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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06. 2024

매일 아침 얼굴과 칼날의 댄스



참으로 남자답게도 매일 아침 면도를 하고 있다. 써놓고 보니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니군. 하지만 이 짓도 오래도록 하다 보면 가끔 무슨 짓인가 싶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수염을 매일 깎아서 얻는 이득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닥 청소처럼 건강상 이득을 누리는 부분이 없진 않겠으나, 내 좁은 상식으로 생각해 보건대 어지간히 수염이 길어서 새로운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지경이 아니라면 위생 상태는 세안 만으로 적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요컨대 빈번한 면도로 얻을 수 있는 확고한 이점은 미관상 깔끔하다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면도를 매일 하는 것도 여러모로 낭비라는 생각에 앞으로는 사흘에 한 번만 하기로 했다…… 라고 하면 아마도 징글징글하게 추접스러운 인간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하겠지. 물론 그런 결심도 하지 못했거니와 그럴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나도 일단은 체면이라는 게 있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고, 남 앞을 지날 때마다 마스크를 쓸 수는 없으니까 면도 정도는 매일 할 수밖에 없다. 숱이 많아서 하루이틀만에 수염이 그럴듯하게 기른 모습이 된다면야 깎지 않고 버틸 생각도 없지 않으나, 나는 사흘쯤 방치해봐도 최소한의 얼굴 관리를 포기한 꼬락서니가 될 뿐이었고, ‘수염이 자라 있는 텁텁한 느낌’을 견디기도 힘들었다. 수염이 자란 상태로 누릴 수 있는 이점이라곤 턱으로 손등을 긁기 편하다는 것 정도였다. 요컨대 내게 면도는 대체로 이득을 누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손해를 피하려고 하는 행위인 셈이다.


면도기는 오래도록 날면도기만을 고집했다. 롤모델이 될 가족들 모두 괜찮은 전기 면도기를 보유하지 않았고, 주변 친구들도 어느 전기 면도기를 썼더니 기가 막히게 좋더라는 식의 정보를 주지 않았으므로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선택지가 있는 줄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게임 얘기는 그렇게 신나게 떠들고 사는 족속들이 면도에 관해선 아무 정보도 주고받지 않다니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인데, 사실 나도 학생 때 면도를 언제 어떻게 했고 어떤 점이 불편했는지 아무 기억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자면 면도 따위는 양치질보다 무심하게 해치우고 넘어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하기야 새벽같이 일어나서 씻고 먹고 나가기도 바쁜데 그까짓 면도가 뭔 대수란 말인가.


그러던 것이 몇 년인가 전에 아버지가 멀쩡한 파나소닉 왕복형 전기 면도기를 주워다 쓰라고 닦아줘서, 정말이지 본의 아니게 전기 면도기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첫 소감은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그동안 아무 근거도 없이 전기 면도기는 믿을만한 물건이 아니고 광고는 모조리 사기이며 날면도기야말로 제대로 된 면도기라고 생각해왔는데, 발전된 기술의 총아는 큰 무리 없이 수염을 깨끗이 깎아주었다.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상처가 별로 나지 않으며, 면도 크림이나 비누거품을 안 발라도 된다는 점은 특히 매력적이었다. 오래도록 깔끔함이 유지되는 날면도기와 달리 면도를 한지 10시간쯤 지나면 슬슬 수염자국이 거칠해진다는 점은 단점이지만, 그 시간 한도 내에선 편이성과 맞바꿀 수 있는 수준의 사소한 불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약속이 없는 날은 전기 면도기만 쓰는 전기 면도기파로 소속을 바꾸게 되었다.


그러다 오래지 않아서 가벼운 사고를 쳤다. 용변을 보고 일어나서 변기 물을 내린 직후에 면도기를 집어들다가 옆에 있던 헤어드라이어에 면도기를 살짝 부딪혔는데, 곧바로 퐁, 하는 소리가 났다. 변기에 뭐가 빠졌구나 싶어 낭패한 심정이 들기도 전에 물은 이미 다 내려갔고, 나는 면도기의 망 부분이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는 것을 반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면도날까지 사라진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변기 물을 내릴 때는 반드시 뚜껑을 닫아야한다는 교훈은 택배비를 포함해서 7600원……인 줄 알았는데, 상품 설명을 잘 보니 그건 면도기 망을 둘러싼 테두리였고, 면도기 망은 23900원이었다. 당연하게도 이게 그렇게까지 비쌀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수염을 끌어올릴 수 있게 얇으면서 튼튼해야 하는 부품이라 면도날 못지 않게 정밀 가공이 필요하단다. 아무래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아야지 직접 만들 수도 없고 어쩌겠는가. 귀금속 장신구를 떨어뜨리고 변기의 공포를 깨닫는 사람도 세상엔 숱하게 많을 테니 나 정도면 다시 없는 행운아라고 생각하자.


그나저나 정보라 작가의 걸작 단편집 “저주토끼”에 수록된 ‘머리’를 보면 주인공의 분변과 기타등등 오물이 뭉쳐서 이루어진 괴물이 변기에서 튀어나와 주인공을 어머니라 부른다. 그냥 오싹한 수준을 넘어서 인간의 재생산과 교육과 성역할과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마저 종합적으로 자극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이 변기에 귀중한 것을 종종 빠뜨렸다면 그토록 무섭고 비참한 결말로 이어지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주제와는 놀랍도록 무관한 얘기지만, 아무튼 변기는 무섭다.


내게는 무엇을 사고 나면 그와 비슷하거나 더 나은 물건을 입수하게 된다는 징크스가 있는데, 이때도 이 징크스가 힘을 발휘해서 부품을 산지 오래지 않아 멀쩡한 필립스 전기면도기를 또 주웠다. 심지어 이번에는 회전식이었다. 일반적인 인식으로 왕복식보다 약하다는 회전식도 요즘은 충분히 좋다는데 과연 어떨까? 궁금해진 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면도기를 세척 소독한 뒤에 사용해봤다. 이것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얼굴을 마사지하듯이 빙빙 돌리며 움직인다는 게 비교적 번거로운 편이긴 했지만 면도는 크게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얼굴을 좌우로 나누어 왕복형과 비교해보기도 했는데 왕복형이 근소하게, 열심히 잘 살펴보기 전엔 모를 정도로 우세할 뿐이었다. ‘부와아앙’하고 작동음을 우렁차게 뿜어내는 왕복형에 비해 ‘차르르르’하고 도는 소리만 나는 수준이란 점에서도 이점이 상당했다. 그렇게 나는 회전식 전기 면도기로 갈아탔다.


한편으로 날면도기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밖에 있어야 하는 날마다 이용중이다. 아무리 전기 면도기가 발전했어도 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깎는 것과 칼날을 바로 들이대어 깎는 것 사이엔 차이가 있는 모양인지, 덜 추접스러운 모습이 유지되는 시간에 두세 시간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처가 난대도 이 몇 시간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인간이 될 순 없더라도 최소한 겉에서 보기에 특별히 흠잡을 데는 없는 사람으로 남고 싶으니 그 정도 쯤은 감수해야 한다. 영화 ‘로키’의 명대사처럼 나에 대한 기억은 지워져도 평판은 오래 남는다. 그에 비해 면도날 상처는 몇 시간만에 나으니까 제법 수지맞는 장사가 아닌가 말이다.


날면도기로는 아주 오래도록 질레트의 3중 날 면도기 마하3를 썼다. 그러다 체험팩 상품을 받아서 4중 날로 업그레이드했고, 쉬크의 5중 날 제품을 또 체험용으로 받아 여행용으로 따로 챙겼다.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매끄러워졌다고 그럭저럭 만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마침내 질레트 4중 날 제품을 다 소모해서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 마하3를 다시 쓰게 되었는데, 칼날이 줄어들자 아무래도 투박하고 예리한 물건으로 얼굴을 긁어대는 느낌이 강해졌다. 역시 이런 물건은 구형으로 되돌아갔을 때 느끼는 역체감이 강한 모양이다.


그리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근래에 들어 진동 기능이 들어간 질레트 5중 날 세트를 싸게 팔기에 냅다 사서 써보기 시작했다. 피부 보호층이 있을 뿐더러 진동 기능까지 더해져 아주 매끄럽다고 하니 욕심을 안 낼 수가 없었다. 실제로 써보니 설명대로 매끄럽긴 했다. 다만 면도가 영 깨끗이 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니, 날 갯수도 늘었는데 왜 이렇게 성능이 어중간하단 말인가. 다른 모델과 차별화된 기능인 진동부터 의심스러웠던 나는 또다시 얼굴을 좌우로 나누어 한쪽은 진동을 켜고, 다른쪽은 진동을 끄고 면도를 해봤다. 그 결과 진동을 끈 쪽이 훨씬 면도가 깨끗이 되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허벅지 털도 밀어서 비교해봤다.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진동이 매끄러운 면도를 돕긴 하지만, 반대급부로 절삭력은 떨어뜨리는 셈이었다. 아무리 상처가 덜 나더라도 두 번 면도할 부분을 세 번 네 번 하면 피부 손상은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질레트가 그저그런 기업도 아니니 내가 뭘 잘못했거나 진동이 내 모질에 안 맞을 확률이 높을 것 같지만, 그런 건 좀 상세하게 말해주면 좋겠다. 내 통장도 피부도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단 말이다.


진동식 날 면도기에 약간 마음이 상한 뒤로 아예 면도기의 근본으로 되돌아가 한 장짜리 면도날을 사용하는 안전 면도기를 써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 면도날은 한 장에 200원 정도에 불과하니 사용법을 잘 익히기만 하면 금전적으로도 이익인 데다, 고풍스러운 면도의 맛을 누릴 수도 있다. 그 맛에 심취한 마니아층까지 있다는 모양인데……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덜 세심하게 면도하고도 다치지 않고 깨끗한 결과를 얻으려는 노력을 한참 거슬러올라가는 것은 다소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아 포기했다. 그리고 몇 중 날로 면도해도 상처가 나는 마당에 그 위험한 고전 면도날을 쓰고도 괜찮을 턱이 없을 게 분명했다. 면도의 프로 중의 프로인 이발사조차 종종 상처를 냈던 기억이 선명하다. 레코드판처럼 오래된 도구로 고풍스러운 멋을 즐기며 돈을 아끼는 것도 좋지만, 그게 안전과 직결되어 있다면 역시 함부로 판단할 일이 아니다.


(인류는 이 귀찮고 위험한 짓거리를 간략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으나 아직도 부족하다)


그리하여 뭘 또 괜히 바꿔댈 생각 말고 새로 산 거나 잘 쓰기로 결심하고 신형 면도기에 맞게 습관을 길들이던 와중에…… 문득, 신형 5중 날 면도기와 3중 날 면도기는 또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궁금해졌다. 1.5배 이상으로 날의 갯수가 늘었으니 면도도 그만큼 압도적으로 잘 될 것인가? 또다시 얼굴을 좌우로 나누어 비교해 본 결과,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답을 얻고 말았다. 최대한 비슷한 조건을 조성하려고 면도날이 지나가는 횟수까지 맞추고 좌우를 바꿔보기도 했는데 명백한 차이를 확인하기 힘들었다. 면도기 회사들이 쓸모없는 스펙 싸움이나 하자고 제품 개발을 했을 턱은 없으니 더 큰 규모로 정밀한 시험을 해보면 당연히 날이 많은 신형이 좋겠지만, 나처럼 수염이 적고 모질이 약하며 면도 기술도 딱히 없는 사람에게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매한가지였던 것이다. 무엇을 할 때 초보일 수록 좋은 장비를 써야 마땅하다는 게 나의 지론이었는데, 내 얼굴의 수염에 관한 한 적용되지 않는 얘기였다.


아무튼 잡다한 방법으로 여러 면도기를 테스트하며 적정값을 구하고자 한 나의 노력은 ‘대충대충 깎고도 안 다치고 말끔히 면도할 방법은 없으며, 다양한 이유로 인해 최고의 물건이 항상 최고의 결과를 도출하진 않는다’는 결론을 내고 종료되었다. 앞으로는 전기 면도기로 대충대충 면도하고 필요한 날에만 정성들여 아무 날 면도기나 사용할 작정이다. 나에게 가장 알맞고 만족스러운 물건을 찾을 수 없다면 가장 알맞고 만족스러운 방식이라도 택해야지 별수 있나. 



*추신

덤으로 인터넷의 면도기 리뷰 따위는 믿지 않을 것이다. 리뷰어들이 리뷰를 가짜로 해서가 아니라, 다양한 경우를 테스트하지 못해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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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pEX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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