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부터 창의문까지
2주간 바쁘게 지냈다. 소설 한 권의 번역과 검수를 거쳐 의뢰인에게 납품했고, 다음 권으로 나아갔으며, 공모전 수상작의 수정안을 썼지만 퇴짜를 맞았다. 집안에 송사가 있어 법원에 다녀오기도 했다. 세탁기를 건조기 딸린 것으로 바꾸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우리 집안에서 네 대째의 세탁기로, 건조기를 쌓아올리니 그만큼 다용도실은 어두워졌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밝아지는 부분이 있으면 어두워지는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럴듯한 상을 받았지만 오히려 마음 한구석은 위축된 내 인생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11월이 되니 슬슬 가을이 끝나가려는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눈부시도록 새빨갛던, 혹은 샛노랬던 나무들은 잎을 떨구고 짙은 갈색의 슬픔에 잠겨들었고, 나는 산으로 떠나고 싶으면서도 의지를 상당부분 잃고 있었다. 저번주까지만 해도 단풍이 기막혔을 텐데 이제 등산의 비수기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낙엽이 진 뒤부터 눈이 쌓이기 전까지가 바로 내가 생각하기로 등산을 해도 가장 볼 게 없는 시기다. 이럴 때 산에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사시사철 굳건한 바위와 철갑을 두른 듯한 소나무뿐인데, 그것들을 보자고 암릉을 탈 기분이 들지 않았다. 처음 가는 산이라면 또 모르겠으나, 이제 당일치기로 갈 만한 산은 대부분 오른 터라 시들해진 것이다. 물론 이후에 서울에도 안 가본 코스가 얼마든지 많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이땐 그랬다. 서울 근교 등산이라는 책 한 권을 다 읽어버려서 기대할 게 없다고 느끼는 상태였다. 내 인생에 기대할 게 거의 남지 않은 것처럼.
아주 긴 길을 걷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색채를 잃어가고 있을 것이다. 과연 내가 어느 길에서 몰입의 기쁨을 구할 수 있을까? 혼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그동안 스크랩해뒀던 등산로 자료를 뒤적이고 유튜브까지 살펴봤다. 그와중에 눈에 띈 것이 극히 최근에 올라온 등산 전문 유튜버 싼타TV의 영상이었다. 내용은 한양도성 순성길 환종주. 즉, 사대문과 사소문을 잇는 한양 도성을 따라 서울 중심부를 한바퀴 도는 코스 후기였다. 도합 18.6km에 소요 시간은 10시간 이상. 광화문에서 서울 서남권의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인왕산, 낙산, 남산을 모두 연달아 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산행을 떠올려보면, 순수한 초보로 산행을 시작한 나도 근래에 사패산과 도봉산을 연달아 올랐다. 7시간 반에 걸쳐 11km를 걸은 산행 코스였다. 앞뒤로 평지를 더하면 15km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보통 이틀 이상으로 나눠 걷도록 만들어진 한양도성길을 하루에 다 돌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산을 몇 번 오르긴 하지만 그래봐야 Y계곡 같은 지옥의 암릉도 아니고 거의 모든 부분이 말끔히 정비된 길이다. 심지어 도시에서 거의 벗어나지도 않아 편의점도 화장실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으니 산책을 좀 길게 하는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그렇게 코스를 정하고 굳게 마음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인간이란 습관과 게으름의 동물이다. 아니, 애꿎은 남들까지 끌어들일 일은 아니니 내가 습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게으르고 나태하고 어리석다고 정정하자. 다음날 아침,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늦게 깨어난 나는 오래도록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이유 첫째는 늦게까지 일하고 더 늦게까지 놀아버린 탓이고, 둘째는 종주가 그렇게 기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내형 인간인 나의 본성을 이기려면 생전 처음 보는 놀라운 풍경이나 충격적인 난코스가 필요한데, 도심속의 평이한 순성길은 솔직히 끌리지 않았다.
결국 10시 넘어서 나를 일으킨 것은, 이러다 영혼이 색채를 잃어버리겠다는 생각, 그리고 힘들면 중간에 그만두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늘 뭔가를 단단히 결심하고 잘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안되면 뭐 어떤가 하는 나태하고 물렁한 마음가짐인 모양이다.
서쪽 사람이니 서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걷기로 하고 돈의문 박물관마을 앞에서 11시 15분에 위치 인증을 하고 출발했다. 내 걸음속도를 생각하면 엄청나게 늦은 출발이었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대충 반만 돌고 다음에 이어서 걸을 작정이었으므로 완벽히 느긋했다. 아니, 느긋하기만 한 게 아니라 만사 귀찮고 쉬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는데...... 인왕산 쪽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동안 금방 날과 길을 즐기게 되었다. 평지에서 그리 높이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칙칙했던 가로수가 샛노란 은행잎의 향연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새파란 하늘과 금가루 같은 은행잎, 그리고 붉게 도색된 도로는 가을의 삼원색이라도 되는 듯 강렬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1.인왕산 가는 길이 금가루를 뿌린 듯했다.)
사직 근린공원으로 들어서서 본격적으로 성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은 잘 정비된 산책로로, 성곽 앞은 코스모스가 피어있었으며 성 너머로는 아직 울긋불긋한 안산이 보였다. 몇 년 전 가을에 북악산을 걸으면서도 절실히 느낀 것이지만, 아름다운 가을날 산 위의 성곽을 따라 걷는 기분이란 정말 각별하다. 눈 쌓인 겨울의 성벽이 고적한 애수를 불러일으킨다면, 낙엽으로 덮인 길가의 성벽은 기나긴 건조물이자 안내자로서 장엄한 따스함을 품고 있는 듯하다. 옆을 걷고 있노라면 짝사랑에 빠진 연애물 주인공처럼 ‘이 길이 계속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늘어지게 잠이나 잤으면’ 했던 욕구를 어느샌가 상실하고 성곽길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다행히도 길은 아직 무서우리만치 길게 남았다. 선조들에게 감사하자.
성벽을 따라 걷다 12시쯤에는 계단을 올라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이게 되었다. 어쩐지 점점 사람이 많아져 인왕산 오르막에 접어들자 줄을 서서 가야 할 지경이 되었는데, 사람이 많아지자 아니나다를까 고통 속에 이를 갈며 걷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중에서 한 커플이 특히 눈에 띄었다. 여자쪽이 이를 악물고 발밑만 보며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고, 남자쪽이 그녀를 두어번 부르며 옆을 좀 구경하라고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녀는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사이가 나쁜 것일까? 아니다. 숨을 몰아쉬면서 좁고 가파른 계단길을 겨우 오르는 와중에 풍경을 감상하려면 특수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훈련이란 바로 힘들때 멈춰서거나 계단을 반칸씩 오르는 것인데...... 당연해보이는 이 방법이 왜 특수한 훈련을 필요로 한단 말인가? 그것은 애초부터 ‘이 고난을 빨리 끝내버리고 쉬고 싶다’ 같은 욕구에 가득차 있는 사람은 좀처럼 속도를 늦출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일행이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수밖에 없다. 체력 소비가 회복보다 빠르면 결국 늘어져버린다. 일이 많고 바쁘다고 장시간 쉬지않고 붙들면 번아웃이 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써놓고 보니 나도 노동할 때는 별로 적절하고 온당한 방식으로 쉬진 못하고 있다. 등산에 익숙해진 만큼 노동에도 익숙해지면 좋으련만.
(2.등뼈같은 성벽과 서울의 풍경)
12시 12분쯤 되자 인왕산을 오르는 남서쪽 성벽 옆 계단의 중간쯤 도달했다. 녹색과 갈색, 그리고 노란색이 뒤섞인 산 가운데를 타고 흐르는 하얀 등뼈같은 성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멀리 남산과 청회색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산과 성벽과 도시의 모습은 늘 그렇듯 경이로웠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강렬한 색채가 곳곳에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이 순례에 한층 더 기대감을 품게 되었다. 역시 집에서 나오길 잘했다.
12시 23분에는 정상까지 한눈에 보이는 능선에 접어들었다. 서울 중심에서 가깝고 낮은 산이지만 주변이 탁트인 가운데 하얀 성벽이 이어진 인왕산은 여느 산 못지 않게 시원스러우면서도 웅장한 멋이 있다. 게다가 계단을 쭉 타고 올라가면 깜짝 코너처럼 나오는 암릉 구간은 짧아서 무난하면서도 밧줄이나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올리는 맛이 좋다. 도봉산 Y계곡이 매운맛 마라훠궈라면 여기는 친구가 끓인 컵라면을 한 젓가락 빼앗아 먹는 정도지만,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안 매운 것도 아니다.
(3.인왕산 능선은 가장 가까운 절경이다)
놀랄 정도로 북적이는 사람들을 따라 정상에 오르니 12시 38분이었다. 인파가 나이와 국적을 가리지 않아서 제법 놀랐다. 정상 표지 옆의 울퉁불퉁하게 솟은 바위에 중년의 백인 부부가 앉아 쉬는가 하면, 그 바위 위에 건장하고 쾌활한 백인 청년 남녀 둘이 올라가서 보디빌딩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놀드’라면서 웃어대며 사진을 찍는 그 모습은 유쾌하고 즐거워 보여 부러웠다. 확실히 저런 익살을 떠는 재미는 혼자선 맛볼 수 없다. 험산이나 매우 긴 길은 소수로 다니는 게 편리하지만 낮고 쉽게 갈 수 있는 산은 여럿이 즐기는 게 신이 나는 것이다.
잠깐 숨을 돌리고 창의문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에서 돌아나오다 동쪽의 하방에 난 샛길 같은 길로 빠져야 해서 놓치기 쉬운 길을 따라 가자니 제법 깊은 암산 길을 지나는 맛이 났는데, 이윽고 다시 성벽 옆길로 접어들자 눈앞에 또다시 장관이 펼쳐졌다. 하얀 선으로 보일 때까지 쭉 이어진 성벽 너머로 펼쳐진 북악산은 시원스러웠고, 산과 산 사이의 오밀조밀한 거리는 아직도 울긋불긋한 단풍에 물들어 화사하기 그지 없었다. 이 정도면 스위스가 부럽지 않다. 물론 스위스에 가면 생각이 달라지겠으나, 접근성을 고려하면 이곳이 단연코 압도적이다. 감히 말하건대, 가까운 풍경이 좋은 풍경이다.
(4.윤동주 문학관 방면 하산길의 눈이 시원해지는 풍경)
청운 공원 옆 포장 도로를 따라 빨간 양옥 기와 주택이 모여있는 청운 벽산 빌리지 옆을 지났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북쪽으로 길을 건너자 곧바로 북악산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계단을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대문이 바로 창의문.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서울 4대문 4소문 중의 북소문이다. 그리고 원래는 이 옆을 따라 순성길이 이어지는데, 이때는 길을 보수하느라 북악산 1번 출입구를 찾아 우회해야 했다.
(5.저지대에서 사실상 북대문 역할을 창의문.)
그리하여 창의문을 지나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골목을 거쳐 도로 옆을 한참 걸었다. 걷다 보니 바로 옆으로 사이클링하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줄지어 오르막을 올랐다. 그 모습을 보니 길을 잘못 들었구나 싶었는데, 커다란 음식점 옆으로 난 북악산 출입구를 발견하고 이곳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길을 찾아보니 도로 밑에 인도로 이어지는 굴다리가 있었다. 도로 왼쪽으로 왔으면 금방 알았을 것을 오른쪽으로 오느라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하여간 길이 입체적이면 지도도 별로 믿을 게 못된다.
1번 출입문부터는 잘 정비된 산길로, 화려함의 극에 달한 가을에 황량한 겨울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풍경이었다. 남은 단풍잎은 피처럼 붉었고, 떨어진 고엽은 주황빛이 도는 연갈색으로 말라 산속의 흙에 뒤섞여갔다. 쇠락하는 생명의 처참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였다. 나무가 우거져 검붉은 빛이 도는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스산했다. 잠시나마 가을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6.가을이 지나가는 풍경은 이따금 잔인하다)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금방 조그마한 주차장과 청운대 안내소가 나왔다. 나는 이 길부터는 와본 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몇 년 전에 친구들과 단풍 구경을 가자고 무작정 나서서 걸은 길이 바로 이 북악산이었다. 그때는 북악산의 관리가 제법 삼엄해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통행증을 받아 목에 걸고 가야 했는데, 이젠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과정이 간편해진 것은 물론 좋았지만 다소 심심하고 아쉬운 감도 있었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갈 수 없는 특별한 곳에 가는 기분’이 주는 쾌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 기관에서 나서서 근현대역사와 함께하는 트래킹 코스 100선 스탬프 같은 거라도 만들어 놓아주면 좋으련만.(계속)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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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 중 '필요한 사람에게 선풍기 보내기의 어려움'에서 발췌
아버지가 주워서 수리해 놓은 선풍기를 집 안 곳곳에서 끌어모아 보니 예닐곱 대는 되어 슬슬 보관의 한계에 봉착했음을 알게 되었다.(중략) 결국 내가 직접 갖다줄 수 있는 거리의 공공기관인 주민센터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도 좀 이상했다. (중략) 그런 행정 절차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중략) 주민센터에 무작정 전화를 걸어 봤다.(중략) 기증은 불가능했다. 새것이라면 가능한데, 중고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내게 남는 자원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데 나로서는 누가 절실한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공공기관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인데,(중략) 한참 고민하던 나는 밑져야 본전으로 옆동네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이번에는 반응이 달랐다.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고 2023년 2차 아르코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저의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입니다. 구매해주시면 저의 생계와 창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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