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사스럽게도 방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에어컨을 보유하고 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차에 혼자 전용 냉방 기기를 갖고 있다는 건 아무래도 떳떳하지 않은 일 같은데, 집의 구조상 정상참작의 여지도 있긴 하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타워식 아파트에서 우리집은 좁아지는 구간 바로 밑이라 태양광을 그대로 받아 유달리 덥고, 그중에서도내 방은 확장 공사를 해서 단열이 시원치 않은 데다 바람도 잘 들지 않는 위치라 특히 더 덥기 때문이다. 거실보다 심하면 5도는 더 더운 내 방을 인간 거주에 적합하게 관리하려면 에어컨을 쓰는 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일 수밖에 없다.
에어컨을 들이기 전에는 다른 방법도 여럿 시험해봤다. 아이스팩을 몸 여기저기 대보기도 하고 찬물을 떠다 발을 담그기도 했으며, 창가에 선풍기를 하나 더 놓아서 바람을 강제로 순환시키기도 했다. 이중에서 가장 시원했던 것은 찬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었다. 온몸이 상쾌함에 젖어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연히 물이 미지근해지면 효과가 떨어졌고, 발을 넣고 빼는 과정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주변이 젖어드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아이스팩은 수건에 싸서 겨드랑이 밑에 끼우는 게 썩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금방 식어서 갈아끼우는 게 보통 노동이 아니었고, 응결된 물방울도 골칫거리였다. 창가에 선풍기를 올려놓는 건 그나마 손이 덜 가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었다. 덜 뜨거운 바깥 공기를 계속 공급하는 셈이니까. 그러나 바람을 직접 쐬지 않으면 실감이 별로 나지 않으니 이 역시 창가의 모습을 엉망으로 만들며 추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에어컨을 능가할 냉방 방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 방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학습된 대로 에어컨을 가동하면 평생 갚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빚을 지는 것처럼 이것을 아끼고 아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만 틀다가, 전력량 측정계로 실제 비용을 계산해본 다음에야 그 뿌리깊은 공포로부터 벗어나서 에어컨을 좀 편하게 틀 수 있게 되었다. 막연한 두려움은 과학적 측정과 정량화로 벗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로부터 3년 가량이 지났다. 매년 필터를 청소하고 열교환기 핀 사이에 낀 먼지도 긁어내며 에어컨을 쓰던 나는 올해 들어 문득 청소를 이렇게 계속 수박 겉핥기처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작년 여름에 물을 빼는 관이 막혀서 아버지가 수리할 때까지 그릇을 받쳐놓고 써야 했던 것을 떠올리면 다른 부분도 말끔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그리하여 손전등을 들고 에어컨 안쪽의 임펠러(팬)를 비춰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새로운 생태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야말로 날개의 모든 부분에 곰팡이가 점점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씻지 않은 손으로 만진 빵을 실온에 보관해서 곰팡이를 배양하고 현미경으로 확대한 모습을 보는 듯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이런 물건으로 바람을 쐬면서 전자담배를 피우고 살았다니, 내 핏속에 이미 헤모글로빈 대신 포자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에어컨을 가동한 다음에는 송풍으로 말려야 곰팡이가 안 생긴다기에 꼬박꼬박 그렇게 했는데도 이 지경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렵고 허망할 따름이었다.
실상을 안 이상 에어컨을 가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날은 하루하루 더워지니 세척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곰팡이의 유토피아가 얼마나 더 번성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만 신발과 스마트폰을 비롯해서 다양한 잡동사니를 직접 손봐온 나로서도 에어컨을 분해조립하는 것은 처음이라 아무래도 직접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럴 때는 어떡하면 좋을까? 당연하게도 나는 현대인답게 유튜브를 검색해서 세척 방법을 알아봤다. 짧고 간략하게 정리된 영상은 그런 강좌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이만하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허황된 자신감을 선사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대로 나사를 풀고 제자리를 최대한 기억해가며 하나의 통으로 만들어진 에어컨 뚜껑을 해체한 다음, 전원부와 모터를 차례로 제자리에서 뽑아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도무지 임펠러를 뽑아낼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어디가 어떻게 고정되었는지 모를 열 교환기까지 재주껏 뜯어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슬슬 이 무리한 시도를 그만두고 에어컨을 재조립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물건을 고칠 수 있든 없든 간에 일단 뜯어보는 건 습관적인 일이자 다소 학구적인 일이기도 했지만, 멈출 때를 모르고 진행하는 건 물건이 부서져도 될 때나 가능한 선택지다. 흔히 말하는 ‘조립은 분해의 역순’을 가슴속 깊이 새겨두고 있더라도 어딜 어떻게 뜯으면 되나 헤매다 보면 모든 부품의 위치와 분해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마는 탓이다.
그러나 이 골치 아픈 선택지에서 나는 ‘더 뜯기’를 택하고 말았다. 일단 오기가 생겨 어쩔 수 없었다. 본드로 붙인 것도 아니고 나사로 조립한 물건을 구조도 파악하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게 나로서는 좀 굴욕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에어컨 세척에 돈을 들였다는 사실을 들키면 뭐든 고치는 아버지에게 한심한 자식으로 보일 것 같아 편치 않기도 했고, 이 일을 최소한 한 번은 해봐야 전문가의 작업이 결코 비싼 게 아니라는 걸 체감할 수 있을 듯했다. 자신이 직접 겪는 손해나 고통만을 크게 느끼는 게 인간의 진화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에어컨 열 교환기 좌측의 나사를 풀고 틈을 벌린 다음 임펠러와 축을 고정하는 나사까지 틈새로 겨우 풀어낸 다음에야 임펠러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빛 아래 끄집어낸 임펠러는 새삼 가관이었다. 모든 부분에 낀 먼지와 곰팡이를 보자니 음료수를 다 먹고 버리는 빨대에 낀 벌레 시체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혀 몰랐다면 오히려 행복하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임펠러를 꺼내느라 고생했다는 생각은 잠시 후 깨끗이 사라지고 말았다. 진짜 고생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유튜브 영상에서는 세제와 물만 뿌리면 순식간에 깨끗해졌던 곰팡이가 사람을 가리는지 별짓을 다 해도 전혀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세제를 먹이고 가로로 솔질하든 세로로 솔질하든 강한 물줄기를 쏘든 곰팡이는 내 영혼에 새겨진 불안과 공포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집 화장실의 청소용 호스가 아무리 세봤자 유튜브 영상을 찍은 전문가가 사용하는 고압세척기에 비하면 매미 오줌발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뽑아온 물건을 이제와서 남에게 맡길 수도 없는 일. 나는 아예 곰팡이 제거에 흔히 쓰이는 락스를 동원할까 생각했다가, 잔류한 락스가 비산해서 폐로 들어가면 돌이키기 힘든 폐 손상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일단 시험해보니 다행히도 곰팡이가 플라스틱에 깊이 뿌리내린 건 아니었다. 손톱으로 긁으면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비좁은 공간을 청소할 때 쓰는 납작한 솔의 뒷부분을 써봤다. 하지만 이놈의 임펠러는 날개 하나하나가 은근히 곡선으로 되어 있어서 솔 뒷부분이 다 들어가지 않았다. 더 가늘거나 휘어질 정도로 부드러우면서 손톱처럼 단단하고 플라스틱보다는 무른 물건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런 물건을 집안에서 찾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 나는 결국 흔히 ‘매직 블럭’이라 불리는 멜라민 스펀지를 작게 잘라서 이리저리 돌려가며 곰팡이를 닦기 시작했다. 아주 구석진 곳을 제외하면 세척은 잘 되는 편이었다. 손잡이도 없고 물렁한 스펀지를 이리저리 돌리며 수백개나 되는 날개를 하나씩 닦기가 너무나 지치고 질리는 작업이었을 따름이다. 스펀지가 몇 칸을 닦지 못하고 뭉개져서 소모도 심했고, 시간도 오래 걸렸으며, 정신적인 마모도 상당했다. 변기에 걸터앉아 염주를 세듯 임펠러를 돌리고 닦자니 회의감이 구멍난 장갑 사이로 스미는 물처럼 마음을 척척하게 만들었다. 돈도 없고 적당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어중간한 재주로 일을 저질러 수습하기 벅찬 지경에 떨어진 게 내 인생의 축소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알아서 다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려고 시작한 일이기도 하니 목적에 맞는 고생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각오하지 못했다.
세척 작업은 두 시간 이상 걸렸다. 등허리가 굳어버리기 직전에 일어난 나는 부품들을 잘 말리고, 몇 시간 뒤에 재조립했다. 그 과정에서 순서를 헷갈린 탓에 깨진 두 군데 걸쇠가 깨졌지만 고생이라고 생각하진 않게 됐다. 무수한 날개를 미련한 방법으로 끝없이 닦으며 자신의 잘못 하나하나를 뉘우치던 작업에 비하면 아름답고 즐거운 마무리라고 해도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고생을 사서 해보고 자신의 관점을 점검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에어컨은 어느 정도 위생적이라고 할 만한 상태를 되찾았고, 나는 지독한 더위에서 긴급탈출할 방법을 다시 손에 넣었다. 그리고 뭐든 다 알아서 척척척 할 일은 아니라는 교훈도 새삼 되새기게 되었다. 전문가에게 맡겼다면 임펠러를 빠르게 청소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먼지만 좀 털고 말아야 했던 열 교환기까지 깨끗이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에어컨 청소비가 그리 싸진 않더라도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는 지출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자기 물건을 자기 손으로 관리하는 일은 분명 아름답지만 에어컨처럼 관리가 난해한 물건일 경우는 전문가에게 맡겨서 얻는 시간과 안전과 평화의 가치가 더 높다.
그나저나 에어컨을 분리하는 동안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분리 방법을 쉽게 파악하기 힘든 구조로 만들었을까 제조사를 원망하기도 했는데, 작업을 하고 보니 애초에 일반 소비자가 분해하길 바라지 않고 만든 것 같고, 그게 옳은 것 같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일반적인 청소 도구로 손댈만한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임펠러는 둘째치고 열교환기의 미세한 핀 사이사이는 위생상태를 확인하는 것조차 어렵다. 그러니 에어컨 제조사는 내부 오염 상태를 감지하는 시스템이라도 만들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걸 기대하느니 그냥 매년 전문가의 세척을 받는 게 훨씬 낫겠지?
*추신
테일크루의 최애 공모전에서 단편 SF소설 ‘아이의 최애'로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