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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의 소박하지만 거친 바윗길(개정)

인기 경량 등산화로 쁘띠 돌산을 가다

by 이건해



거칠고 험하고 위험천만한 북한산 비봉 능선을 다녀온 뒤로, 일주일간 잡다한 일을 처리했다. 과연 누가 언제 볼 일이 있을지 없을지 알 길이 없는 중편 소설을 이어서 썼고, 평상시에 입는 밀레의 방수 재킷을 고쳤다. 15년은 더 되었을 이 방수 재킷의 목덜미쪽 안감이 약간 터졌기에 수선하려고 들여다보니, 매쉬 안쪽으로 보이는 심실링 테이프가 대거 떨어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버릇대로 중고장터 구경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하다가, 우연히 컬럼비아의 등산화, 뉴튼릿지 플러스를 발견해서 구입하고 말았다. 등산화를 더 갖고 싶다는 물욕이 작용했기 때문은 아니고, 그것이 워낙 인기 모델이라 대체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로 인기 모델인가 하면, 내 주변에서도 여럿이 사고, 접근성 좋은 산에 가면 청년이 신은 모습을 한 번쯤은 보게 되는 지경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네이버쇼핑에서 등산화를 찾다보면 7만원 전후로 부담없이 구할 수 있는 등산화 중에 가장 보기 좋은 게 바로 이 모델이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등산화의 형상에 기반했으면서도 날렵하고, ‘스포티’한 배색이 난잡하게 들어가지 않아 깔끔하며 색깔도 다채롭다. 컬럼비아라는 브랜드도 유명하고 싸고 예쁘고 평도 좋으니, 초보가 사지 않을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울 지경이다. 그런고로 나도 과연 이 가성비 등산화가 얼마나 좋은지 체험해보는 게 신발과 등산을 애호하고 글을 쓰는 사람의 책무가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이만하면 훌륭한 핑계다.


그렇게 구입한 컬럼비아 등산화는 표면에 갈라진 부분이 아주 약간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마음에 들었고, 발에도 맞았다. 이제 이 신발을 어디서 테스트할지 고민할 차례였다. 행선지를 택하고 그에 맞는 신발을 고르는 게 아니라 신발부터 택하고 행선지를 고른다니, 앞뒤가 바뀌긴 했지만 장비에 집착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법이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목적지는 삼성산으로 정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일부라고 할 만한 산으로, 481m라 별로 높지는 않지만 호되게 거친 암릉으로 이루어진 관악산을 닮아 만만치는 않다고 했다. 정확히 내가 찾는 산이었다. 처음 신는 등산화에 심한 문제가 있거나 밑창의 방어력이 낮아서 족저근막염 따위를 재발시키면 큰일이니 거칠면서도 짧은 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나는 그동안 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으면서도 삼성산의 이름만은 알고 있었는데, 그 이유란 엘지 모바일이 살아서 험난한 싸움을 이어가던 시절에 직원들이 경쟁에서 승리하자는 결의를 다지잡시고 한 퍼포먼스가 ‘삼성산’에 올라가 ‘사과’를 베어먹는 것이었다는 소리를 듣고 기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로, 모두가 알다시피 내가 애정하던 엘지 모바일은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농담으로 했을 때만 좀 재미있을까말까한 짓을 대규모로 저지르는 회사가 잘 돌아가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아무튼 날씨 좋은 토요일에 새 신을 신고 출발한 나는 남쪽으로 향했다. 삼성산은 관악산에 붙어있는 산답게 들머리가 제법 많았는데, 서남권에서 접근하기에 좋은 게 남쪽 방면이었기 때문이다. 관악산역에서 출발하는 북쪽길도 있긴 했지만, 그건 관악산에 속한 길이라는 느낌이 들어 하산로로 택했다.


그리하여 나로서는 드물게도 1호선 남쪽 방면에서 하차하여 제법 긴 시간을 걸었다. 들머리가 지도로 보는 것보다 상당히 멀었고, 길은 개천 옆을 따라 한적하고 낮은 주택이 주를 이루는 곳이라 도무지 대도시 같지 않고 낯설었다. 물론 이 산 저 산 다니다 보면 서울 근교라도 개발이 덜 된 곳을 자주 보지만, 관악산은 유독 친숙하고 심리적으로 가까운 산이라 그 인근도 개발이 많이 되었을 거라는 인식을 한 탓이다.


아무튼 조그만 텃밭과 일반 주택 바로 뒤에서 11시 반쯤 등산이라고 할 만한 상황에 돌입했다. 기온은 10도. 복장이고 뭐고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이 아무렇게나 다녀도 될 날이었고, 들머리에서 이어지는 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무난한 산길이었다. 어느 산에 가든 능선 초입에서 볼 만한 모습이랄까.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땅이 상당히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평이한 길이 계속 이어진다면 그건 서울 남부 최고의 미친 돌산을 담당한 관악산의 한 줄기일 수가 없다. 아니나다를까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적당한 크기의 바위를 쌓아 만든 계단길이 나왔는데, 돌의 크기도 계단 사이의 거리도 모조리 제멋대로라 계단길이라기보다는 너덜길의 사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예전까지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계단이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무릎 통증에 시달리고 보니 같은 거리라도 경사로로 내려가는 것보다 계단으로 내려가는 게 부담이 덜하다는 걸 알고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험하더라도 누군가 피땀흘려 바위를 쌓은 걸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뒤이어 제법 긴 암릉 경사로가 나오기도 해서, 나는 컬럼비아 뉴튼릿지의 접지력을 적절히 시험하며 걸음을 옮겼다. 여기까지 접지력만은 과히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엄청나게 좋아서 척척 붙는 것도 아니고, 불안하게 밀려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보통의 운동화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 아닌가 싶었다. 어지간한 곳은 무리 없이 갈 수 있지만, 심하게 경사진 바위나 젖은 노면을 딛고 아무 망설임 없이 체중을 다 싣기에는 불안감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수준이란 말이다. 그래도 100퍼센트 신뢰하고 바위를 오르게 해주는 신발은 비싸기 마련이니 10만 원이 되지 않는 가격에 이 정도라면 그럭저럭 수긍할 만하다. 애초에 일반 운동화도 제법 비싼 걸 생각하면 적당한 제품을 자사의 기술로 적당한 가격에 양산하는 컬럼비아의 수완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잠시 후, 전망 좋은 정자를 지나자 아주 독한 암릉이 튀어나왔다. 험하다는 말을 쓰지 않고 굳이 독하다고까지 하는 이유는, 그 바위 언덕이 경사도 심하고 요철도 많았으며 그 요철들이 전반적으로 생생했기 때문이다. 북한산이나 관악산의 암릉에 비하면 삼성산의 암릉은 매우 가까운 시기에 돋아난 것처럼 무섭게 날이 서 있었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관악산이 준공 50년차라면 삼성산은 5년차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너무 가파르거나 디딜곳이 마땅치 않은 등으로 위험하다고 할 만한 지점이 딱히 없었음에도 종종 신음을 흘리고 욕설을 씨근대게 되었다. 정말이지 맹수의 이빨 위를 걸어다니는 듯했다. 사실 날카롭기로는 나중에 가본 북한산의 칼바위 능선이야말로 스테고사우르스의 볏처럼 날카로웠지만, 거기는 날선 바위를 피해 디딜 곳이 있는 반면에 삼성산의 바윗덩이는 디디는 곳 잡는 곳 대부분 모가 나 있는 데다 정비되지도 않아 고역이었다. 암릉을 애정하는 나로서도 오래 걷기는 괴로울 길이었다.


그리고 삼성산의 바윗길을 더 험하게 느낀 데에는 등산화 탓도 있었다. 뉴튼릿지가 너무 가벼운 등산화였던 것이다. 거친 길을 걷는 동안 발바닥을 찌르는 충격을 막으려면 밑창이 단단하거나 아주 두꺼워야만 하는데, 뉴튼릿지는 어느쪽도 아니라 나이키 에어포스1보다도 방어력이 낮았다. 애초에 뾰족한 바위 위를 걸어다니라고 만든 등산화가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이만하면 순정품 테스트는 충분히 했다 싶어 깔창을 미리 챙겨둔 다이소의 아치 깔창으로 바꾸었다. 아치 부분이 더 단단하게 만들어진 물건이라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요컨대 뉴튼릿지는 제법 나쁘지 않으나 마구잡이로 울퉁불퉁한 험로에서 보완하지 않고 쓰기는 부족하단 말이다. 나는 이날 이후로 중족골까지만 오는 반깔창을 만들어(깔창의 발가락 부분만 잘라냈다는 말이다) 한겹 더 깔아서 신고 있는데, 이쯤 해놓으니 제법 만족스러울 정도로 견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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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높이와 험난함은 비례하지 않는다)


내가 은근한 악다구니를 쓰며 바위를 기어오르는 동안, 저 위에서 여성인 듯한 머리 긴 사람 한 명이 완전한 평상복 차림에 슬링백 하나만 메고 표표히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여유가 가벼운 짐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체력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보기에 좀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차림새는 면으로 된 후드티에 면바지였고 슬링백에는 물통 하나와 비상식량 한줌말고는 뭐가 들어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자니 옷이 손상될 정도로 넘어져보기도 하고 산악구조대가 산속을 뛰어다니며 고생하는 모습도 몇 번 목격한 나로서는 저녁에 헤드라이트를 끄고 다니는 차를 목도하는 기분이었는데, 등산객의 편한 모습은 그 산이 일상에 가깝다는 방증으로 생각하는 게 좋을 모양이다.


삼성산의 낮은 문턱을 증명하듯, 오솔길로 된 능선 위로 올라서자 상상 이상으로 등산객이 많이 보였다. 젊은 등산객 집단부터 가족단위까지, 표지판 근처에서 열댓 명은 본 것 같다. 관악산만큼은 아니더라도 삼성산 역시 많은 이가 찾는 산이었던 것이다. 다만 눈에 보이는 등산객 태반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는 점은 신발에 쓸데없이 깐깐한 나로서는 불만이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가장 대중적인 코스에 비해 압도적으로 길이 거칠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등산화를 갖춰 신은 건 산행 경력이 제법 될 중년 서너명 뿐이었으니, 초보일수록 부실한 장비로 다니며 고통받기 마련이라는 나의 지론은 여기서도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BTS나 뉴진스같은 아이돌이 등산화를 완전한 일상화로 소화해서 선보여야 좀 나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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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평화로워진 능선의 지도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다)


12시 40분쯤 그럭저럭 안정된 능선에 오른 나는 등산 스틱까지 든 등산 숙련자들이 올라서서 사진을 찍는 바위 위에 올랐다. 높지 않은데도 주변이 트여 경관이 시원한 곳이었다. 특히 남쪽은 근처에 높은 산도 건물도 없어 다소 허허로운 기분까지 들었다. 하늘이 맑은 데에 비해 가시거리가 짧은 탓에 기막히게 감탄할 만한 광경이 펼쳐지진 않았다. 산에 갈 때마다 길이 적당하고 보상이 훌륭하다면 친구들을 꼬셔볼까 생각하는 나로서는 좀 아쉬웠다. 초보가 흉악한 돌길을 오른 뒤에 숨을 돌리며 볼 때 숨이 트이긴 하겠지만, 산을 다시 찾고 싶어지게 할 곳은 아니었다. 그나마 멋진 건 가까이 있는 기암괴석이었다. 거대한 바위거인이 손을 오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리핀 같은 신화생물의 둥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암석은 상상을 덧붙일수록 멋이 있었는데, 생각해보건대 바위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산을 애정하게 될 초보는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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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샤흐 심리 검사처럼 무작위한 형상 속에서 익숙한 것을 찾는 게 돌 감상의 매력이다)


이렇게 초보 대상으로는 낙제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능선을 따라 걷자니 1시쯤 길이 사라졌다. 작은 바위 경사를 또 조금 오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러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자리에 먼저 온 노년 남성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내게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었고, 나도 저쪽에서 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한쪽에 작고 뾰족한 바위를 한 데 모아서 쌓아둔 것처럼 흉악한 언덕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경사가 심한 흙길 엇비슷한 게 있긴 했으나 어느쪽도 길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위 언덕은 프로메테우스를 묶어서 고문하기에나 적당하지 사람이 걸을 길은 아닌 듯했고, 옆의 경사는 내리막길일뿐더러 사람이 지난 것인지 아닌지 흔적을 알기 힘들었다. 물론 지도를 본들 길의 형상은 알 수 없는 터라 망연할 따름이었다. 정비가 덜 된 산이란 높든 낮든 이래서 무섭다.


그런데 옆에서 노인이 바라던 답을 구하지 못하자, 이쪽인가? 하며 바위 언덕을 기어오르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나만큼 길을 모르는 사람을 따라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의 신발과 지도를 번갈아 보며 기다렸다. 그의 신발은 고프코어 패션용으로 인기 있는 나이키의 로우탑 트래킹화였다. 나이에 비해 젊은 물건을 패션을 즐기시는군, 하고 편견에 찌든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잠시후 바위 언덕 끝까지 오른 그의 모습이 그대로 전진하여 사라졌다. 그게 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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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갈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바위 언덕)


나는 용기 있는 노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 저주받은 바위 언덕을 기어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 난이도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발로는 디딜곳을 찾고 손으로는 잡고 몸을 당길 곳을 찾아가며 오르는 그 길은, 정비된 밧줄도 난간도 디딤판도 안내문도 경고문도 없어서 유명한 등산로에서 보기 힘든, 그야말로 야생의 환경이었다. 나는 그곳을 기어오르는 동안 반지의 제왕 영화에 나오는 모르도르의 풍경을 떠올렸다. 물론 삼성산이 모르도르 수준이라면 심한 과장이지만, 예상보다 훨씬 거친 날것의 바위산을 더듬더듬 오르자니 그런 이미지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니 이보다 심한 길을 변변한 배낭도 등산화도 없이 기어오르게 만들다니, 이런저런 사고가 있었다지만 반지 원정대는 하플링의 능력을 과신한 게 아닐까?


이를 갈며 바위 언덕을 넘어가자 바위틈으로 흙을 밟으며 간신히 걸을 만한 길이 나왔다. 하산중인지 그 길을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아빠와 두 딸의 모습도 보였다. 아빠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딸들에게, 대뜸 ‘너흰 아빠 죽으면 어떡할래?’ 같은 흉흉한 질문을 했다. 상당한 위험이나 두려움을 안겨주는 상황을 마주하면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자식 걱정이 몰려드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거친 암릉에서 불안을 가중하는 말은 좀 참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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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자연을 모사한 모형처럼 아담한 학우봉)


삼성산의 대표적인 봉우리, 학우봉은 그 길에서 이어지는 거친 언덕 위였다. 보통 이런 봉우리는 몇 명이 앉아서 사진 찍을 공간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학우봉은 멋들어지게 치솟은 바위 틈바구니에, 마치 드래곤의 알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에 꼬불꼬불 자란 침엽수가 배경 일부를 장식해서 잘 만든 분재를 구경하는 듯한 공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삼성산은 모든 게 오밀조밀하구나 싶었다. 관악산의 험로를 닮긴 닮았는데 모든 부분이 4분의 3 이하로 축소되어 몸을 쉴 곳도 걸음을 뻗을 곳도 요상하게 부족한 느낌이랄까. 어쨌거나 평탄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온 나의 각오를 초월할 지경이었으니, 관악산 못지 않게 초심자에게 권했다간 욕먹기 딱 좋은 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상 속의 등산이 갖는 ‘오르막은 고되지만 아름다운 그늘 속에서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정상에 올라서면 온 세상이 다 보이는 등산’과는 몹시 동떨어졌다는 말이다. 험난한 경쟁을 이겨내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데에는 적합할지도 모르겠지만.......


학우봉에서 내려간 뒤로는 흙길이 이어졌다. 아무리 암릉이 재미있다지만 죽음의 돌산만 기어다녀서야 버티기 힘드니 나로서도 한숨 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실 체력 못지 않게 신발도 문제였다. 족저근막염 경험자가 컬럼비아 뉴튼릿지처럼 가벼운 등산화를 신고 오기에 부적합한 길이 바로 날카로운 바윗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삼 체감한 것인데, 등산화의 갑피가 애초에 두껍거나, 그게 아니라면 테두리만이라도 보강되어 있지 않으면 앞코를 바위에 찍거나 바위 틈을 디딜 때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런 점에서도 얇고 가벼운 뉴튼릿지는 기어다니는 길에 적합하지 않았다. 컬럼비아가 뭘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삼성산이 도시에 붙은 산 치고 지나치게 험한 것이리라.


흙길은 햇빛이 닿지 않는 그늘이라 그런지, 사람이 밟지 않는 곳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었다. 완연한 봄이 되기 전에는 아이젠을 챙겨 다녀야 할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2시쯤에는 흙길이 다시 끝나고 지독한 바위에 자리한 국기봉에 도착했다. 고도 477m의 삼성산 국기봉 옆에는 산악회에서 만들어놓은 표지석도 있어서 기념할 만한 곳에 도착한 느낌을 배가시켜줬는데, 이 봉우리의 형상도 전반적으로 강렬했다. 모조리 날카롭게 울퉁불퉁한 바위라 마음 놓고 발 디딜곳도 여의치 않은 와중에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국기봉의 기반과 표지석을 단단히 고정해뒀다는 게 감탄스러울 정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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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보고 기쁨이 샘솟는 건 험지만의 특별한 경험이다.)


그나저나 관악산과 삼성산에는 11개의 국기봉이 있어서 이것들을 모두 돌아보는 종주 코스도 존재하는데, 대체 국기봉은 왜 무슨 기준으로 세운 것일까? 등산객 사진 찍으라고 했다기에는 과한 일 아닐까? 나중에 찾아보니, 놀랍게도 이 이유를 100퍼센트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다. 다들 그냥 고대 유적처럼 옛날부터 있었겠거니 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나마 가장 확실해 보이는 유래는 ‘월간 산’의 칼럼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바로 1951년 한국전쟁 중 남쪽부터 봉우리를 탈환할 때마다 세운 태극기의 국기봉 위치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는 얘기다. 서울 산 곳곳에 전쟁의 상흔과 군부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빙성이 높다. 그간 나는 국기봉 종주를 재미난 엔터테인먼트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크 투어리즘의 일종이었던 모양이다.


국기봉을 지나쳐 내려가는 길에는 놀랍게도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비된 등산로의 흔적을 발견하니 제법 반가웠는데, 그 길도 결코 만만하진 않았다. ‘이런 곳을 걸어다니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바위였다. 물론 그래서 난간을 세워놓은 것이겠지만, 이곳이 초보에게 권장할 수 있는 길은 도무지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그 뒤로 정상까지 30분 가량을 걸었다. 충격적으로 거친 암릉도 눈 감고 걸어도 되는 오솔길도 아니라 적당한 수준이 다행히도 계속 이어졌다. 동쪽에 관악산 정상과, 본의 아니게 관악산의 랜드마크가 된 동그란 관측 시설이 보여 반가운 한편으로, 삼성산이 너무 쉬우면 관악산도 좀 둘러볼 생각을 했던 자신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산이야 원래 실제보다 멀어보이기 마련이지만 관악산 정상은 바로 옆 치고도 너무 멀어보였다.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는 암릉길의 연속에 좀 지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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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르지만 신묘하게도 자연적 계단이다.)


그러다 2시 36분이 되자, 또다시 보기에 놀라운 바윗덩이와 마주쳤다. 학우봉으로 오르는 바위보다는 작았지만 경사는 더 높은 바위로, 계단 엇비슷하게 울퉁불퉁해서 디딜 곳은 잘 마련되어 있다는 게 묘하게 신기했다. 바위를 오르기 전에 등산스틱을 갈무리하고 있자니, 관악산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있듯 등산복을 산뜻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성 두 명이 바위에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 다 색깔만 다른 파스텔톤 컬럼비아 뉴튼릿지를 신고 있는 게 아닌가. 등산화가 한두 종류도 아니고 한 번 사면 오래 쓰는것을 생각하면 동일한 모델이 셋이나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은 퍽 드물 것이다. 과연 젊은 입문자들이 선호하는 등산화라 할 만했다. 부디 두 사람이 통증에 시달리지 않고 등산에 재미를 붙이길 바라는데, 삼성산의 수수한 전망과 혹독한 등산로를 생각하면 쉽게 이루어질 소망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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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오지의 기지 같은 정상)


그럭저럭 적당한 수준으로 즐길만한 바위를 오른 뒤, 오래지 않아서 통신탑 근처에 도착했다. 바로 옆이 정상이었는데, 나는 길을 잘못 잡아서 돌 언덕 옆의 우회로로 내려갔다가 길인지 아닌지 모를 경사로를 거쳐 정상에 도달했다. 그러나 삼성산 정상의 정경은 아무래도 감격스럽다고 하기 부족한 것이었다. 일단 정상석이 묘비처럼 아주 매끈한 비석으로 되어 있어 거친 야생의 맛이나 세월의 흐름을 도무지 느낄 수 없었고, 게다가 바로 뒤쪽에 통신탑과 기지가 자리해서 도시를 벗어난 고지대의 정취라 할 만한 것도 희박했다. 반대편이야 관악산의 산세와 도시를 조망할 수 있어 훨씬 나았지만, 정상석이 보이게 사진을 찍자니 어째 버려진 군사 시설의 사진을 기록으로 남기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시설 주변에 철조망과 CCTV, 그리고 확성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니 크게 틀린 말도 아닐 것이다.


고양이 이마만한 정상에 오래 있을 수도 없는 터라 사진을 찍은 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시설의 철조망 바로 옆으로 난 숲길을 지나자니 평범한 산을 걸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음산한 느낌이 엄습했다. 죽음의 공간 바로 옆을 걷는 기분이랄까. 바위 언덕에 잘못 매달렸다가 오도가도 못하게 된 건가 싶을 때 받는 느낌이 더 무섭지만, 낡은 군사 시설 옆에서 받는 그 느낌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정상에서 벗어난지 10분 정도만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도로가 나왔다. 도로가 정상에서 이렇게 가까운 건 뒷동산을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도로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상당히 놀랍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택하지 않을 게 분명한 길이라도 엄청나게 쉬운 길이 있다는 건 어찌되었든 좀 맥빠지는 일이다. 나는 도로를 걸어내려가다 아무래도 시시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던 나머지, 중간에 나타난 데크 계단을 보고 지도를 확인했다. 도로를 따라가면 아주 멀리 돌아서 남서쪽으로 빠지고, 북쪽으로 나가면 깃대봉 국기대, 칼바위 국기대 방면이었으며, 데크 계단으로 내려가면 계곡길을 따라 서울대 공대 옆을 지나 관악산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기왕이면 다른 국기봉을 더 보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나는 계곡을 거쳐 빠르게 하산하는 길을 택했다. 지쳤기 때문이다. 분명 다른 산보다 특출나게 더 험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힘들었다. 등산화가 몸무게에 비해 부실한 탓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수면장애 때문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고 나온 것이다. 수면부터 등산의 준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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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길과 계곡의 전형같은 곳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택한 데크길을 내려간 뒤에는 계곡답게 너덜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심하게 거칠지도 길지도 않았고, 곁으로 흐르는 계곡물의 수량이 옆에서 즐기기 딱 좋은 정도였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 사이로 기우는 햇빛이 깊이 들어왔고,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쉴새없이 귀를 즐겁게 했다. 나는 팟캐스트를 들으려고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물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확실히 상상속의 등산에서 볼 만한 꿈결같은 산책로였다.


곧이어 계곡물 너머로 서울대가 나타났고, 이쪽 길은 포장된 산책로로 변했다. 사람도 부쩍 많아져서 문명사회로 완전히 복귀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게다가 곧 아름다운 호수공원까지 나타났다. 연못이라기에는 크고 호수라기에는 작은 그 공원의 호수는 나무가 자란 섬과 다리까지 품고 있어서 보기에 퍽 즐거웠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멋질 공원이었다. 줄곧 서울에 살았으면서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니. 이런 곳을 지금보다 훨씬 더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시절에 알았다면 좀 덜 모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지만, 대충 정한 길 끝에서 계곡과 공원을 발견했듯이 아무렇게나 굴린 여가생활이 산속에서 빛을 발견한 것에도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고 감사를 느끼는 게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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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돌산 옆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한 호수 공원)


공원을 지나 털래털래 걸어서 마침내 눈에 익은 관악산역에 도착하니 5시경이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이만하면 썩 나쁘지 않은 여정이었다. 하루만에 초보에게 권하지 않을 길과 권할 길을 하나씩 찾았고, 대중적인 등산화의 맛도 보았다. 그러고보니 등산화 얘기를 마무리 짓자면, 나의 컬럼비아 뉴튼릿지는 알고보니 지금 나오는 것보다 한 세대 전 모델로, 가죽 위에 코팅을 한 물건인데다 어디서 몇 년 처박혀있다 겨우 팔린 듯, 표면이 열화되어 등산 한 번만에 표면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이건 이것대로 글감으로 써먹었지만, 일상화로 써먹기에는 남 보여주기 민망한 꼴이 되어 영 아쉽다.

그리고 사족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등산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유튜브 따위를 뒤적여보니 삼성산도 제법 멋져보였다. 피곤해서 풍경이 잘 안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삼성산의 소박하지만 지도.jpg


*교훈

거친 암릉에는 강력한 등산화가 필요하다.

정비가 덜 된 비인기 산이 더 헤메기 쉽다.

숙면도 등산 준비의 일부다.

육체와 장비의 준비가 부족하면 산의 아름다움보다 육체의 고통이 더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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