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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13. 2024

영원치 못한 가짜 가죽과 신발의 지옥 1

영원할 줄 알았던 10년 전의 등산화



식물성 가죽에 대해 들어보셨는지? 생산 과정에서 동물의 희생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을 뿐더러 가공 과정에서도 환경을 심하게 오염시키는 진짜 가죽을 대체할 소재로 각광받고 있는 이 소재는 사과나 버섯, 선인장, 파인애플, 포도 등의 단백질이나 섬유질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광고에 따르면 진짜 가죽보다 친환경적일 뿐더러 가볍고 상처도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광고 내용이고 소재마다 특성이 다를 테니 무조건적으로 좋을 거라고 생각할 순 없지만, 아무튼 환경 문제에 그럭저럭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근래에는 식물성 가죽으로 만든 운동화를 한 켤레 살 뻔했다.


살 뻔하고 사지는 않은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일단 첫째로 이미 신발이 많은데 굳이 신발을 더 산다는 게 친환경과는 거리가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환경을 위해 텀블러와 에코백을 더 사는 게 어리석은 일인 것처럼, 아무리 친환경적인 물건이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을 사는 것보다는 안 사는 게 낫다.


두 번째 이유는 적당한 가격의 식물성 가죽 신발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비건 가죽이라고 검색하고 괜찮아 보이는 걸 눌러보면 모조리 다 합성 가죽 제품이었다. 동물 가죽을 쓴 게 아니니 절대 비건이 아니라곤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화딱지 나는 일이었다. ‘레자’로 불리던 게 시류를 타고 이름만 친환경적인 척 바꿔달고 나타난 게 아닌가. 검색을 더 잘 하면 식물 가죽 신발도 나오긴 했으나 선뜻 살 가격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식물 가죽 제품 쓰기를 아예 포기하고 말았는데, 이후로도 가죽 재킷이나 부츠, 등산화 따위를 찾아봤다가 설명 저 아래 합성 피혁이라고 쓰인 것을 찾아내는 일이 반복되었다.


심지어 얼렁뚱땅 좋은 소재인 양 말장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가방이 제법 저렴하며 멋스러워 설명을 보니 사피아노 비건 레더라고 이미지로 표시되어 있었다. 사피아노는 가죽에 찍은 자글자글한 그물 패턴이라 원료와는 관계가 없다. 그 옆의 텍스트 설명은 Polyvinyl Chloride였다. 분명 합성 피혁은 맞는데 좋은 소재일까? 검색해보니 다름아닌 PVC였다.  사기는 아니지만 흔히 쓰는 약자로 표기하면 고급감이 없으니 굳이 풀어 쓴 것이리라. 이렇게 ‘합피’에 대한 원한은 하루하루 커져만 갔다.


(합피 표면이 떨어져나간 접착면)

그러다 작년 가을에 등산화를 신고 북한산 정상에 올라섰을 때, 이놈의 합피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일이 터졌다. 신발끈을 확인하면서 보니 밑창의 앞부분이 조금씩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표면에 부착된 장식들이 다 떨어져나가서 거지꼴이 되었을 때 밑창도 의심했어야 하는데 실수였다. 생산된지 10년 넘은 물건을 처박아놓고 몇 번 신지도 않았는데 이꼴이 난 이유는 일단 접착제에 내구 연한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파의 이 등산화는 거기에 덧붙여 표면 소재가 합피라는 문제도 있었다. 합성피혁이라는 소재는 대개 부직포에 폴리우레탄 코팅을 입힌 물건이고 폴리우레탄은 공기중의 수분과 반응하여 분해된다. 따라서 합피를 쓴 이상 밑창을 제아무리 강력한 접착제로 붙인들 코팅과 함께 떨어지는 게 필연적인 숙명인 셈이다. 합피는 분명 싸고 가볍고 관리가 간단하다는 이점이 있지만 안전을 중요시해야 하는 등산화 따위 물건에는 쓰지 않는 게 맞을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접착부위는 코팅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닐까?



다행히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나는 무사히 귀가해서 신발을 네파에 맡겼다. 그러나 한참 기다려 받은 소식은 수리 불가 판정이었다. 전화해보니 갑피까지 노후되어 떨어진 것이라 밑창을 다시 붙이려면 추가 공정이 필요하고, 이 비용은 만족스럽지 않을 거라는 이유였다. 당연히 기분은 상했지만 더 따져 묻진 못했다. 보통 등산화는 5년쯤 신어서 밑창이 마모되면 아예 폐기하거나 밑창을 교체하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질 텐데 나는 10년이나 방치해서 신발을 새것인 채로 내구연한을 한참 넘겨버렸기 때문이다. 내구연한이 따로 명시된 것은 아니지만, 신발과 접착제와 합피의 생로병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으로서 무슨 요구를 더하기는 어려웠다.


(10여년만에 길게 신은 뒤엔 장식이 다 터졌다)

결국 나는 공식 서비스 대신 사설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소문이 자자한 제화점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전화로 받은 상담 결과도 좋진 않았다. 노후로 밑창이 떨어진 경우엔 그대로 다시 붙여도 오래 가지 않는 법이라 결국은 새 밑창으로 바꾸느라 이중지출을 하기 마련이니 밑창 갈이를 하는게 좋다는 것이었다. 수긍할 만한 답이었고 수리비도 심각하진 않았으나, 나는 선뜻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과거에 네파에서 야심차게 내놓았던 Xyclone 밑창은 준수한 성능을 보여주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모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밑창을 홀라당 새것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뭐 어쩌겠는가, 알아서 해야지. 나는 일단 산에서 밑창이 또 떨어져도 묶어서 응급조치할 수 있도록 신발끈을 배낭에 챙겨넣은 다음 작업을 진행했다. 과정은 단순했다. 접착면을 줄로 좀 갈아낸 다음 다이소에서 산 V-tech 신발 접착제를 양쪽에 도포하고 한나절 말린 뒤에 헤어드라이어로 가열하고 접착하고 고무 띠로 단단히 조여서 나흘 쯤 정착시켰을 뿐이다.


따라할 사람이 혹시 있을지 몰라 부연 설명을 하자면, 접착면을 줄로 갈아야 접착력이 떨어진 채 대충 붙어있는 본드와 합피 조각을 제거하고 표면을 거칠게 만들어 접착 면적을 넓힐 수 있다. 접착제를 오랜 시간 말리는 이유는 접착제를 녹여놓은 용제를 증발시키고 접착 역할을 하는 성분만 남겨야 하기 때문이다. 건조된 접착제를 가열하면 굳어진 접착제가 약간 녹아서 위아래가 한덩이로 더 잘 붙게 된다. 이 과정에서 다른 건 넘기더라도 건조만은 해야 한다. 건조하지 않고 딱풀로 종이 붙이듯 접착하면 용제가 날아가기 힘들어져 접착력이 저하되고, 일상 속에서 아무데나 쓰는 순간접착제를 쓰면 유연성이 없어 움직임을 버티지 못한다. 앉은 자리에서 결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찮은 작업인 셈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직접 작업한 네파의 등산화는 전문 업체들이 작업을 거부했음에도 성공적으로 접착되었고, 이후로 도합 43킬로미터를 걷고도 별 문제 없이 붙어있다. 전문가들이 사용한다는 접착제를 살 수 없어서 일반인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을 쓴 터라 불안했는데, 이만하면 합격점을 줘도 괜찮을 것 같다. 물론 이렇게 잘난듯이 써놓자마자 바로 다음 산행에 밑창이 도로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지우지 못해서 신발끈을 상비하고 다니지만, 그때는 또 다시 작업하면 되지 않겠는가. 산제물을 바쳐서 망자의 혼을 육신에 매어두는 의식을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니, 합피를 주 소재로 택해서 가벼운 것 하나는 확실히 장점인 하이컷 등산화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에 그 정도 노력은 지불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곤 해도 진짜 가죽이었다면 이 고생을 안 하고 더 잘 신었겠지만…….


(계속)

(쓸모없는 장식을 제거하고 접착에 성공한 모습)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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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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