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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건해 Aug 24. 2016

침대에 누워 즐기는 산책의 나태함

만화 "우연한 산보"의 쿠스미 마사유키는 후기에 산책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이란 둘이 산책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중략)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짬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곧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요.

참으로 담백하고도 멋진 말이다. 산책은 어딘가에 가고 싶어서 걷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별 목적 없이 걷는 것 그 자체를 즐기는 행위이고, 따라서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을 하려면 좋아하는 사람과 공유하는 일상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산책이라는 행위를 즐기는 데이트는 같은 동네 사람, 같은 학교에 다니는 사람, 아니면 같은 집에 사는 사람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다. 요는 같은 동네나 같은 학교 사람과 연애할 확률은 높지 않으니 어쨌든 산책하고 싶으면 결혼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같이 산책하고 싶어서 결혼했다’는 말은 참 하잘것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소한만큼 낭만적이기도 하다. 

둘이 걸어요. 그럴 수 없으면 혼자 걸어요. 귀찮으면 전자 산책을 해요.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좀더 추상적이고 고도화된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다. 무엇보다 혼자 느긋하게 여기저기 목적없이 쏘다닐만큼 여유롭지도 않고, 그저 같이 걷는 게 좋아서 함께 있을만큼 서로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얘기는 자연히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어둡고, 쓸쓸하고, 자극적이고, 혼자서 아주 간편히, 내 방에서도 할 수 있는 산책.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예전에 웹서핑이라고 부르던 행위가 조금씩 변화해서 이제 전자산책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웹서핑의 사전적 정의는 “인터넷의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동영상이나 문서 따위의 정보를 열람하는 일”이므로 웹서핑과 전자산책은 구분할 필요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내게 두 행위는 미묘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 목적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바로 그 핵심적인 차이다. 


예를 들어 정말 뭔가를 사려고 쇼핑몰에 들어가거나 어떤 정보를 알아내려고 검색을 해버리면 그건 웹서핑이다. 또는 어떤 사이트의 특정 게시판에 들어가 재미있어 보이는 게시물들을 하나씩 클릭해서 보기 시작하면 그것도 웹서핑이다. 


그에 비해 전자산책은 완벽히 아무런 목적이 없고, 걸어가는 곳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보게 되는 산책이다. 동네 골목길을 걸어가며 눈에 보이는 걸 그냥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아무 말이나 마구 쏟아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온갖 사이트 정보가 마구 섞여있는 RSS피드가 그렇다. 


그리고 단순히 이미지 문제지만, 웹서핑은 앉아서 모니터를 보면서 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데 비해 전자산책은 침대나 소파, 안락의자 따위에 늘어져서 스마트폰을 보면서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후자가 더 육체적으로 나태한 전자적 활동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사회는 각박하고 환경은 혹독한 요즘은 혼자서도 부담없이 나태하게 즐길 수 있는 이 전자산책에 푹 빠져있다. 특히 침대에 누워서 자기 전에,  자다 말고 깨서, 자고 일어나 하루를 거부하며 즐기는 전자산책은 너무나도 나태하고 황홀하고 중독적이라 도저히 그만둘 수가 없다. 온갖 전자오락이 대유행하는 시대지만 아무 목적 없이 쏟아지는 정보의 향연을 날것 그대로 즐기는 이 행위의 즐거움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전자오락에는 대체로 목적이 있고 경쟁이 있지만 전자산책은 딱히 목적도 없고 경쟁도 없어서 열심히 할 이유도 없으니까 아무런 부담조차 없는 것이다. 산책을 더 세게, 더 잘, 더 빨리, 더 오래 하려고 악착같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냥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느긋하게 아무거나 보면 그뿐이다. 너무나 평화롭고 멋지고 에너지도 얼마 소모하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짓이다. 요즘 세상에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 짓이 몇이나 되겠는가?


베이퍼, 즉 전자담배 애호가로서 가끔은 전자담배를 피우며 이 전자산책을 즐기곤 하는데, 그러고 있자면 그 나태한 즐거움은 아주 극에 달한다. 헤로인을 하고 즐기는 섹스가 그렇게 극상의 쾌락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따위 에너지 소모적인 쾌락은 전혀 부럽지 않을 정도다(물론 반쯤은 거짓말이다). 새 정보를 끊임없이 머릿속에 쑤셔넣고 전뇌공간에 아무렇게나 공유하며 무해한 신경자극물질을 흡입하는 것처럼 나태한 신시대의 디스토피아적 쾌락이 또 있을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 전자산책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여기를 뒤적였다가 저기를 뒤적였다가 또다시 여기 뭐가 더 올라오지 않았나 돌아오는 식으로 즐기고 또 즐기다 인생의 의욕 자체가 저하되거나 수면패턴이 박살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저렴한 신시대의 쾌락도 어쨌든 돈을 벌어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라 최근에는 아예 잘 때 핸드폰을 최대한 멀리 두고, 안대를 쓰고 잠에 전념하고 있다. 전자산책은 전념할 필요 없이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데 잠은 최대한 열심히 자야 하다니,  이쯤 되면 잠이 휴식이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워진다. 삶의 여러가지 우선순위 문제 중 이것도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언제나처럼 생뚱맞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이런 전자산책도 한국의 방 문화에 쓸려들어와  ‘트위터 방’ 같은 게 생기지 않을지? 친구고 연인이고 할 것 없이 들어와서 아무렇게나 에어컨 아래 침대에 늘어져 각자 술을 마시며 질리도록 입닥치고 트위터만 하다 곯아떨어지고, 그러다 또 일어나 트위터만 하다 나가는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적어도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갈 용의가 있다. 




-후기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얘기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사람과 걷는 여름밤의 산책길이란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라, 다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아무때나 마음편히 내 손안의 기기로 할 수 있는 전자 산책과 달리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진귀하고 값진 경험이겠지요. 그런 상대가 있다면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히 하시길.


그런데 닌텐도 Wii 소프트 중에 제자리 뛰기를 하며 화면 안에서 가상 조깅을 즐기는 것이 있었는데, 조악한 면이 있어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란 생각을 했습니다. VR기기가 잘 보급되면 내 방에서 전자 애인과 함께 전자 산책을 즐기며 전자 담배를 피우는 것도 가능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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