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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27. 2024

영원치 못한 가짜 가죽과 신발의 지옥 3

죽은 채로 걷는 부츠



길지 않은 시일 내에 합성 피혁과 두 번의 전쟁을 치렀으니 한동안은 잠잠하길 기대했다. 아무리 내가 낡은 물건만 잔뜩 갖고 있다지만 설마 또 삭아버릴 물건이 있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왠 걸, 사소한 사고로 또다시 합피 신발과 싸울 수밖에 없게 되었다.


표현을 사고라고 과장해서 쓰긴 했으나, 그건 사실 사고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옆에서 걸어가던 후배와 걸음이 얽혀 후배의 부츠 뒷굽을 밟았을 뿐이다. 일상 속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돌아서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밟힌 부츠 밑창이 쩍 벌어져 간신히 걸을 수만 있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단 한 번도 겪어보거나 들어보지 못한 사태라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이미 벌어진 것을 어쩌겠는가. 어떤 사고를 당했을 때, 그것이 큰 사고든 작은 사고든 빠르게 받아들이고 원인과 대처 방안을 알아보는 것이 상책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살펴보니 부츠는 합성 피혁으로 만든 갑피에 밑창을 접착해서 모양만 낸 경량형 부츠로, 중창 없이 통으로 된 밑창 안쪽은 갈빗대 모양으로 구멍들이 나 있었다. 중창이 따로 없는 밑창이란 경량화와 완충을 위해 대개 이런 모양이니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이 구조 때문에 신발 바닥과 밑창의 접착면이 좁은 것은 물론이고, 밑창의 테두리가 부착력이 약해빠진 합피의 겉면에 부착되어 힘을 받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반대편 신발도 다시 보니 발꿈치쪽이 약간 벌어져 있었다. 이 신발도 자연스럽게 폴리우레탄의 수명이 다해서 겉면이 이탈하는 와중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발의 손상이 전적으로 내 잘못은 아니겠으나, 확인사살을 한 건 맞으니 책임지고 고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렴한 물건에는 이유가 있다)


이 부츠의 수선 과정도 네파 등산화의 수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더 어려웠다. 접착면에 본드를 발라야 하는데 밑창을 당길 때마다 갑피가 찢어졌으므로 본드를 바를 수 있을 정도로만 벌리기가 힘들었다. 이런 경우는 본드가 덜 달라붙는 플라스틱 막대 따위로 벌려놓고 작업하는 것 말고 다른 요령이 없어서, 나는 어렵게 줄질을 하고 본드를 바른 뒤 압착했다.


(표면이 약해서 접히면 찢어질까 걱정이었다)

재질이 재질이라 추가 작업이 필요한 부분도 물론 있었다. 내피도 일부 벗겨지고 코팅도 약간 찢어져 떨어지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가죽이라면 이렇게 되어도 추하지 않고 오히려 멋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기도 하는데, 합성 피혁은 코팅 안쪽의 필름이나 부직포 따위 층이 드러나며 주변과 이질감이 심해져 누더기꼴이 되기 쉽다. 태생적으로 잘난 사람은 늙어도 멋지게 늙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 추해지는 것과 비슷하다면 너무 유전자 결정론적 패배주의일까…….


아무튼 이 부츠도 노화의 초입에 들어선 참이었다. 놔두면 여기저기가 벗겨지고 떨어져서 손이 가지 않게 된 끝에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게 비싼 집세를 갉아먹는 공간 파괴자로 버티고 있다가, 새 물건을 놓을 자리가 필요해지면 비로소 헌옷 수거함에 들어갈 운명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멀쩡한 상태로 버려지는 헌 신발이 대단히 많으므로, 높은 확률로 저개발 국가에 수출되어 아무곳에나 내던져지거나, 쓰레기장에서 유독 가스를 뿜으며 소각되거나, 바다 곳곳에 만들어졌다는 쓰레기 섬에 흘러갈 것이다. 대부분의 의류와 신발이 그런 식으로 생애를 마감하긴 하지만 합피 제품은 그 시간이 훨씬 빠르게 다가온다. 재활용도 새활용도 거의 불가능하다. 다들 낡은 것은 참아도 추한 것은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껏 밑창을 살려놨는데 보기 싫어졌다는 이유로 순식간에 버려지게 놔둘 수도 없고, 고쳐놨으니 모양이 어찌되든 꾹 참고 쓰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모양도 어느 정도 손봐야 했다. 나는 코팅이 벗겨진 부분 중에서 수습이 가능한 부분은 접착제로 다시 붙이고, 코팅 밑의 직물에서 풀려나온 올들을 잘라냈다. 합피에서 올이 풀리는 꼴은 나도 처음 보는 증상이었는데, 어지간히 싼 재료를 썼구나 싶었다. 패션에만 중점을 둔 제품은 같은 모양으로 더 싸게 만들어야 잘 팔릴 테니 이런 물건이 나온 연유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 역시 만들어지지 않는 편이 나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팅이 벗겨지는 것도 모자라서 올이 풀리는 합피에 가죽이라는 단어를 쓰는 건 짚신을 베지터블 파이버 비건 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그리고 양심이 있으면 최소한 단면 마감은 하고 팔란 말이다.


(코팅 내부 직물에서 풀려나온 실. 신발의 수명이고 뭐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만든 셈이다)


가죽 코팅제로 단면을 칠하면 올풀림을 방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단면 이외의 부분에 코팅제가 묻으면 보기 흉할 테고, 도색에 흔히 쓰는 마스킹 테이프를 붙이면 뗄 때 코팅이 뜯어질 염려가 있어 작업이 대단히 까다로울 게 분명했다. 심지어 해본 적도 없는 터라 작업을 포기했다. 혹떼려다 혹을 붙이고 싶진 않았다. 벗겨진 내피도 마음에 걸렸지만, 사람의 발은 뜻밖에도 매우 민감해서 1밀리만 거슬려도 불편하게 여기기 마련인터라 익숙한 대로 신도록 놔두었다. 추가로 지우지 못한 접착제 자국은 마커로 눈속임하고, 가죽 크림으로 광을 내어 작업을 마무리했다. 전달한 뒤에 다시 새것이 된 것 같다는 평을 들었으니 본의 아니게 받은 첫 수선 외주는 성공적으로 끝난 듯하다.


(겨우 살려놨으니 두 해는 버티길 바랄 따름이다)


이 세 번의 작업을 거치는 동안 쇼핑몰에서 수선용 재료와 가죽 제품들을 여럿 뒤적였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합성피혁이라는 소재에 이를 가는 것이 합당하긴 하지만, 과연 합성피혁이 사라지는 것은 또 옳은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싸고 예쁘다 싶어 상세 페이지에 들어가서 살펴본 물건은 모조리 합피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멋을 내려는 사람들은 뭘 사야 한단 말인가. 이들에게 합피 제품 여러 개 살 돈을 모아서 진짜 가죽 제품 하나만 사라고 하는 건 올바른 일이라 할 수 있나? 그리고 진짜 가죽도 가공 과정에서 공해가 일어날 뿐더러 윤리적인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기를 얻기 위해 죽여야 했던 소에서 나온 가죽을 친환경적 가공법으로 가공해서 만들었다 해도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그리고 기후 위기에 발가락 하나쯤은 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어도 나는 진짜 가죽 역시 소비하는 마음이 그렇게 개운치 않다.


진지하게 논의를 하자면 끝이 없는 데다, 나도 한점 부끄럼없이 친환경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라 글은 여기서 마치려 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는 물건을 잘 쓰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이고 좋은 일이고, 그 방편이 수선과 중고 제품 쓰기라는 점이다. 그런고로 간편한 수선용품이 더 널리 보급되면 좋겠는데, 낡은 물건 쓰는 모습이 칭송의 대상은 될지언정 욕망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망이 어둡다. 방탄소년단이나 테일러 스위프트가 자가수선에 빠져서 수선 챌린지를 유행시키기만을 바라야 하나…….


(끝)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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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ExY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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