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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y 25. 2016

헌혈 전선 이상 없다


고등학교 때 강당에서 단체로 누워 헌혈한 것 이후로 처음으로 헌혈했다. 어째서 이다지도 헌혈에 무관심했는가 하면, 구멍이 훤히 보이는 바늘을 팔에 꽂는 게 아팠기 때문이다. 달리 헌혈을 안 할 이유는 없고 단순히 아픈 게 싫어서 안 한 셈인데, 이 사유가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정말 신체적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그 피가 정말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내 몸 아파서 뽑은 내 피 주머니를 만져볼 수도 없다. 400밀리나 되는 피를 뽑았으면 그게 얼마나 따뜻한지, 어떤 빛깔과 어떤 무게감을 갖고 있는지 알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보람조차 주지 않는다. 하기야 간호사(혈액원 근무자를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가 갓 뽑은 피 주머니를 ‘아주 신선한 A형 피에요’ 하고 안겨주는 것도 이상한 광경이고, 그따위 징그러운 것을 궁금해 하는 것도 나 정도일 테지만.


아무튼, 고등학교 때의 기억이라고는 지저분한 강당에 단체로 끌려가 너도나도 끔찍한 바늘을 꽂고 간이 침대에 누워 피를 뽑는 전쟁터 같은 광경이었고, 그것으로 얻은 보상은 고작 세면도구 세트와 과자, 그리고 친구들과의 낄낄거림, 수업시간 생략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다시 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진 않았는데… “매드 맥스”를 보고 헌혈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이미지가 좀 나아졌고, 결정적으로 전혈 헌혈을 하면 햄버거 세트 교환권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의욕이 샘솟아서 헌혈의집을 찾았다. 좋은 일도 하고 햄버거도 먹으면 꽤 괜찮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쿠폰을 받지 않고서야 롯데리아 햄버거 따위 절대 먹을 일이 없기도 하고. 


그리하여 조심스럽게 찾아간 헌혈의집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호감이 가는 구조였다. 카페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병원보다는 훨씬 나아서, 애들이 겁먹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 소아과의 성인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번호표를 뽑고, 컴퓨터로 전자문진표를 작성하고, 곧 실제 문진을 했다. 혈압을 재고 채혈기로 약지에 구멍을 뚫어 얇은 관에 채웠는데, 어찌나 피가 잘 나오는지 약지로 헌혈을 해도 되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간호사는 뽑은 피를 검사지에 뿌리더니 혈소판인지 뭔지 하는 수치들이 정상이라고 했다. 기껏 피를 뽑았는데 불가 판정이 나왔으면 몹시 우울했으리라. 


문진을 끝내고 기다릴 동안 뭘 좀 먹으라고 하기에 나는 그럭저럭 잘 꾸며진 바에서 커피와 과자를 집어다 먹고, 곧바로 피뽑는 자리에 누웠다. 왼팔에서 뽑을지 오른팔에서 뽑을지에 따라 자리가 달랐다. 나는 오른손 잡이니까 왼팔을 골랐다. 다행히 간이 침대는 아니었다. 대신 소파처럼 안락하고 튼튼해 보이면서도 다리 쪽이 높이 올라와 있는 침대였는데, 테이블이 달려서 노트북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나는 팔을 내밀고 자리에 누웠다. 간호사가 와서 “처음이라고 하셨죠?” 하고 묻기에 “아뇨, 아주 옛날에 한 번 했어요.” 라고 대답하자니 좀 부끄러웠다. 그러나 간호사는 그냥 예의상 물어봤다는 듯 별 신경쓰지 않고 “따끔할 거예요”하고 경고하며 바늘을...

찔러넣었다.


과거의 악몽 때문에 적잖이 긴장했는데, 바늘을 일부러 보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늙으면서 아픔에 무뎌진 탓인지 행을 바꿔가며 묘사할 정도로 아프진 않았다. 정말 따끔한 정도였고, 그 뒤로는 이물질이 박혀 있는 묘한 간지러움만이 남았다. 기껏해야 오 분에서 십 분 정도 걸린다는 설명을 듣고 나는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사은품 메뉴 셋 중에서 생각했던 대로 햄버거 세트를 골랐다. 간호사는 누워있는 내게 안내문과 헌혈증서, 그리고 교환권을 건넸다. 누워서 팔에 바늘을 꽂고 정말 감사하다는 문장을 읽고 있자니 전쟁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같은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하고 있는 왼손 운동은 “에반게리온”의 신지 같았지만. 


피를 뽑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트위터 따위를 뒤적였는데, 나는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왼손을 훨씬 많이 쓴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모처럼 피를 400밀리나 뽑고 있는 와중에 더 재미난 걸 할 수는 없었을까 싶었지만, 병실이 그러하듯이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피가 주머니에 차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그것도 시야 밖에 있었다. 그래서 별 재미없이 순식간에 피를 뽑았다. 핸드폰으로 마작이라도 쳤어야 하는 게 아닐까?


헌혈중의 헌혈은 역시 진짜 피를 뽑는 전혈이라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너무 짧고, 다시 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다. 


고등학교 때는 그랬던 기억이 없는데, 피를 뽑은 뒤에도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지혈대를 차고, 거기에 10분으로 설정된 귀여운 알람 시계를 붙이고 앉아서 쉬어야 했다. 피를 뽑고 갑자기 큰 운동을 하면 현기증이 올 수 있다는 모양이다. 나는 그걸 좀 느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앉아서 과자와 주스를 먹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좋아하는 과자는 아니었다. 나는 병원이나 미용실에 앉으면 평소에 좀처럼 볼 기회가 없는 잡지 뒤적이는 걸 아주 좋아하는데 잡지도 없었다. 사람들이 뽑은 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었는지 알려주는 책자라도 있으면 감개무량하게 읽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동기부여 측면에서 과자나 햄버거 교환권만큼이나 그런 보람을 안겨주는 것도 중요할 텐데, 아쉬운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맞은편에 앉은 고등학생 커플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정도로, 애 같지 않은 요즘 애들이 아니라 확실히 애들 같은 느낌이 드는 애들이었다. 폴로셔츠로 된 하복이 산뜻했는데, 여자애는 검은색 가디건을 덮고 있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실력이 엉망이라고 상대를 비난하고 깔깔 웃었는데, 패스트푸드점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모습을 헌혈의 집에서 보자니 신기했다. 기껏해야 두 번째 온 주제에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기특해 보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겠지만, 둘이 합쳐 두유 팩 넷에 달하는 피를 뽑고서 앉아있는 커플을 보며 그렇게 생각한 게 잘못은 아니겠지. 자진해서 피를 뽑고 싶어하는 커플은 공익광고에나 나올 만한 것이니까.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어릴 때 싱싱한 피를 좀 뽑아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왕이면 술도 담배도 하지 않던 시절에 뽑는게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커플은 나보다 먼저 나갔는데, 과자를 먹다가 보니 남자애가 학생증을 놔두고 갔기에 간호사에게 전해주었다. 간호사는 곧장 그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어린 커플이 놀러 가서 핸드폰이 울리는지도 모를 곳이라고는 피씨방이나 노래방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피를 800밀리나 뽑아놓고 사이좋게 가상현실에 접속하거나 미러볼 밑에서 키스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거야말로 사이버펑크적인 광경이 아닌가 싶었다. 


아무튼, 내가 찾아줄 것도 아니니까 다시 앉아서 기다렸는데, 어째 알람이 울리지 않아서 보니 시작을 눌러놓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말하니 5분만 더 있다 가라기에 알람 없이 오 분을 앉아있다가 가방을 챙겨서 나왔다. 간호사들은 그때 식사중이었는데, 누가 오든 가든 완벽하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기야 누가 와서 훔쳐갈만한 물건이라고 해봤자 피나 과자 뿐인데, 둘다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만한 물건은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헌혈전선에 복귀했는데,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다른 부수적인 이득이 없더라도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우대받는 경험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서는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라 마음에 들었다. 생각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대로 할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일본에는 헌혈 카페 같은 게 있어서 메이드 같은 간호사들이 아주 상냥하게 피를 뽑아준다는데, 한국도 헌혈 인구를 늘리려면 거리에서 피켓 들고 행인들에게 힘없이 말을 거는 것보다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게 좋지 않을지? 카페처럼 만들 수 없다면 안락한 침대에 편안히 누워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하면서 별로 아프지 않게 헌혈할 수 있고, 그렇게 받은 피가 사람들을 어떻게 구하고 있다는 홍보라도 확실히 하면 좋겠다. 그러면 나처럼 어릴 때의 막연한 공포 때문에 헌혈을 꺼리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을까?


아무튼 두 달 안에 파격적인 변화가 생길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으니, 다음에는 피뽑는 상황을 즐길만한 것들을 알아서 준비해볼 생각이다. 귀족적 뱀파이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을 들으며 마작을 쳐야지. 할 수만 있다면 레드와인도 마시고 싶지만, 그런 짓을 놔둘 것 같진 않고.


(2015.07.15)



-후기

그뒤로도 제법 꾸준히 헌혈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하는 수준이 아니라 즐긴다고 할까요. 편안히 누워서 과자와 음료수를 대접받으며 좋은 일을 하고 한 시간을 보낼 기회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카페를 찾을래야 찾을 수도 없어요. 

요즘은 한 시간으로 가장 시간이 긴 혈소판 혈장 헌혈에 빠져 있습니다. 영화 예매권도 받을 수 있고(중요), 책도 충분히 읽을 수 있거든요. 그리고 2주 후면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와우!

예전에 다른 글에서도 썼지만, 저는 비행기처럼 어쩔 수 없이 한 자리에 묶여서 시간 보내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기 때문에 헌혈은 성미에 참 잘 맞습니다. 기왕이면 천천히 두 시간쯤 하는 메뉴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면 영화라도 한 편 볼 텐데 말이죠. 

다만 불만이 있다면 딱 두 가지. 하나는 몇 번 해도 바늘에 찔리는 건 아프다는 것, 그리고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자리에 묶여서 한 손으로 할 거라고는 핸드폰일 게 뻔한데 무선 공유기 하나 개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한 처사가 아닌지? 아무튼 내일도 하러 가겠군요. 벌써부터 두근거립니다.


(201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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