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건해 Aug 21. 2024

월말의 수리대전쟁1



지난 7월 말은 지독했다. 좀 과장하면 노후되어 무너지는 세월과 싸우는 기분이 들 정도로 여러 물건이 망가졌다.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는 다 내가 너무 낡은 물건이나 너무 싼 물건을 써서 일어난 것이지만, 한번에 이렇게 연달아 두드려 맞으니 나 자신 이외의 무언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샘솟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가장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것은 프린터였다. 프린터따위 보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 마당에 프린터 하나가 고장났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건 대단히 황당하고 나약한 과장일지도 모르겠다. 평소 같으면 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월말에 나는 프린터로 인쇄해서 실물 원고를 보내야만 하는 공모전의 마감 기한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따라서 프린터가 고장났다는 건 수능 시험장에서 펜이 나오지 않게 된 것과 비슷했다.


인쇄가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 사태를 아주 오래도록 여러번 겪었기에 처음에는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가정용 프린터와 싸운 경력만 거의 20년에 달하니 이번에도 시간을 들이면 좀 나아지리라 생각했다. 나는 정해진 수순대로 헤드를 청소해보고, 주사기를 이용해 카트리지에 잉크를 강제 공급해서 프린터가 빈 카트리지로 헛손질을 할 가능성을 차단하기도 했다. 간결하게 쓰긴 했지만, 실제로는 번거로울 뿐더러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카트리지를 뽑아들 때부터 시작해서 주사기에 잉크를 채우는 순간, 주사기 실린더를 눌러 잉크를 주입하는 순간, 카트리지를 다시 꽂아놓는 순간 등 모든 순간에 어디서든 잉크가 새고 튀어 사방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실수로 대량의 잉크가 누출되기라도 하면 멍하니 주저앉고 싶어질 정도로 짜증이 치밀어오른다. 내 손과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고도 프린터가 정상이 되지 않으면 아예 포기하고 수리를 미룰 때도 있다. 기약 없는 작업에 기력을 쓰며 주변을 더럽히다 보면 항아리 밑이 빠진 줄도 모르고 물을 붓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상하는 탓이다.


하지만 이번만은 짜증을 내고 앉아있을 수도, 작업을 미룰 수도 없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슬퍼하거나 노여워한대도 마감은 기다려주지 않고, 나는 움직여야 했다. 피할 수 없는 재난을 대하듯이 체념을 참고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인쇄와 헤드 청소와 잉크 충전 따위 과정을 반복하며 이 더러운 짓이 끝나면 이번에야말로 프린터를 바꾸리라 생각하며 간신히 알아보기에 문제가 없는 형상으로 원고를 인쇄했고, 인쇄가 끝나자 자전거를 타고 인근 우편 취급소에 가서 발송했다. 무릎 통증이 도지고 있는 와중이라 자전거를 타면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분 1초를 다투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초조한 심정에서는 당장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미약한 자해를 감수하고 투고를 마친 뒤, 나는 찌는 듯한 더위가 지배하는 거리로 나와서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으며 다시 자전거에 탔다. 어쨌든 고비를 하나 넘기긴 했다는 미약한 성취감이 들었다. 그러나 천천히 달리는 동안 한심한 기분이 해가 진 산속의 땅거미처럼 몰려왔다. 되지도 않을 공모전에 투고하자고 이런 고생을 하다니, 나는 대체 이런 헛짓거리로 무엇을 얻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번잡하기 짝이 없는 난리를 거쳐 심리적 재난에 시달리는 동안, 나는 진짜 문제가 다가올 예정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프린터는 나의 멍청한 실수 하나가 계기가 되어 깊고 어두운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선 것이다.......


그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내가 같은 시기에 처리해야 했던 문제 두 가지를 추가로 소개하자. 일단 에어컨도 고장났다. 가동은 돼서 생명 유지에 지장은 없지만 물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애초에 에어컨이란 온도차로 습기를 모으는 장치니까 물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 이게 줄줄 샐 정도라면 정상적인 경로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단 고등어 선물세트에서 나온 플라스틱 트레이를 놓고 물을 받으며 쓰다가, 물이 떨어지는 범위가 트레이를 벗어난 끝에 콘센트까지 젖는 꼴을 발견한 뒤에 기겁해서 에어컨을 분해했다. 다시 말해서 발견이 늦었다면 뉴스의 한 꼭지를 차지해서 전국민의 에어컨 사용 습관에 경종을 울릴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물기를 수습하고 에어컨을 뜯어내어 잘 관찰하고 알아낸 결론은 에어컨을 전문 업체에게 맡겨 청소하지 않은 게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몇 년간 자가 청소만 하면서 열교환기 핀들을 세척하지 못한 결과 미세한 먼지들이 쌓여서 물이 빠지는 관을 막아버린 듯했다. 자기 물건을 자기가 관리하는 건 보람된 일이지만, 명확한 한계를 알지 못하면 이꼴이 나게 된다.


어쨌거나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면 막혀버린 배수구를 뚫어야 했는데, 배수구가 도무지 손이 닿지 않는 곳이었고, 알맞게 길쭉한 솔 따위도 없으며 바람을 불어넣기 적당한 크기의 송풍기 따위도 있을 턱이 없는 터라 뭘 어쩌나 한참 고민했다. 그러다 최종적으로는 빨대 중간을 놀이용 점토로 둘러서 공기가 빠질 틈을 줄이고, 그 빨대 끝에 자전거용 펌프를 연결해서 바람을 불어넣는다는, 대단히 번거로운 짓을 해서 배수구를 뚫을 수 있었다. 실제로 제 역할을 한 건 압력이 아니라 빨대로 찌르는 행위가 아닌가 싶었지만, 어쨌든간에 해결은 했다. 분해조립 과정에서 에어컨 날개 고정부를 부러뜨려 아직도 복원하지 못했으나 그건 뭐 사소한 미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또다른 문제로는 전동 칫솔이 있었다. 치과에 갈 때마다 한두 군데를 때우느라 몇 만원씩 나가는 게 너무나 무섭고 신체가 복구 불가능한 방식으로 손상되는 게 고통스러워 과감히 3천 원인가를 주고 직구한 전동 칫솔의 축이 똑 부러져 어떻게도 도저히 사용할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알아보니 어지간한 가격의 전동 칫솔은 진동을 전달하고 힘을 받는 핵심 부위인 중심축이 금속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산 모델은 가격에 걸맞게도 축까지 모두 플라스틱이라 오래 쓸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분노한 차인표처럼 이를 너무 강렬하게 닦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래서 치경부 마모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전동 칫솔을 제법 만족해서 쓰고 있었던 터라 당장 아쉬워졌지만, 없다고 해서 칫솔질을 못하는 건 아닌지라 칫솔 수리는 뒤로 미루게 되었다.


이야기를 다시 프린터로 되돌리자. 남들과 달리 인쇄를 할 사무실도 없고 인쇄를 자주 하기도 하는 터라 나는 프린터를 가급적 빠르게 정상화해야 했다. 그리하여 인식이 잘 되지 않는 카트리지를 뽑고 다른 색 카트리지를 대신 꽂을 수 없을까 무모한 실험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카트리지 실리콘 마개를 프린터 안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주 작고 사소한 부품이지만, 그게 없으면 공기가 솔솔 들어가서 카트리지가 잉크를 머금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물건을 찾겠다고 프린터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프린터를 들어 세워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했다. 그게 지옥문을 노크하는 짓이라는 것도 모른채.......


프린터는 보통 수평을 유지하라고 한다. 헤드가 일정한 힘으로 왕복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건 그게 전부였는데, 이유가 하나 더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폐잉크를 따로 수거하는 장치가 없는 프린터는 내부에 폐잉크가 어느 정도 고일 수 있고, 프린터를 기울이면 이것이 샐 수 있기 때문에 취급을 주의해야 했다. 물론, 내게 이 사실을 알려준 건 엉망진창으로 흘러나온 잉크였다.



(예전에 찍은 사진으로, 이번 사태는 훨씬 처참했다)

몇 방울로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잉크가 일상 공간에 흐른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냄새나는 오물이나 콜라, 음식물 쓰레기 국물 따위가 흘러 넘치는 사고에 비하면 비교적 뒷처리가 어렵지 않은 사고지만, 그렇다고 번거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모든 색이 섞여 검은 색으로 보이는 잉크는 내 손부터 시작해서 프린터 스펀지 받침과 수납장과 바닥과 내 발과 슬리퍼까지 모조리 물들였고, 나는 어디부터 닦아야 하나 싶어 잠시 멍해졌다. 반사적으로 대처할 규모의 재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정신이 드는 대로 일단 알코올을 뿌리며 휴지로 슬리퍼 바닥부터 닦았다. 걸어다닐 때마다 발자국이 찍히면 일이 늘어나니까. 그 다음에는 잉크가 스미면 제거할 수 없는 마루 바닥과 가구를 닦았고, 그 뒤에 프린터 받침과 프린터를 닦았다. 저주받은 미다스처럼 손에 닿는 것마다 검은 자국이 남는 터라 중간중간 장갑도 몇 번을 닦아야 했다. 몹시 피곤한 작업이었다. 심한 육체노동은 아니었지만 정신이 너무나 힘들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며 삶을 꾸리고 있을 시간에 나는 여기서 역신처럼 주변을 더럽히고만 있지 않은가. 고칠 수 있는 걸 버리고 새것을 산다는 행위에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이유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에 나를 떠밀고 있는 건 아닐까? 고치는 일로 존경이나 찬사를 받을 필요는 없고 스스로 만족할 방식으로 살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고장난 프린터에서 쏟아진 잉크 닦는 일의 어디에 만족이 있단 말인가?


두번 다시 이런 일을 또 겪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에 복합기 가격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복합기는 대충 싼 것도 15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살 만한 값은 아니었다. 새 프린터를 사면 자리를 잡고 체계를 다시 정비하는 일도 만만치 않게 번거롭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어쨌든간에 지금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 난리 끝에 어차피 프린터를 교체한다는 결말이 기다린다면 해볼 수 있는 일은 과감히 다 해보고 싶기도 했다. 아마 이 ‘어차피 망한 거 손은 대 보자’라는 자포자기식 도전을 버리지 못하는 심성이 나를 고통 속에서도 움직이는 것이리라. (계속)

이전 29화 가만히 보고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