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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pr 03. 2024

편식이 나를 울게 하리라


초등학교 시절에 먹는 일로 마음고생을 했다. 당시 학교에선 ‘잔반 없애기’라는 해괴한 운동을 벌이고 있었고, 나는 싫어하는 음식은 도통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기괴한 증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적 선호에 불과한 편식이 육체에도 영향을 준 셈인데, 고작 밥이 넘어가지 않는 증상으로 특별한 진단을 받아서 교사의 양해를 구할 일은 또 아니었으므로, 혹은 그럴 수도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상상도 해본 적이 없으므로, 나는 점심 시간 내내 먹기 싫은 반찬들을 질겅이며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친구들이 죄다 30분 만에 식사를 마치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갈 동안 나는 나물 따위가 입안에서 그 음식 본연의 성질을 잃고 죽이 될 때까지 씹어 억지로 목으로 넘겨야 했던 것이다. 덕분에 되새김질 하냐는 소리를 천 번은 들은 것 같다.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오후의 맑은 햇살이 흘러드는 교실에 앉아 고독과 고통이라는 것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감정의 흐름에 빠진 채 밥을 먹던 광경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먹고 보란듯이 매번 토해버리는 게 나았던 게 아닐까 싶은데, 어릴 때는 그렇게 마음이 모질지 못했던 터라 실제로 잘못 먹으면 구역질이 났던 미역 정도만 친구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대신 먹어달라고 하거나, 우유팩에 조금씩 넣어서 버리거나, 입안에 숨겨서 화장실에 뱉었다. 대리 식사 청부와 음식물 쓰레기 밀반출이라니, 무엇을 위해 그런 희생을 치러야 했던 것일까? 음식물 쓰레기를 애들 뱃속에 버리면 돈이 굳겠다는 누군가의 발상 때문에?


아무튼 잔반이 나오지 않게 음식을 모조리 먹이자는 발상은 군대에서도 하지 않는 정신나간 짓이었다. 영양학적으로 계산된 식단을 남김 없이 다 먹인다는 건 영양학적으로나 합리적이지, 정신건강적 차원에선 그냥 고문일 따름이다. 인간이 빵만으로 살 수 없듯이 아이는 필수영양소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균형은 일단 미뤄두고 먹고 싶은 것을 잘 먹는 게 성장의 지름길이 아닐까? 아마 나도 그때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잘 먹었다면 이렇게 작은 키로 열등 의식을 감추려 애쓰며 살 일도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눈곱만큼도 과학적이지 않고 근거라곤 원한밖에 없는 생각이지만, 어쩌겠는가. 어릴 때 식고문을 당한 사람이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생각과 자비로운 심리 상태에 사로잡힐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다행히 초등학교 이후로 급식으로 고통받는 일은 딱히 없었다. 잔반을 버리지 말라는 인권 무시 아동 학대 제도에서 벗어난 덕이 크겠으나, 음식이 넘어가지 않아서 고통받는 체질도 사라진 덕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성장기를 거치며 입맛이 달라졌으리라 추측한다. 아이들이 쓴 음식을 어른보다 더 싫어하는 이유는 쓴맛을 더 잘 느끼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나도 그런 변화를 크게 겪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점심 시간은 즐거운 사교와 여가와 취미의 시간으로 변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실토할 것도 없는데 붙잡혀 고문당하는 수용소의 나날 같았던 과거와 달리.


그러나 성인이 된 이후로도 별로 나아지지 않은 게 있었으니, 다름아닌 생선에 대한 불호였다. 나는 생선, 그중에서 특히 생선구이는 좋아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생선구이가 맛이 없어서는 아니다. 생선구이는 그럭저럭 맛있는 음식이고,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그럭저럭 먹을 자신이 있다. 실제로 식단의 선택권이 없던 학생 시절과 훈련소 시절에는 생선구이가 나오면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섭취했다. 달리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는 시간에 허기와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졸았다간 처벌당할 수 있는 시기였으니 영양소라면 뱃속에 처넣는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내가 생선구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생선구이만은 택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가시’다. 삼치처럼 가시가 크고 굵직해서 적출이 간단하거나 꽁치처럼 그냥 먹을 만하다면 괜찮지만, 조기나 병어처럼 작고 촘촘하며 여기저기 많다면 손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름대로 손재주가 좋다는 소리를 들으며 잡다한 물건을 취미삼아 고치고 있으면서도 생선구이에서 가시를 적출하는 작업은 도통 능숙해지지 않는다. 맛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심혈을 기울여 배워볼 생각도 없는 탓이 아닌가 싶다.


고작 가시 때문에 귀한 생선을 안 먹냐는 비난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변명을 더해보자면, 어릴 때 나는 목에 가시가 걸려 오랫동안 불쾌하게 여기며 켁켁댄 경험이 몇 번이나 있다. 한참 시간이 지나며 이물감도 사라진 것으로 미루어볼 때 가시가 목에 걸린 게 아니라 식도를 쓸고 지나간 듯하지만, 그때의 불쾌감과 불안감을 떠올리면 적출해야 하는 가시가 숨은 음식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심지어 생선은 누가 바르든 가시가 나오기 마련이었는데, 입이나 목에서 가시를 감지하고 이를 불평할 때마다 부모님은 옆에서 가시도 꼭꼭 씹어먹으라는둥 밥을 꿀떡 삼키라는둥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근성론 비슷한 조언만 한 터라, 결국 나는 어릴 때부터 ‘가시를 발라야 하는 생선은 누가 바르더라도 가시가 숨어있기 마련이고, 내가 가시로 고생할 때 도와줄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모도 예수도 부처도 생선 가시로부터 나를 완전히 지켜줄 순 없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생선 가시로부터 나를 지킬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고, 내가 나를 완전히 지킬 방법은 가시가 숨은 생선을 먹지 않는 것뿐이다.


물론, 세상에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발상이 있다. ‘No Pain, No Gain’이라는 말도 유명하고, 서브컬처에서는 ‘등가교환: 뭔가를 얻으려면 대등한 뭔가를 희생해야 한다’라는 말이 격언처럼 돌아다닌다. 이를 근거로 들어 생선구이를 피하는 식성을 비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때마다 나는 그 근거를 반대로 생각하게 된다. 얻을 게 있어야 위험을 무릅쓸 게 아닌가? 보상이 적은데 왜 위험을 감수하고 노력을 지불해야 하느냔 말이다. 어딜 봐도 불공정하고 부당한 거래인 셈인데, 이런 식으로 말해봐야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진 않기 마련이다. ‘반찬 투정을 합리화하느라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얼간이’ 정도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 인간은 어떤 행위의 보상에 비해 손해가 크다면 그 행위를 꺼리기 마련인데, 음식 섭취라는 행위의 보상은 미각에 의해 결정되며, 미각은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요컨대 똑같은 음식이라도 누군가는 아주 맛있게 먹고, 다른 누군가는 극도로 혐오할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지극히 단순한 상식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생선구이를 먹느냐 마느냐 하는 주제를 다루게 되면 이 기본 전제를 완전히 망각하게 되는 듯하다. ‘난 참외 맛있는지 모르겠더라’ 하면 ‘아, 그래?’하고 넘어가는데, ‘난 생선구이 안 좋아해’라고 하면 ‘유치하고 게을러 빠진 새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아마도 ‘난 비빔밥 비비기 귀찮아서 안 좋아해’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대가만 지불하면 그에 비해 큰 보상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큰 보상을 따라 다니기 마련이라 정말 ‘맛’이라는 보상이 크면 옆에서 말려도 가혹한 비용이라도 지불해가며 알아서 먹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감각과 보상의 손익표를 굳이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고 남을 조롱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한국에서도 찾기 드물다는 삭힌 홍어 애호가지만 그 맛있는 별미를 왜 안 먹느냐며 남들을 유아기 입맛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업신여기지 않는다. 각자의 미각이 다르고 보상이 다르다는 걸 알고, 음식으로 고통받은 기억이 영혼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잘 삭힌 홍어는 나 먹을 것조차 보기 힘들기도 하고. 그러니 생선구이 애호가들도 자기 먹을 것 알아서 자기들끼리 잘 먹길 바랄 따름이다.


(골고루 먹는 것은 미덕이지만 미덕을 행하지 않는다고 악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이 자세가 꼭 삶을 고통 없고 즐겁게 유지해주는 것만도 아니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여럿이 다니면 메뉴 정하는 것도 일이라 굳이 다같이 먹을 것 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갈라지자는 방침을 세우고 여행을 갔더니, 일행이 죄다 특산품 생선구이를 먹겠다고 떠나버리는 통에 나만 홀로 남게 된 것이다. 생선구이가 이렇게까지 인기 있는 음식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결국 나는 여기저기 헤매다 유명하다는 해산물 간장 절임 전문점에 들어가 소라장을 시켜  먹게 되었는데…… 나온 것을 보니 이곳은 여럿이 와서 모듬 장 세트 따위를 더 시켜 먹는 걸 전제로 돌아가는 집이라 1인 메뉴의 양이 그렇게 적을 수가 없었다. 결국 두어 달 전에 상인을 호위하고 받은 돈이 다 떨어져가는 가난뱅이 검객처럼 간장계란밥 한 공기와 간장에 절인 소라 몇 점, 그리고 물 두 컵과 항우울제를 먹어 허기를 겨우 달래고, 간판이 기어다니도록 심한 바람이 부는 관광지를 서성였다.


옷깃을 여미우고 애꿎은 해산물에 대한 증오로 가슴속을 덥히며 내가 한 생각은 여러가지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렬한 것은 ‘새로운 집단에서 생선구이를 먹으러 가자는 얘기가 나오면 알레르기가 있어서 못 먹는다고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미친 소리 같지만, 사람들은 손익을 계산하는 사람과 호오를 따지는 사람을 싫어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유를 제한당한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글을 시작하며 먹기 싫은 건 삼키질 못해서 점심 시간 내내 고역이었다는 일화부터 소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하는 사실에는 변화가 없는데, 먹고 싶은데 못 먹는다고 하면 가련하고 딱한 자가 되고 먹을 수는 있으나 먹기 싫다고 하면 빈축을 사고 다수의 눈밖에 난다. 그러니 솔직하고 추한 자가 되는 것보다는 거짓으로 포용받는 편이 낫다는 게 나의 혐오스러운 타산적 결론이다.


그러나 이따위 결론을 궁리할 필요가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도 생선구이의 살을 재주 좋게 발라내고 가시 한두개 쯤은 꿀떡꿀떡 삼켜먹으며 빼어난 맛에 감탄하고 배도 불릴 수 있었다면 쓸모없는 고뇌도 부끄러운 결심도 무관한 다수에 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아마 혼자서 오만가지 후회를 하며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간을 때울 필요도, 이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테고, 심지어 생선구이 안 좋아한다는 사람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보다 편안한 인생을 즐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돌을 던지는 쪽에 선다 할지라도 다수에 속하거나 다수에 속하려는 의지를 가진 척을 하는 편이 삶을 편리하게 만든다는 비굴한 가르침을 되새기며, 내가 먹지 않는 음식에 대한 고통스러운 상념을 멈추고자 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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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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