, 기술력의 혜택을 별로 누릴 수 없는 상황에서 임시변통으로 여유를 즐기는 듯한 맛이 나서 나름대로 즐기기에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몇달 전쯤에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버려진 삼성 사운드바를 주워온 탓이다. 사운드바답게 가로로 상당히 길어서 나는 이것을 거실 TV에 연결했는데, 일전에 형의 집에서 사운드바를 체험해보고 감탄했던 어머니는 제법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몇 년 전에 대형 스피커 두 개를 주워다 설치했을 때 무슨 짓거리냐고 살떨리는 맹비난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무척 다행이었다. 하기야 그때는 확실히 시커먼 스피커가 너무 거대해서 보기에 좋지 않긴 했다. 소리는 이렇게 좋다고 시연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에 비해 사운드바는 설치한 티가 별로 나지 않으면서도 중저음을 박력있게 뽑아주니, 기술의 발달이 과연 좋기는 하다.


내 방의 설비도 다소 달라졌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가성비 탁상 스피커의 제왕이라 불리는 페블2를 구해다 수선한 뒤 이 작은 스피커가 어찌 이렇게 강력한가 감탄하며 쓰고 있었는데, 삼성 사운드바를 주운 바로 다음주에 LG 사운드바를 줍고만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 것은 무슨 문제가 있겠거니 생각했으나…… 또 아무 이상도 없어서 책상에 어거지로 설치해버렸다. 덕분에 블루투스 스피커로도 쓸 수 있게 되어 ‘한동안’ 풍성한 음악으로 방을 채우는 즐거움을 다시 누리게 되었다.


왜 또 ‘한동안’인가 하면, 익숙해지고 나니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된 탓이 크다. 자꾸 새 음악을 듣는다면야 매번 감동할 수 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어지간히 익숙한 곡을 들릴 듯 말듯 틀지 않는 이상은 음악을 틀어놓고 다른 작업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손 쓰는 일에만 집중하면 되는 수리 작업 따위를 할 때는 음악 말고 다른 콘텐츠를 켜놓으니, 제아무리 좋은 스피커가 있어도 그다지 쓸모가 없는 처지가 된 셈이다.


결과적으로 맥북을 가동할 때 켜는 페블 스피커를 제외하면 내가 사용하는 음향 기기가 대부분 있으나마나한 상태다. 이래서야 돼지목에 진주 목걸이가 아닐까, 아무 기기나 대충 쓰고 살아도 만족할 만한 체질인데 과욕을 부린 게 아닐까, 죄다 처분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는 게 나은 일이 아닌가 싶은데…… 그래도 듣는 귀가 있긴 있는지 가끔 좋은 기기로 애정하던 음악을 틀어보면 새삼 또 감탄하게 된다. 익숙한 곡에서 몰랐던 소리가 보이는 순간의 즐거운 경이감이란 몇 번 느껴보면 다시는 포기하기 힘든 부분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부분이 바로 음향 기기 중독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매력이라 하니, 그렇게 보면 나도 가산을 탕진할 소질을 충분히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즐거움을 다 누리고 살 수야 없는 노릇. 몇 달 전에 아버지가 주워온 이어폰 두 개를 죽지 말라고 매달 충전하다 지쳐서 기부하고 마음이 약간 가벼워졌듯이, 나머지 음향 기기들도 하나씩 정리할 작정이다. 기기를 바꾸어가며 새로운 소리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즐거움은 포기하고, 아주 가끔 이상하게 마음이 동해서 틀어본 음악에서 느끼는 낯설음으로 대신해야겠다. 오래도록 듣지 않던 음악은 그만큼 나를 더 행복하게 해주겠지. 그릇을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한 발상인데, 이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선택일지 포기를 포장하는 영혼의 또다른 허영일지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리라.



*추신

10월에 가톨릭 평화방송 라디오 기후특집 '공동의 집, 지구'에 출연해서 낡은 물건 쓰기에 대해 이야기했죠. 링크에서 다시 듣기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되었습니다. 독자분들께 다시 감사드립니다.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 Daum 검색


구매와 응원이 저의 생존과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전 02화 파토난 중고 거래와 택배 대소동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