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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17. 2024

삼묵티를 위한 묵념



삼묵티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티셔츠를 누구나 몇 번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삼색 배색 티셔츠로, 대체로 독일 국기 같은 가로 줄무늬 구조에서 색상만 비교적 덜 튀는 색으로 배색한 무늬를 띠고 있다. 더 폭넓게 해석해서 티셔츠 외에 피케셔츠든 뭐든 그 패턴은 다 삼묵티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색상도 무슨 색이든 배색이 네 가지쯤 들어가든 그 비슷한 느낌이면 다 삼묵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나는 이 별명을 근래에 들어 패션 유튜브 방송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사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 방송의 내용은 ‘유행 지난 물건 좀 그만 입으라’는 것이었고, 나는 이 삼묵티를 네 장쯤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심지어 그것들은 아무 생각 없이 티셔츠를 대충 주워입기는 뭣하다 싶을 때 ‘이만하면 평균 이상은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잘 입는 물건들이었다.


요컨대 나는 유행 지난 물건을 그런줄도 모르고 좋다고 내내 입고 다닌 청맹과니였던 셈이다. 물론 유행 지난 옷을 입는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돌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압수수색을 당하거나 신용도가 떨어지지도 않는다. 유행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은 그냥 입고 살면 된다. 그럼에도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은, 삼묵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조금만 검색해보니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삼묵티를 경멸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옛날에 학교 선생님이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람도 제법 있었고, 엄마가 사준 옷만 입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사람도 많았다. ‘광인의 천옷’이라는 별명이 붙은 남성용 개량한복에 대한 반응보다도 더 격렬하고 경멸적인 경향이 있었다. 개량한복을 입은 교사(주로 국어나 한문 교사)들에게 불합리한 체벌을 당한 사람들조차 그렇게 불쾌감을 드러내진 않았으니, 삼묵티에 대한 거부 반응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과격한 구석이 있었다.


(예로부터 삼색 조합은 평범하면서도 사랑받았다)


특정 패턴이 유행이 지났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사람이란 부정적 상황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더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법이라, 나는 시간을 들여 조사해봤다. 삼묵티는 한 브랜드에서 내놓기 시작한 것이 유행으로 번진 케이스로, 2012년 즈음을 전후하여 크게 흥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떤 패턴이 과도하게 인기를 얻으면 흔히 그렇게 되듯이 삼묵티도 들불처럼 번진 나머지 캠퍼스와 거리의 남자들 대다수가 삼색의 패턴을 입고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말았고, 아름답지 않은 패션의 대중화와 개성의 증발에 지친 사람들이 삼묵티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특히나 문제를 악화시킨 것은 삼묵티의 가로 삼색 패턴이라는 게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꾸밈 수치가 0보다는 높아 보이는 터라, 패션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변화를 추구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매료되기 쉬웠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유행이 어느 시점을 지나 멋쟁이들이 손을 털고 나간 이후로도 유행에 둔감한 이들이나 남들과 옷차림이 과도하게 유사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 이들은 삼묵티를 아무렇지 않게 즐기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삼묵티는 옷을 못 입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전락한 게 아닌가 싶다. ‘삼묵티가 보기 좋았던 적은 없다’는 증언도 있는 것으로 봐서 떠오르는 유행에 민감한 멋쟁이들부터 삼묵티를 입은 시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대중화가 어느 선을 넘으면 유행의 효용이 순식간에 곤두박질한다는 사실의 예시로 봐도 될 것 같다. 밈이 지상파 방송을 타면 그날로 유행이 끝났다고 봐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짚어봐도 이해하기 힘든 점은, 시대를 풍미했던 여러 물건들 중에서 삼묵티는 그렇게까지 질릴 정도로 별스러운 개성을 가진 모양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신세대의 아웃도어 활동이 늘면서 찾아온 고프코어룩보다도 밋밋하고 수수해서 별명이 있다는 것 자체도 놀라울 지경이다. 비슷하게 큼지막한 가로줄무늬가 인상적인 럭비 셔츠보다도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인데, 럭비 셔츠는 유행이 돌아왔을 뿐더러 유행이 아닐 때 입었다고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반면에 그보다 수수하고 기본형에 가까워 보이는 삼묵티는 열등 종자의 낙인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게 여간 이상하지 않다.


이 현상을 받아들일 방법은 역시, 위에 적었듯이 아무리 패션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도 쉽게 입을 만큼 수수해서 과도하게 유행했고, 꾸미기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 입은 모습도 자주 보이니 한층 더 보기 싫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인듯 싶다. 그러나 유행이라는 게 대개 합리적인 이유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이유를 깊이 따져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렇게나 흐르며 돌고 도는 와중에 어떤 것은 뒤쳐지는 것도 그냥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크롭티와 와이드핏 바지, 키링, 벨트 늘어뜨리기가 머나먼 과거의 유행이었다가 아주 태연히 돌아와서 사랑받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삼묵티는 베이직한 형상이거나 말거나 조롱당해 마땅한 물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개인의 호오나 과학적 이치로 돌아가지 않는 세태를 한탄하고 따져본들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대충 그런줄 알고 이미 있는 옷을 계속 입든가 말든가 해야할 텐데, 무슨 유행을 대단히 민감하게 신경 쓰고 산 것도 아니니 내 눈에 예쁘고 멀쩡한 내 옷 내가 입는 일을 남이야 뭐라하건 무슨 상관인가 생각하고 내 갈 길 가는 것이 편하고 좋은 방향이지 싶다가도 분명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다. 존경받는 사람은 되기 어렵더라도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게 내 삶의 기조 중 하나였는데, 작게나마 애착을 갖고 있던 물건이 이렇게까지 두루 욕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걸 사용하는 일이 사실 내 기조에 크게 어긋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탓이다. ‘내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그래도 보기 싫다는 사람이 널린 옷을 굳이 골라 입을 건 없지 않나’ 싶은 심정이라는 말이다. 남산 위의 소나무처럼 또렷한 철학과 신념으로 살아간다면 흔들릴 일이 없겠으나 나는 패션에 철학도 신념도 없으니 눈치를 살펴야지 어쩌겠는가?


그리하여 일단 요즘 멋쟁이 남자들은 대체 무슨 옷을 입나부터 알아보기로 하고 여기저기 뒤져봤다. 그런데 가만보니 잘나가는 옷이라고 해봤자 한때 키 작고 어벙해 보인다는 욕을 먹기 일쑤였던 무릎 길이 반바지와 민무늬 티셔츠 혹은 영어 지명이 들어간 티셔츠가 대부분이었다. 그 광경을 보니 오히려 삼묵티를 가끔 입어도 괜찮겠구나 싶었다. 새 유행을 좌우하는 것은 대체로 미의식이 아니라 ‘기존 질서의 탈피’라는 저항적 에너지고, 기존의 것을 벗어난답시고 들고 나오는 물건이 구닥다리든 한때 꼴불견 소리를 들은 적이 있든 직전의 유행만 아니면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강해진 탓이다.


그렇다면 삼묵티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진창을 뒹굴어도 저항적 에너지는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심지어 재작년쯤 유행한 것도 아니니 다시 입는 일에 절차적 정당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만큼 저속한 꼬락서니도 아니고, 애초에 옷을 입어도 되는가 안 되는가는 궁극적으로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라는 자기 만족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자극적으로 단정적인 말을 쏟아낼수록 돈을 버는 인플루언서가 정해주는 게 아니니, 유행이 지났네 어쩌네 하는 소리는 못 본 것으로 해도 좋을듯 싶다. 하기야 티셔츠도 심하면 10년 이상 입는 사람이 유행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건 에너지 낭비이리라. 그러니 삼묵티에 죽음을 언도하는 것은 미뤄두기로 한다. 언젠가 안 맞거나 손상되거나 내 미의식이 크게 변하기 전에는 버리지 않을 것이고, 나는 이 옷들을 단정하게 입을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다른 옷들 모두와 마찬가지로.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추신: 매거진 페이퍼 269호에 헌 신 얘기를 썼습니다.

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34056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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