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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Jul 03. 2024

아름답지만 괴로운 나이키 신발을 포기하며

작년부터 신발 덕질이라고 할 만한 광기에 사로잡혀 중고 신발을 여럿 신어봤다. 족저근막염과 등산 취미, 그리고 무릎 통증이라는 복잡한 사정이 얽힌데다 내가 손상된 신발의 복구라는 잡기를 체득한 탓도 있는데,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름다운 스니커즈에 매혹된 계기는 나이키 에어 맥스 90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작년 어느날, 필요한 사람 가져가라는 듯 폐의류 수거함 위에 잘 보이게 내놓은 에어 맥스 90을 우연히 발견하자마자 나는 선명한 색채의 매력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덕분에 나이키 스니커즈를 수집해서 벽면 가득 장식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선명한 색채가 돋보이는 나이키 에어 맥스 90)

그동안 내가 선호했던 가죽 컴포트화나 보트화 등이 고전적 회화라고 하면 나이키 스니커즈는 선명하고 매끈한 팝아트 같은 매력이 있다. 그런데다 심지어 신고 다닐 수도 있으니, 또 예쁜 게 없나 자꾸 뒤적이며 소유욕을 불사르기 시작하면 분명 끝이 없을 듯 싶다. 예전에는 똑같은 옷이나 신발을 두 색깔 이상 사모으는 사람을 좀 유난스럽게 생각했는데, 스니커즈의 매력에 빠지고 보니 결코 남일이 아니었다. 특히 디자인이 잘 나온 나이키의 스태디셀러 ‘에어포스 1’ 같은 모델은 흰색 정도는 기본으로 갖춰야 한다는 의무감이 드는 한편으로 때가 타지 않아 실용적인 검은색과 사막화 같은 느낌이 멋진 된장색, 그밖에 패셔너블한 컬러링이 된 버전 하나쯤은 갖추는 게 여러 상황에 대처하기 좋지 않을까......하는 사치스러운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된 것이다.


물론, 나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주머니 형편상으로도 소유에 대한 개인적 윤리 의식상으로도 같은 모델의 신발을 복수로 소유하는 건 무리가 있었던 탓이다. 그러나 편한 신발을 찾겠다는 명목으로 아름다운 신발을 이것저것 소유하려는 욕망은 어디 가질 않아서, 결국 나는 한 사람이 단기간에 신기에는 과도하게 많은 양의 중고 신발을 구해서 신어보게 되었다. 심지어 에어맥스 90처럼 손상되어 버려지거나 엄청난 헐값에 나온 것도 구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되살려 신어봤다.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었는데, 잘 수선한 신발은 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명분이 되어 욕망에 저항할 수 없었다. 재미를 느끼며 잘 하는 일로 소유욕도 채우고 이타적 욕심도 채울 수 있었으니 빠져나갈 길이 없지 않았겠는가?


아무튼 그런저런 체험으로 내 마음속에 확실히 굳어진 생각은, ‘나이키가 편한 신발은 잘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신발을 만들어온 회사인 만큼 도저히 못 신을 신발을 만들어대는 건 아니지만, 나처럼 발바닥에 질환이 있는데다 오리발처럼 발가락이 넓게 퍼지는 족형의 소유자는 영 편치 않은 신발이 많았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신어서 ‘청년화’라고 해도 좋을 지경인 ‘에어포스 1’은 나이키치고는 발볼이 넓고 착화감도 그럭저럭 불편하진 않은 수준이었지만 뒷산을 돌자면 발바닥이고 발등이고 개운하고 편한 부분이 없었고, 카본 플레이트가 들었거나 부스터 장치처럼 보이는 줌에어 쿠션이 눈에 보이게 장착된 러닝화들은 뛰기에 적합하도록 쿠션이 앞에 치중되어 느낌이 좀 어색했다. 아마 달리기에선 훌륭한 성능을 발휘하겠지만 주로 뒷산을 걷거나 일상화로 사용하려는 나에겐 맞지 않는 신발이었다. 에어쿠션이야말로 나이키의 정체성이라는듯 밑창 전체를 공기 튜브로 도배한 러닝화도 신어봤으나, 어째 이건 발바닥 곳곳이 배겨서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튜브처럼 통짜로 된 에어쿠션은 점프처럼 큰 충격을 막는데나 유용하지, 반발력이 강해서 착화감을 향상시킬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약간 더 일상화에 가까운 모습이었던 윈플로는 그럭저럭 신을만했다. 이 녀석도 역시 심하게 길쭉한 편이긴 했어도 바람이 잘 들어오고 쿠션이 전반적으로 좋았던 데다가, 내가 구한 모델은 완전히 검은색이라 때가 묻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어서 자전거 탈 때 신는 신발로 애용했다. 다만 자전거를 타지 않고 그냥 걸어보면 이 녀석도 어딘지 모르게 편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페달을 밟을 때는 편하고 좋았던 쿠션이 살짝 마음에 걸리는 방식으로 발바닥을 자극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 신발이 너무 부드러워 불규칙한 지형에서 발바닥을 보호해주지 못한 탓이 아닌가 싶다. 신발이란 부드럽고 푹신하면 무조건 편하고 좋은 게 아닌가 생각했던 내게 적당히 단단한 신발의 미덕을 가르쳐준 셈이다.


그리하여 아예 산행에 적합하게 나온 모델도 신어봤다. 농구화와 러닝화 이미지가 강한 나이키도 험지에 특화된 라인업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이름도 멋들어진 All Condition Gear, 줄여서 ACG다. 어떤 환경에든 맞는 장비라니, 일단 도전하라는 캐치프레이즈와도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과연 이런 브랜딩 실력만큼은 어디 가지 않는구나 싶다. 하지만 내 운이 없었던 것인지 ACG의 부츠도 영 발에 맞지 않았고, 밑창의 네모난 돌기들이 인상적이었던 와일드우드는 바로 그 돌기가 이상할 정도로 중족골을 찌르는 느낌이 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이쯤되면 내가 문제인가 의심스럽기도 해서 점찍어뒀던 모델들의 리뷰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등산화는 썩 나쁘진 않지만 화강암 지대에 적합하지는 않는 듯했고, 일상용으로 쓰기 좋아보이던 덕부츠와 에어포스1 고어텍스 모델은 미끄럽다는 얘기가 많았다. 덕부츠도 고어텍스도 악천후에 쓰기 좋은 물건인데 바닥이 미끄럽다니,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는 다이버 시계 같은 얘기다. 아무튼 가족이 낙상 사고를 당한 이후로 신발이라면 디자인은 둘째치고 접지력부터 보는 나로서는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던 셈이다.


내가 신어봤던 나이키 신발 중에서 만족스러웠던 것은 기능성을 강조하거나 디자인이 빼어나 인기 있는 모델이 아니라, 아울렛에서 3만 원쯤을 주고 샀던 ‘에어 맥스 오케토’라는 모델이었다. 에어쿠션이 들어있고 중창 밑창 구분이 없으며 갑피는 메쉬로 만든 중저가 상품으로, 고무 밑창이 따로 없는 만큼 가벼우면서도 적당히 푹신하고 내구성 외에는 불만거리가 없어서 신발에 과도한 관심을 갖기 전까지 편하게 잘 신고 다녔다. 심혈을 기울인 걸작보다는 적당히 힘을 빼고 대강 만든 작품이 더 인기 있는 경우가 예술가에게는 종종 있는 일인데, 적어도 나에겐 나이키의 신발도 그런 식이었던 셈이다.


(수수해서 저렴했던 에어 맥스 오케토. 닳아버린 뒷굽 수선에 실패해서 떠나보냈다)


지금은 리액트폼을 채용한 ‘리액트 프레스토’를 잘 신고 있다. 리액트폼은 쿠션감과 반발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은 신소재로, 착화감이 쫄깃하다고 할 만하다. 그간 신어본 나이키 신발 중에서 발바닥의 착화감만큼은 가장 마음에 든다. 다만 이 신발, 분명 내 발 사이즈에 맞는데도 새끼발가락이 발판 바깥으로 살짝 튀어나가는 기분이 든다. 발볼은 좁고 갑피는 너무 연한 메쉬로 된 탓이다. 게다가 신발끈을 고정하는 플라스틱 구조물이 뾰족해서 갑피를 조금씩 찢어먹고 있다. 어째 애초에 주웠을 때부터 앞코가 터져 있더라니.......날렵하고 예쁜 디자인을 중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싶다. 만약 근미래에 의류 폐기물 감축을 위한 내구성 인증 제도가 생긴다면 이 신발은 통과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


나이키 신발에 대해 불평을 길게 늘어놨는데,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제법 되는지 근래에 들어 나이키 신발의 시장 점유율이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고객 신뢰를 잃었다고 하면 좀 과한 표현이겠고, 완곡하게 말해 경쟁력이 낮아진 것이리라. 사실 어릴 때부터 좋은 운동화라면 나이키부터 떠올렸듯이 지금도 나이키 신발이라면 무작정 갖고 싶긴 하지만, 큰 비용을 들여 새 신발을 장만하기로 작정하면 아무래도 다른 브랜드를 사게될 것 같다. 일단 엄청나게 편하기로 유명한 호카(구 호카 오네오네)가 요즘은 심지어 업계 최고 수준으로 예뻐지기까지 해서 더 눈이 갈 수밖에 없고, 친숙하기로는 아디다스도 나이키 못지 않은데 아디다스는 사이즈로 불편을 느낀적이 없다. 아식스도 예쁘면서 감탄스럽게 편한 신발이 많고, 뉴발란스도 원래 편하기로 유명했는데 근래에 또 인기몰이를 제법 했다. 잠깐, 가만 생각해보면 나이키 말고는 유별나게 불편감을 느낀 신발 브랜드가 없는 것 같은데......?


따지고 보면 평균치에서 벗어난 발을 가진 주제에 신발을 대체로 신어보고 사지 않은 내 잘못도 적지 않지만, 불편감을 느낀 적이 워낙 많다 보니 이제 내 마음속에서 나이키 신발은 예쁘고 딱딱한 구두처럼 불편을 감수하고 누려야 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잡고 말았다. 나이키 애호가들이 들으면 ‘니가 진짜 편한 나이키 신발을 안 신어봐서 그래!’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나 ‘진짜 편한’ 나이키 신발을 찾아내서 신을 만큼의 애정이 남아있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게다가 무작정 멋을 추구하기에는 내 발도 정신도 너무 늙고 지쳐버렸단 말이다.


요컨대 나이키 신발이 경쟁력을 되찾으려면 ‘다른 거 살 걸’ ‘다른 거 신고 나올 걸’ 같은 ‘손해의 경험’부터 줄여나가야 한다는 게, 영 건강치 못한 발을 가진 나 개인의 생각인데...... 문득 돌이켜 보건대 창작자로서의 나는 과연 ‘괜히 봤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을 쓸 때가 없나 싶어 불안해지기도 한다.



*추신 

저는 언제나 돈과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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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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