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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다락능선과 가혹한 암릉세상(개정)

도봉산에서 손꼽히게 험한 길 위의 사람들

by 이건해



불암산에 다녀온 뒤로 북리뷰를 쓰면서 올해 초부터 붙들고 있던 그놈의 중장편 소설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애를 먹인 작품이 없는 것 같다. 과연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알 수 없어 고통스러운 가운데 약속 하나가 또 터졌다. 나는 이 정도의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 자체에도 넌더리가 났다.


5월 첫째주 일요일은 비가 올 예정이었으므로 나가려면 토요일밖에 없었다. 물론 직장에 매여있지 않은 터라 평일에 나가도 하등의 지장이 없지만, 주말에는 긴장을 좀 푸는 것으로 한 주의 리듬을 맞추는 게 습관이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편하게 시간을 쓰는 게 프리랜서가 불안정한 삶을 대가로 누릴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편하게 살아선 남들이 일할 때 놀면 노는 대로, 남들이 놀 때 일하면 일하는 대로 한심한 기분이 드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아무튼 토요일의 행선지는 도봉산으로 정했다. 그중에서도 길고 험난하다는 다락능선으로. 근래에 들어 줄곧 이리저리 험한 암릉만 택해왔으니, 이번에는 아주 고급자 코스로 낙인 찍힌 길을 가보자고 작정한 것이다. 슬슬 그런 중장거리의 고행을 맛보고 싶은 시기였다. 정신이 고통스러울 때는 육체의 고통으로 균형을 맞추는 게 효과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다락능선이 아무리 험해봐야 걸어가는 길인데 의상이나 비봉 능선만 하겠는가 말이다.



이날의 기온은 28도 가량으로 여전히 여름에 준하는 수준이지만 견딜만은 한 정도였고, 나는 저번과 비슷한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다만 이번에는 선글라스를 처음으로 챙겼다. 오버 선글라스라고 안경 위에 그냥 덮어쓸 수 있는 물건을 직구한 것이다. 그런데 과도하게 눈부신 것 정도는 막는 게 좋겠지, 하고 적당히 챙긴 물건이 써보니 여간 유용하지 않았다. 눈도 편할뿐더러 뿌옇게 흐려진 풍경도 약간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물건이 있다는 걸 20년쯤 전에 알았다면 눈도 좀 덜 나빠지지 않았을까...... 안경 쓴 사람은 어떤 선글라스를 맞추는 게 간편할지 답을 준 게 안경사나 등산 커뮤니티가 아니라 중국발 직구 사이트라는 게 얄궂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시기에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인근 상권 전체가 등산인들의 테마파크 같은 도봉산 입구를 오랜만에 지나자니 마음이 제법 들떴다. 북한산 입구도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있지만, 이곳처럼 좁다란 골목 곳곳에서 음식과 장비를 파는 모습을 쉴새없이 볼 수 있는 곳은 찾기 힘들다. 덕분에 도봉산을 갈 때면 내가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취미에 발을 들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내 주변에선 기행으로 여겨지는 일이 여기선 일상이 되는 것이다. 도봉산 상가를 지날 때면 게임에서 던전에 들어가기 전 채비를 단단히 거치는 기분이 된다.실제로는 딱히 더 살 게 없어 편의점에서 김밥 따위만 산다 할지라도.


물 흐르듯 모두가 걷는 길을 따라 걷다 박물관 우측으로 들어가 은석암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흙길과 약간의 데크길이 섞인 등산로는 아주 완만하고 평온했다. 숲은 저번 산행 때보다 더 짙은 녹색을 띠었지만 여전히 싱그럽고 맑은 느낌을 주었다. 이 길이 도봉산에서 특별히 힘든 길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완만한 길을 40분쯤 걷고 나자 슬슬 긴장감이 돌 만큼 길이 어지러워졌다. 나무뿌리와 바위와 흙이 마구 뒤섞이며 경사가 심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제법 굵직한 바위부터 사람보다 큰 바위까지 나타나 발을 이쪽으로도 옮기고 저쪽으로도 옮기며 복잡하게 산을 타게 되었다. 일종의 예고 같은 길이었는데, 북한산의 정신나간 능선들이 느닷없이 불지옥 같은 경사로를 들이대는 것에 비하면 다정하기까지한 난이도 조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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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지 않아 생각 없이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나저나 도봉산 인근이 언제나 북적대는 것에 비해, 이곳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다른 등산객이 종종 보이긴 했으나 한 명이나 두 명만 지나는 정도라 주변을 채우는 것은 인간의 말이 아닌 새소리뿐이었다. 지하철을 나선지 한 시간이나 겨우 지난 정도일 텐데 벌써 오지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어쩌면 많고 많은 등산 인구 중에서 바위와 밧줄과 난간에 매달려야만 하는 길을 굳이 찾아다니는 사람은 얼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인가?


그러나 집착적으로 굳이굳이 어려운 바위만 골라서 기어오르다 비봉능선 쪽에서 겪은 낭패를 다시 겪고 말았다. 바위에 달라붙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돌출부를 딛고 몸을 밀어올리다, 잡을 곳도 디딜 곳도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보지 않고 대충 감으로 발을 딛고 왔으니 올라가려 해도 내려가려 해도 어딜 디디면 좋을지 알 길이 없었다. 말 그대로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니 입안이 마르는 듯했다. 마치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프리랜서 작가가 된 내 처지와도 같았는데, 저번에도 성공적으로 탈출했던 것을 떠올리고 바위 위쪽을 살펴보니 적당한 홈이 있기에 손을 걸고 몸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것도 자승자박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창작 생활에도 이렇게 명확한 돌파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난처한 상황을 벗어나서 바위 위로 올라서자 드넓은 숲 너머로 교외의 작은 도시와 도로들이 내려다보였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는데도 제법 높이 올라온 것이다. 위험의 보상 치고는 소박한 풍경이었지만, 내가 광대한 바위를 딛고 기어오른 것 자체가 상당한 보상이었다. 힘들고 좀 위험한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있기도 했고. 인생의 보상이란 대체로 이런 식일지도 모른다.


바위 틈으로 용케 자란 나무들이 점점이 그늘을 드리웠고, 등산객 서너 명이 그 그늘에서 한가롭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숨을 돌리며, 이만하면 중급자에게도 권할 만큼 적절히 울퉁불퉁하고 재미난 길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


커다란 바위 이후로는 암릉과 숲이 뒤섞여 나왔다. 그런데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릉 경사는 난간을 잡지 않으면 벅찰 정도로 기울어 있는데다 정말이지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친다 싶을 때면 겨우 바위틈으로 자란 나무가 그늘을 씌워주는 식이었다. 은석암 근처 쉼터에서 다시 쉬면서 보니 이제 반쯤 올라온 셈이었다. 까마득했다. 기껏해야 서울 근교 산만 좀 다녀본 주제에 까불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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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암릉은 달궈져 뜨겁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한 것은, 그즈음에서 경사가 좀 완만해지고 바위들을 좀 지나면 다시 숲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저 앞에는 드높은 봉우리들이 보이고, 뒤로는 도시 풍경이 펼쳐진 능선을 지나자 데크길이 나오는가 하면 바위 사이를 빠져나가야 하는 길도 나오고 버려진 토치카도 나왔다. 짧은 시간에 이것저것 별것을 다 보는 만물상 같은 길이었다. 심지어 그 뒤로는 흙으로 된 오솔길이 잠시 이어지다 돌을 쌓아 만든 계단이 나왔다.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 하나는 좋았다. 그러나 그 즈음에서 나는 너덜너덜할 정도로 지치고 말았다. 암릉 이후로 비교적 완만하기야 했지만 그래도 줄곧 오르막을 걷고 또 걸으니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피로가 몰려왔다. 양갱과 사탕을 먹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나는 먹을 것을 남아돌 정도로 챙기지 않은 것을 처음 후회했다. 음식이 바로 에너지라는 사실을 이렇게 실감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힘들다는 것 말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래도 그런 탈진 일보 직전으로 비어버린 몸에 풍경은 잘도 스며들었다. 어쩌면 이 정도로 머리가 비어야 쉽게 감동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초보들이 산을 오르는 동안 풍경을 보긴커녕 고통으로 이를 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나는 지친 만큼 보상을 받아내려는 심리가 잘 작동하도록 자신을 길들여온 것인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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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은 봉우리가 지친 몸에 감탄과 함께 스며든다)


마치 밥 로스가 나이프로 물감을 그어서 그린 듯 깎아지르는 절벽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에 감탄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슬슬 정상까지 완만한 길이 이어질 법도 했는데...... 그럴리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방금 내 눈으로 보고 감탄한 봉우리보다 높은 곳까지 가야 하는 처지인데 완만한 길이 나올 턱이 있나. 당장 난간을 잡지 않으면 오를 길이 없고, 난간을 잡더라도 기어오르기 대단히 힘든 암릉이 펼쳐졌다. 마구잡이로 울퉁불퉁하거나 심지어 뾰족해서 사람이 다닐 법하지 않은 길에 대강 난간을 박아놓은 것 같은 길이었다. 대체 어느 정신 나간 작자가 이걸 길이라고 생각한 걸까 싶었는데, 사실 이런 길을 마주쳤을 때 침착하게 옆을 잘 보면 그 길이 가장 쉬운 경로가 맞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군가 산 타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이 ‘이쪽 능선으로도 가려면 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처음 길을 잡아놓은 것이리라. 욕할 게 아니라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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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라기보다는 조형물에 가까워 보이는 바위)


그 즈음에서 나보다 약간 더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는 일행이 있었다. 60대 언저리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 두 사람이었다. 친구인지 자매인지 모를 그들은 힘들다는 내색은 했지만, 그러면서도 딱히 쉬는 일 없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고 암벽을 올랐다. 중간중간 멈춰서서 오래도록 헉헉대던 나로서는 감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근지구력이나 체중에 비한 다리 힘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낫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과연 그게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장 지독한 절벽을 오르고 나니, 이번에는 이쪽으로 오는 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있었다. 내가 온 다락능선을 그대로 내려가려는 게 분명했다. 고작 몇 초전까지 지독한 길이라고 혀를 내두르는 중이었던 나는 도저히 그대로 보낼 수가 없어 말을 걸었다. 초행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내려가는 길은 너무 힘들 테니 다른 길로 가시는 게 낫겠다, 하고 충고하자, 그녀들은 멈춰서더니 중간에 빠지는 길이 있지 않냐고 물었다. 하지만 이 아래 그런 비상구 같은 길은 없다. 나는 그들에게 다시 되돌아가 다른 길을 택하는 게 나을 거라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마치 공포 영화에 나오는 미치광이 노인이 된 기분이었다. 잔혹한 비극에서 겨우 탈출해서 누가 지나갈 때마다 ‘돌아가!’라고 외치는 생존자 역할이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들 역시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경고에 귀기울이는 대신 지도를 좀 뒤적이더니 다락능선을 타고 하산을 계속했다. 거기까지 내려온 게 아까웠거나, 하산 후에 갈 곳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절대 못 갈 길은 아니지만 그 지독한 길을 뒷걸음질로 더듬거리며 내려가는 게 올라오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어렵고 무서우리라는 건 틀림없는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헤메고 실수하고 겪는 예정 밖의 고난이 더 마음에 깊이 남는 만큼, 그들에게 다락능선의 하산이 썩 좋은 추억이 되었길 바랄 따름이다


젊은 시절에 흔히 그럴 수 있듯 길을 약간 잘못 잡은 사람들과 헤어진 뒤로 조금 더 걸어올라가자 이윽고 포대능선의 전망대가 나왔다. 전에 망월사 방면으로 왔을 때는 높고 뾰족한 능선의 첨단부를 감탄 속에 걸으며 도착한 곳인데, 이날은 너덜너덜하게 지쳐서 도착한 터라 풍경이고 뭐고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앞의 도봉산 정상을 보는 심정은 약간 지긋지긋할 따름이었다. 등산을 하는 동안 이런 느낌을 받는 건 처음 같았다. 아직도 한참 가야 하나 싶어 막막하기도 했다. 슬슬 발바닥에서 고통이 찾아올락말락 하는 상태이기도 했고. 보통 어려운 과업을 해치워야 할 때는 목표까지의 과정을 분절해서 조금씩 하라고들 하는데, 산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얘기다. 눈으로 봐선 남은 거리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과 거리를 지혜롭게 계산하는 것보다는 정신없이 걷다보니 벌써 정상이네, 하는 식을 선호한다. 어리석은 방식이지만 그편이 의외성이 많아서 즐겁다. 물론 경험이 늘면 어림짐작이 저절로 정확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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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대능선 끝의 쉼터. 지붕도 나무도 없어 오래 쉬기엔 편치 않다)


잠깐 숨을 돌리고 다시 움직였다. 금방 Y계곡과 우회로 사이의 갈림길이 나왔다. 암벽을 타고 절벽을 기어내려갔다가 다시 기어올라 날카로운 능선 첨단부를 걷게 되는 Y계곡은 도봉산 암릉의 백미다. 아마 이렇게 오싹한 재미를 맛볼 곳은 좀처럼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우회로를 택했다. 거친 암릉이라면 이미 지쳐빠질 정도로 타고 왔기 때문이다. 암릉이라면 질리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우회로는 돌이 조금씩 섞인 오솔길로, 특별히 걷기 어려울 건 없었다.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따분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고, 심지어 생각보다 길기까지 했다. 목적지가 같은데 완만한 길이면 멀리 돌아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우회로를 택한 걸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매운맛에 중독된 나머지 심심한 음식을 맛없게 느끼는 사람 같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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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계곡 우회로 편하지 않게 시시하고 길다)


어쨌거나 부담은 없는 길이라 멍하니 걸은 끝에 자운봉 앞의 마당바위에 도착했다. 등산객 너댓명이 여기저기 앉아 쉬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대충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보통 마당바위는 먼 풍경을 조망하기 좋은 반면, 이곳은 자운봉과 신선대만 보게 되는 곳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그러면서도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편하다. 포근하고 고요한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 고요 속에서 어느 아저씨가 일어나더니 스마트폰이 안 켜진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보자니 부팅중에 문제가 생겨 정지한 모양이었다. 나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모두 볼륨 줄이기와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 강제로 재부팅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해봤는데, 어쩐지 먹히질 않았다. 옆에 있는 다른 아저씨가 해보겠다고 가져간 뒤에야 내가 누른 게 전원이 아니라 어시스턴트 버튼이었다는 걸 알았으나, 그때는 이미 그 아저씨가 재부팅에 성공한 뒤였다. 나는 조용히 다시 앉았다. 딱히 대단한 공을 세우고 싶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전화위복이었다. 스마트폰 주인이 크게 기뻐하면서 막걸리를 꺼내더니 재부팅에 성공한 아저씨에게 잔을 강권한 것이다. 아마 나였다면 거절하지 못해서 심히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산에서 조심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구나 생각하며 신선대로 도망쳤다.


막걸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사실 나도 산 정상에서 파는 막걸리를 보면 마시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절대 마시지 않는다. 어머니가 길에서 넘어져 어이없이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는 데다가, 나도 산에서 넘어진 경험, 발목이 꺾일 뻔한 적이 제법 있기 때문이다. 넘어져서 다친 건 아니지만, 무릎이 상한 뒤로 오래도록 치료중이라 어떤 상처는 영혼에 새겨진 듯이 도통 낫지 않는다는 것도 매일 느끼고 있다. 그러니 다칠 위험이 높아지는 선택은 피하려는 것이다. 다쳐서 산에도 갈 수 없게 되는 시간을 견디고 싶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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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탄하는 자운봉과 신선대의 위용)


험악한 길을 거쳐 온 터라 이날의 신선대는 오르기가 수월했다. 나는 정확히 4시에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허공에서 떠도는 듯 평온한 광경을 누리다 하산을 시작했다. 아무리 힘들어서 쉬엄쉬엄 왔다지만 초입에서 정상까지 네 시간이나 걸렸으니 느려도 정도가 있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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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등진 신선대. 저런 곳을 술먹고 오르면 안된다)


가급적 쉬운 길을 찾아 선인봉을 왼편에 끼고 내려가다, 갈림길에서 119 구조대 방면을 택해 꺾었다. 마당바위쪽은 전에 가봤기 때문이다. 이렇게 지친 와중에도 길을 다 가보려는 집착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지만, 이번에는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마당바위 쪽은 탁트인 경관이 멋진 대신에 경사가 약간 있는 반면, 119구조대쪽은 화장실도 있을뿐더러 길이 아주 평탄했던 것이다. 경관이야 좀 아쉽지만 이미 실컷 봤고, 이제 편한 길을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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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대 방면의 반쯤 정비된 길)


그나저나 그 와중에 신비한 사람들을 또 봤다. 20대 가량의 젊은 여성과 10대의 남동생 같은 일행이 하산하는 중이었는데, 가지고 있는 짐이라곤 동생이 진 책가방 하나와 여성이 한쪽 어깨에 맨 에코백이 전부였다. 크로스백까진 그렇다쳐도 도봉산 정상에 에코백을 매고 오다니, 가방이 흘러내리지 않게 하는 묘수가 있는 걸까? 정말이지 산을 즐기는 방법은 제각각인 모양이다.


6시 40분쯤 산을 완전히 빠져나와 대충 순대국밥집에 들어갔다. 순대가 좀 적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뜨끈한 밥알과 순대와 고기와 막걸리는 빠르게 몸에 스며들었다. 역시 험준한 길을 기어오른 끝에 누리는 정상의 평화가 더 아름답듯이, 참고 견딘 끝에 섭취하는 밥과 술이야말로 쾌락을 배가하는 것이다......라고는 했지만, 이날은 어찌나 힘들었는지 귀가길도 끝없이 길게 느껴졌고, 집에 와서도 뭐 하나 한 것 없이 잠들고 말았다. 건강도 체력도 심각하게 부족한 모양이다. 나는 한층 더 더워질 다음 산행은 좀 쉬운 곳에서 여유를 즐기며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주 쉽고 유명한 곳...... 이를테면 청계산이라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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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햇살이 강해지면 선글라스는 안구보호에 매우 도움이 된다.

산길의 난이도를 미리 알아보는 게 좋다. 국립공원공단에서 구간별 난이도가 색깔로 표기된 탐방안내도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미리 받아두지 않으면 산속에서 검색해서 받기 번거로운 일이고, 내 위치도 바로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지도앱의 등고선을 확인하는 게 제일이다. 등고선이 촘촘할수록 경사가 심하다. 경사도의 절대값이나 길의 험한 정도를 파악하긴 어렵지만 길을 택할 때는 도움이 된다. 참고로 등고선이 산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뾰족하면 능선, 반대로 산 중심으로 파고든 곡선이면 계곡이다. 일반적으로 능선은 험한 대신 경치가 좋고 계곡은 숲길인 대신 볼 게 없고 정비가 되지 않았다면 잔돌이 많다.

산속에서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가 오랫동안 일상생활이 불편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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