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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Mar 20. 2024

영원치 못한 가짜 가죽과 신발의 지옥 2

표면 잃은 등산화



진짜 가죽 제품은 있는 걸 잘 쓰거나 중고로만 쓰고 합성 피혁 제품은 최대한 피하고 있는 터라 한동안 합피에 대해 분노할 일은 없었는데, 근래에 괜한 소비를 하면서 충격받고 말았다. 이번에도 등산화가 문제였다.


등산을 취미로 갖게 된 이후로 이 장비 저 장비 다 써보다가 이제 등산 얘기를 다뤄볼까 고민하게 된 내게 꼭 확인할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컬럼비아의 등산화, 뉴튼릿지 시리즈였다. 등산을 해보려는 사람이 등산화를 검색했다가 가격에 충격받고 최종적으로 고를 확률이 대단히 높은 신발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산이나 관악산처럼 인기 있는 산에 가면 이 등산화를 제법 자주 보게 된다. 어지간한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 미드컷 등산화의 반값인데다 심지어 디자인은 훨씬 매력적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값싸고 예쁘다니,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희생했단 말인가? 착화감이 나쁜가? 주변 친구들도 이 등산화를 세 명이나 산 터라 궁금증을 해소하는게 일종의 의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중고 장터를 주시하다 상당히 싼 값에 뉴튼릿지 시리즈의 구형 모델을 구할 수 있었다. 표면이 좀 갈라겼지만 진짜 가죽이라 적혀 있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믿고서.


그러나 이 신발을 받아서 좀 살펴보자마자 내 정보가 아주 틀렸음을 깨닫고 말았다. 스웨이드 가죽으로 만들어진 최신 모델과 달리, 내가 산 모델은 가죽인데 겉에 우레탄 코팅을 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스플릿 가죽, 상가죽이라 부르는 이 가죽은 통가죽이라 부르는 제뉴인 레더보다 더 안쪽의 연한 가죽을 코팅해서 만든 것으로, 표면이 매끈한 가죽 운동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쯤 합성피혁인 셈이다(한국 법령상 코팅 두께가 0.15mm를 넘어가면 천연 가죽이라 할 수 없다). 중고 매물 사진에서 본 갈라진 틈은 바로 이 코팅이 갈라진 자국이었다. 이 신발도 내구연한이 지나서 우레탄이 벗겨지는 와중이었던 것이다.


아차 싶었으나 판매자가 속인 것도 아니고, 어째서인지 컬럼비아 뉴튼릿지는 이상할 정도로 매물이 없는 터라 항의를 포기하고 그대로 산에 갔다. 아주 합리적이라곤 할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궁금증을 이길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해소하겠다고 선택한 삼성산은 관악산 옆의 낮은 산으로, 엘지 모바일이 위기에 처했을때 임직원들이 올라가서 사과를 깨물어 먹는 의식을 벌인 산으로 유명하다. 돌산이라는 평이 많아도 이 한숨 나오는 일화를 생각하면 그럭저럭 쉽게 다닐 만하겠거니 싶었던 것인데…… 막상 가보니 상당히 험한 산이었다. 돌산임을 알고 갔는데도 상상을 초월해서 충격받을 지경이었다. 초보에게 권했다간 십중팔구 뒤에서 쌍욕을 하고 등산따위 미친 짓거리를 시키는 작자는 다 정신나간 인격파탄자라고 매도할 만했다. 산이 험한데 전반적으로 아담하기까지 해서 발을 찔러대는 돌과 바위가 많았다. 덕분에 성능 시험은 잘 되었지만, 등산화의 코팅은 반쯤 벗겨지고 내 족저근막염도 도지기 직전이 되었다.

(상정된 내구연한을 넘긴 스플릿 가죽의 노화. 뉴튼릿지 플러스2는 스웨이드라 이렇지 않다)


작지 않은 대가를 치르고 진행한 테스트 결과를 짧게 적자면, 컬럼비아의 뉴튼릿지 시리즈는 괜찮은 등산화였다. 가죽이 운동화 수준으로 얇고 발가락을 보호할 수단이 따로 없으며 깔창마저 그저그런 물건인 데다 발목 지지도 별로 해주지 않긴 하지만, 뾰족한 돌을 반복해서 밟거나 매우 심한 경사를 암벽 오르듯 타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즉 암릉으로 소문난 코스가 아닌 산지에서 다섯 시간쯤은 쓸만해 보였다. 질환이 없다면야 어디든 하루는 쉬엄쉬엄 다닐만 할 것이다. 특히 접지력이 생각보다 좋아서 어지간해선 아쉬울 일이 없을 듯했다. 여유있는 사이즈로 사서 깔창만 좋은 것을 쓰면 계절마다 한두 번쯤 쓰기엔 충분하지 않을까? 게다가 일상화로 써도 좋을 만큼 외관이 예쁘니 과연 인기가 있을만했다.


그런데 그 예쁜 외관이 엉망이 되었으니 이것도 수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적합한 도색 재료를 찾아서 구매하려다…… 그 비용만 3만 원을 넘기기에 포기하고 말았다. 컬럼비아가 등산화에 스플릿 가죽같은 나약한 재료를 쓰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그런 문제를 알기에 요즘 모델은 스웨이드를 쓰고 있겠지만, 대충 신다 버릴 것을 상정하고 물건을 찍어내는 풍조는 확실히 없어져야 할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의 복구 수단을 제공하든지.


우레탄 코팅도 일종의 도색인 셈이라 스플릿 가죽 제품의 복구는 보통 도색으로 이루어진다. 앤젤러스나 가스코 제품이 이 방면에서 유명한데, 나는 가격 문제로 이를 포기하고 고민한 끝에 다이소 등 잡화점이나 문방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크릴 물감과 바니쉬를 사용했다. 바니쉬를 얇게 칠하고 말리고 아크릴 물감과 바니쉬를 혼합해서 올린 것이다. 다만 보통의 아크릴 물감은 부착력이 약하고 바니쉬는 캔버스나 목재처럼 움직이지 않는 표면에 쓰는 물건이라 건조하고 몇 번 구부리자마자 곳곳에 균열이 생겼다. 땜질 처방으로 이 위에 크림형 구두약이라 할 수 있는 슈 크림을 발랐다. 색이 들어간 슈크림은 가죽에 난 색바램이나 상처를 지우는 색상 보정 효과가 강하나 염색되는 것도 부착되는 것도 아니다. 문질러 지우면 지워지는 눈속임에 가깝다는 뜻이다.

(색상 조합후 도색중인 갑피)

그러나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대대로 써온 물건이나 다신 구할 수 없는 한정판, 혹은 천하의 명품도 아니니 유지보수에 들이는 비용과 노력도 제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제 이 물건을 신고 지독한 돌산을 오를 생각은 없으니까 다시 흉해진다 싶으면 그때 또 보수할 작정이다. 밉든 곱든 이제 팔 수도 없는 내 물건이니 귀찮아도 책임져야지 별수 있나.


써놓고 보니 기업도 팔아먹은 물건에 더 책임을 졌으면 하는 심정이다. 등산화의 미덕은 안전에 있고 안전을 추구하면 자연히 튼튼해지는 법이라 등산화의 갑피는 수명이 길다. 따라서 많은 등산화 제조사가 중상급 등산화의 창갈이를 공식적으로 지원한다. 자체적으로 하기도 하고 수선 업체와 제휴하는 경우도 있다. 도저히 살릴 수 없을 정도로 헤지지 않는 다음에야 마모된 밑창을 바꾸어 계속 신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컬럼비아는 창갈이가 불가능하다. 검색해보면 ‘모두 수입품이라 부품이 없고, 잘못된 창갈이는 발건강을 해칠 수 있다’라는 취지의 답이 나온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다른 회사라고 아무렇게나 창갈이를 하는 게 아니라 할 만한지 판정을 거쳐 작업하는데, 대체 왜 창갈이가 모조리 안전을 고려하지 않는 행위라도 되는 것마냥 써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굳이 수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싼 값에 찍어낸 신발을 하나라도 더 팔아치우는 게 이득이라 적당한 등산화를 싸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일 테니 ‘본사 정책상 창갈이 서비스를 지원하지 않습니다’ 정도만 써도 이해할 텐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창갈이따위 하지 말고 같은 거 새로 사세요’라고는 차마 쓸 수 없었던 것일까? 잘못된 창갈이가 발건강을 해치는 것만 알고 잘못된 고객 응대가 기업 이미지를 해치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다.


‘Tested tough’

본사 근처의 산에서 험난한 테스트를 거친다는 자부심이 담긴 컬럼비아의 모토다. 실제로 제품의 품질도 대체로 모토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훌륭해서 컬럼비아는 내가 애정하는 브랜드다. 그러나 터프한 환경을 극복할 장비가 생산 소비되는 과정에서 환경을 터프하게 만드는 부분도 살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계속)


(단장 끝)



*추신

깨끗이 단장한 신발을 신고 좀 걸었더니 바니쉬가 떨어져나갔다. 신발 손보는 재주가 빼어난 사람들이 괜히 좋은 재료를 사다 쓰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배우고 새로운 수습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어휴.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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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해의 취미 수필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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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종이책: https://search.shopping.naver.com/book/catalog/39577892619 

밀리의 서재: https://millie.page.link/kz1M5 

밀리의 서재 요약본 오디오북: https://millie.page.link/ExY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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