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세대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나도 자주 한다. 신세대와 완벽히 분리된 삶을 살고 있는 데다가 시간도 유행도 빠르게 흘러가니 그들을 이해하는 편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먼 존재는 결국은 이해할 수 없다. 이건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섭리 같은 것이다. 다만 영상을 빠르게 재생해서 보는 신세대의 행태에 대한 얘기를 할 때는 편을 바꿔서 신세대를 옹호할 수밖에 없다. 나도 대부분의 영상을 고속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날 때부터, 혹은 재생 속도 조절이 가능해진 직후부터 이렇게 산 것은 아니다. 나와 내 이전 세대가 가진 보편적 습성대로 아무 조작 없이 작품을 순수한 정속으로 감상했다. 그러던 것이 잡다한 애니메이션을 챙겨 보기 시작하며 속도를 조절하게 되었다. 분기별로 새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 일단 전부 맛을 보고 계속 볼 작품을 정해야 하는데, 많은 작품을 다 소화하기가 시간적으로 벅찼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상물 심의 위원회나 잡지 기자처럼 업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기도 하지만, 그때는 그게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는 취미였던 터라 작품들에 대해 나름대로 감상을 말할 수 있어야 나의 가치가 높아졌다. 요컨대 감상이 아니라 정보 습득을 위한 영상 시청은 정속으로 시간을 모두 지불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그 습관은 그대로 이어져서, 꼭 집중해서 감상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면 1.5배로 보고, 좀 잘 봐야겠다 싶으면 1.2배,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되겠다 싶을 때만 정속으로 보는 시청의 ‘기어’가 완성되었다. 예술 감상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영상 예술의 고속 감상은 소설을 바쁘다는 이유로 대사만 읽는 수준의 언어도단적 행위지만, 정보 습득이라는 관점이 섞여들면서 딱히 모든 순간을 다 제작자의 의도대로 즐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신문 기사를 대강 읽는 건 보편적이고 심지어 어느 정도 당연한 일인 것처럼.
이후로 코로나 유행 시대가 되면서부터는 팟캐스트를 들으며 산책하는 게 일과가 되었는데, 팟캐스트는 아예 1.5배 미만의 속도로는 듣지 않았다. 각종 교양 채널에 쌓여 있는 방송분이 무시무시하게 많았던 데다가, 심지어 계속 업데이트 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의 말이 답답할 정도로 느렸던 탓이다. 특히 내가 즐겨 듣는 ‘과학과 사람들’의 방송은 10여년 분량이 매주 한 시간에서 심하면 여섯 시간짜리도 있었으니, 하루 한 시간 청취로 그걸 다 듣자면 청취 속도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고속 감상을 옛날에는 친구들끼리 ‘계왕권’이라고 표현하곤 했는데, 콘텐츠를 주어진대로 감상하기엔 시간적으로 벅찬 만큼 계왕권처럼 무리한 짓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참고로 계왕권은 만화 드래곤볼에 등장하는데, 신체 부담을 감수하며 힘을 두 배, 세 배로 배가하는 기술인 만큼 고속 감상의 별명으로 적합한 듯하다.
그런저런 역사를 거쳐 고속 재생을 당연시하게 된 나는 결국 고속을 기본값에 가깝게 여기게 되었다. 공백 같은 시간조차 예술의 한 부분인 영화만큼은 정속으로 감상하려 하지만, 그중에서도 너무나 양산형 상업 작품으로 느껴지는 것은 1.2에서 1.5배로 보고, 드라마 중에서 고통을 참고 억지로 꾸역꾸역 봐야 하는 경우는 그보다 더 빨리 본다. 예를 들어 ‘스카이 캐슬’은 너무나 센세이션해서 꼭 봐야만 했는데 도통 취향에 맞지 않아 대부분을 4배속으로 봤다. 그렇게까지 싫으면 안 보면 되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하루하루 남들이 공감할 만한 표현 한 마디라도 건져야 하는 대중 예술가로서 싫은 것도 봐야 할 때가 생긴다.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자 하면 싫은 일이 마구 딸려온다는 사실의 한 가지 예가 아닐까?
심지어 요즘에는 매일 시사 방송까지 보다 보니 도통 시간을 확보할 수가 없어서 ‘계왕권’을 더 단련하게 되었다. 몇가지 어플리케이션과 브라우저 확장 프로그램을 동원해서 재생 속도를 더 높인 것이다. 그리하여 팟캐스트는 이제 시사 1.9배속, 교양 1.5배속으로 듣고, 정보만 얻으면 그만인 유튜브 채널은 5배속으로 본다. 사실 이쯤되면 모국어인 한국말도 슬슬 프랑스어와 분간이 어려운 지경이 되지만 대부분의 채널이 자막을 달아놓으므로 잘 보면 이해는 할 수 있다.
다만 이 짓을 하고 있노라면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방송에서 김상욱 교수가 경고하기로, 영상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이 글을 읽고 정보를 습득하는 능력을 잃고 구전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영상을 5배속으로 틀고 화상과 자막만 보자면 이건 사실 대량의 사진이 곁들여진 텍스트를 읽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글보다 영상이 재미있고 편하다는 이유로 영상 문화가 유행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말을 듣는 것보다 글을 읽는 게 편하다고 자막이 붙었고, 내용이 다 글로 나오는데 굳이 이걸 긴 시간에 걸쳐 듣고 있을 필요가 없다며 빠르게 읽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이 등장함으로써 텍스트의 시대로 회귀할 조짐이 얼핏 엿보이게 된 셈이다. 정보 탐색과 예술 감상이 모두 같은 형식에 욱여넣어진 탓에 발생한 아이러니다. ‘숏폼’이 별도로 분리된 것처럼 근미래에는 두 가지를 별개로 다루는 경향이 발생하지 않을까?
아무튼 내 주변에는 신세대가 없는 탓인지 콘텐츠를 고속으로 감상한다고 하면 그게 들리냐거나 그럴 거면 왜 보냐는 반응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메신저 단체방을 포함한 관찰 대상 2백 여 명 중에 나도 그런다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 짓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런 게 가능하리라 생각지도 않는 듯하다. ‘요즘 애들은 마라탕 먹고 탕후루도 먹는대요’ 같은 말을 들은 듯한 반응이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속 감상을 흔히 하는 신세대가 구세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진화한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집중력이나 청력이 특별히 빼어난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무슨 시험을 봐도 듣기 평가에서 점수가 마구 깎이기 일쑤고, 통화는 까먹을까봐 모조리 녹음하고 있다. 그러니 고속 감상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는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가 아니라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에서 나오는 듯하다. 시험이 내일인데 봐야 할 범위가 너무 넓으면 중요해보이는 부분만 찾아서 머리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거나 들어야한다고 여기는 콘텐츠의 숫자에 비해 가용한 시간이 적으면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사정을 들으면 누가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쫓아오는 것도 아니며, 뭘 봐도 곱씹어 잘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데 대량의 콘텐츠를 그렇게 많이 보는 게 무슨 필요가 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콘텐츠가 무한정 널려 있는 세상에서 많은 콘텐츠를 섭렵하고 빠르게 옥석을 가려내는 게 중요한 능력이 된 만큼 이러한 기조는 계속되리라 본다. 물론 나 역시 동일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더 빠른 방법을 찾아내길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인공지능에게 맡겨 영상을 아예 요약하기도 한다는데,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물론 이게 즐겁고 좋다는 소리는 아니다. 계왕권 5배까지 손대긴 했지만 나도 내가 애정할 만한 예술 작품만큼은 느긋하게 즐기고 싶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느긋하게 볼 날이 올 전망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일주일에 영화 한 편만은 느긋하게 보자는 결심을 한지가 2년쯤 된 것 같은데 그 뒤로 약속 없이 혼자 느긋하게 본 영화라곤 두어 편뿐이다. 다만 시간이 없어서가 아님을 나는 안다. 빨리 볼 수 있는 것들을 빨리 봐서 해치우는 게 더 가볍게 느껴지는 탓이다. 비유하자면 레토르트 음식을 데워서 후다닥 먹는 일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럴듯한 요리를 해먹을 엄두를 절대 낼 수 없게 된 셈이라고 할까. 레토르트 음식도 제법 훌륭한 음식이고 간편히 먹고 남는 시간을 쓰는 일도 나름대로 보람차지만, 레토르트밖에 먹지 않게 된 삶은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 인형처럼 되고 만다. 뭘 해도 매순간 마모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빨리 봐서 얻어낸 시간을 내게 공백으로 돌려주기라도 해야겠는데,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가시적 이득만을 기쁨으로 여기게 된 터라, 기계화 되어가는 내면의 부품이 끊어지기 전에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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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낡고 고장난 물건을 고치거나 버려진 것들을 수선하고 중고 거래를 지속하며 느낀 소비 생활의 고민과 의미에 대한 수필집입니다. 지속적으로 물건을 사고 버리는 일에 피로감을 느끼거나 사소한 소비에도 회의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할 부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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