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라는 아이템전의 준비물
등산을 시작한 초기에는 뭘 갖고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버린 시간이 제법 되고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1년 이상 지나고 나니 대체로 안정된 기분이 든다. 슬슬 뭘 꼭 사야겠다는 강박이나 충동에 시달리지도 않고, 중고 장터에서 싸고 좋은 용품을 발견해도 어지간해선 구미가 당기지 않으니 초보의 장비병에서도 거의 벗어난 셈이다.
그런데 등산 장비에 관해 여전히 도통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가 남아있으니, 바로 유튜브의 등산 고수들이 자신의 장비를 소개하는 걸 보면 고작 20리터급의 작은 배낭으로 다니곤 한다는 점이다. 나는 무슨 짐을 더 들고 다니기에 이렇게 짐이 많을까. 그 의문도 해소하고 등산 장비에 대해 간단한 소개도 할 겸 내가 배낭에 준비하는 물건들에 대해 정리해본다.
잡다한 물건이 굴러다니면 찾기 어려워서 작은 물건 몇 개를 파우치 나눠서 모아두었다.
여분의 양말
굳이 양말을 더 갖고 다니는 이유는 잘 알려져있다시피 눈비로 푹 젖은 양말을 신고 다니면 건강상 문제가 생길 확률이 폭증하기 때문이다. 양말이 머금은 수분이 피부를 불게 하면 몇 천 걸음만에 물집이 생기고, 젖은 채 추위에 노출되면 동상에 걸릴 수 있다. 동상 걸릴 정도로 추울 때, 눈비가 올 때 등산을 하지 않더라도 땀 때문에 양말이 푹 젖는 건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훈련소에서 매우 큰 물집이 생겨 고통받아본 나로서는 여분의 양말만은 꼭 챙길 수밖에 없다. 이 양말은 신고 다니는 것보다 얇은 울양말로 챙기는데, 이건 충분히 크지 않은 등산화를 신었거나 발이 많이 부었을 때 신발 안의 여유 공간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넣었다. 실제로 한여름에 양말이 땀에 젖어 마찰로 발바닥에 열감이 생겼을 때 여분의 양말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손목 보호대
다이소에서 파는 조절형 손목 보호대로, 손목이 시큰거릴 때 통증을 줄일 목적으로 넣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무릎이 다 나은 줄 알고 보호대를 대충 갖고 나갔다가 무릎이 시큰거릴 때 무릎보호대 대신 쓰게 되었다. 아무튼 산에서 어딘가 관절을 다칠 일은 종종 생기기 마련이고, 여차하면 부목 고정용으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발가락 워머
영하 5도쯤 되어도 장시간 정지해있지 않는한 발가락이 시릴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날씨가 급변하는 걸 겪어보니 안심할 일도 아니었다. 남산만 하더라도 한파특보가 날아들자마자 뺨이 찢어질 듯 추워진 적이 있었다. 게다가 시위에 나가보니 영상 5도인데 등산화를 신고도 두 시간만에 발끝의 감각이 없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일을 산에서 더 추울 때 겪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발가락의 체온을 유지할 비상 수단을 궁리한 끝에 은박 보냉팩을 대충 잘라서 발 앞쪽만 커버할 발싸개를 만들었다. 이걸 신고도 걸어다닐만 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상수단이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무게를 줄여야 하지만 쓰지 않을 물건도 갖고 다녀야 한다는 모순)
속건 손수건
극세사 폴리에스터로 만들어져 흡수와 건조가 빠르다는 손수건이다. 커다란 안경 닦이처럼 생겼는데, 파우치와 탈착형 줄로 연결되어 있고, 파우치 한쪽은 망사라서 대충 쑤셔넣어도 마르게 되어 있다. 파우치는 카라비너로 가방에 걸기 편한 구조다. 보자마자 이건 대단히 편리하겠구나 싶어서 샀는데, 일반 면 손수건과 엄밀한 비교를 해보지 않아 얼마나 잘 마르는지 체감하지 못했고, 손수건을 대충 걸어놓을 카라비너는 얼마든지 있는 터라 필수적인 물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장 돈을 덜 들여도 되는 부분에 돈을 쓴 것 같다.
등산화끈 여분
설마 등산화끈이 끊어질까봐 등산화끈을 더 갖고 다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등산화끈이 별안간 끊어질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등산화끈은 필수장비다. 특히 보아핏 등의 와이어로 조이는 등산화를 신고 다닌다면 이것이 고장났을 때 발을 조일 수단을 상비해야 한다. 헐떡거리는 등산화를 신고 험지에서 몇 만 걸음을 걸을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아이젠이 고장났을 때도 임시로 고정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이고, 등산화 밑창이 떨어졌을 때도 응급 수리에 요긴하다. 신발 밑창이 떨어지는 걸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보통 신발 밑창의 상태를 잘 살펴보고 신지는 않는 터라 오래된 등산화를 신는 사람은 언제나 밑창 분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 낡은 신발, 스스로 수선한 신발을 자주 신는 터라 등산화끈은 반드시 넣어둔다.
케이블타이
쉽게 풀 수 있는 타입으로 몇 개를 넣어다니는데, 그 이유는 등산화끈을 갖고 다니는 것과 거의 같다. 의외로 산속에서 뭘 고쳐야 할 일이 발생하곤 하기 때문이다.
진통제와 반창고
나는 재작년부터 종종 무릎 통증을 겪고 있는데, 괜찮은 줄 알고 나갔다가 여자 후배가 갖고 다니던 진통제를 얻어먹은 뒤로 상비약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절대 빼놓지 않고 있다. 심지어 주기적으로 새 약으로 교체해서 유통기한에도 주의하고 있다. 북한산처럼 큰 산은 곳곳에 약품 상자가 설치되어 있지만, 혼자 아플 때 약품을 찾아 산속을 헤매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반창고 역시 가벼운 찰과상에 대비해서 넣어두었는데, 다행히 피가 날 정도로 다친 적은 없어서 여름에 발가락에 물집이 잡힐 뻔했을 때 잘 사용했다.
손톱깎이
살다 보면 손발톱이 과도하게 길어진 걸 잊고 다니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데 하산하다 발톱이 자꾸 등산화에 찍혀 고통스러워진 뒤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찌할 것인가? 그래서 조그만 손톱깎이도 파우치에 넣어두었다. 나도 이게 별 걱정을 다하는 짓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손톱깎이는 피부에 박힌 가시나 벌침 따위를 뽑을 때도 유용하다.
새마을칼
스위스 아미나이프가 있다면 편리하겠으나, 그보다 가볍고 저렴하고 잃어버려도 부담없는 물건이 나을 것 같아 애용하는 물건이다. 70년대생들이 연필 깎을 때 애용한 터라 아직도 이 물건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곤 하는데, 박스로 사놓고 써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나에 300원 이하니까 가성비도 압도적이다. 여행을 다닐 때도 종종 어떤 상품의 포장이 뜯어지지 않아 난감할 때가 있는데, 이때 행복감을 줄 정도로 유용하다.
종이와 터치펜
등산중에 종이와 펜을 쓸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나는 종이 한 장과 펜을 굳이 넣어 다니는데, 그냥 아날로그 세대의 관성적인 행태다. 갖고 다니다 보면 스탬프 찍는 데에도 쓸 수 있겠지. 그리고 펜은 겨울이 되자마자 스마트폰 터치 기능이 딸린 펜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장갑을 한 번 벗기도 괴로운 극동계에는 스마트폰 조작을 터치 펜으로 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안경닦이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이라면 안경닦이가 없을 때의 난처함을 몇 번이고 겪어봤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바지 왼쪽 주머니에 안경닦이를 넣어 다니는데, 바지를 갈아입으면 까먹을 때가 너무 많아서 비상 장비로도 하나를 더 넣어두었다. 티셔츠로 절대 못 닦을 것도 없긴 하나, 나는 시력이 조금만 더 악화되면 기성 렌즈를 쓸 수 없게 될 수준의 고도근시라서 안경이 몹시 비싸다. 비싼 것은 아껴 써야지 어쩌겠는가.
보조 안경
안경이 망가질까봐 하나를 더 갖고 다닌다고 하면 과도한 걱정에 시달리는 것 같겠지만, 안경테가 별안간 부러지는 사고는 의외로 잦다. 거울에 코가 닿을 지경이 되어야 면도를 할 수 있는 고도근시자로서 안경이 없이 산길을 걷는 위험은 감수할 수 없어 예전 안경을 하나 넣어두었다.
조명 두 개
나는 워낙 아침을 늦게 시작하는 터라 어둠속에서 하산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보통 산에 일찍 다녀도 기상 악화나 조난 등을 대비해서 조명을 갖고 다녀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조명이 비상용이 아니라 일반 장비인 셈이다. 그래서 그동안은 직구한 조명을 그럭저럭 잘 썼다. 고리는 물론이고 모자의 챙에 고정할 수 있는 클립도 달린 물건이라 제법 유용하다. 그런데 최대밝기가 몇 분 유지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 며칠 전 루메나 헤드랜턴을 새로 샀다. 등산 장비 대부분을 중고로 싸게 구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큰 지출이었지만, 배터리가 들어가는 물건은 새 것을 쓰는 게 이롭고, 신뢰할 만한 제품을 사자니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아무튼 큰 지출을 한 덕분에 어둠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게 되었다. 직구한 조명은 비상용이 되었다. 참고로 비싼 조명을 써보고 알게 된 것인데, 밝기 유지 능력이야말로 상품 스펙에서 찾을수없는 저가와 고가의 결정적 차이였다.
서울둘레길 스탬프북
종종 둘레길도 가는데, 출발점에 도착한 뒤에야 ‘내 스탬프북이 어디있지?’하면 맥빠지기가 이를데 없다. 인증을 앱으로도 할 수야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뒤 스탬프북을 펼쳐놓고 도장을 쿵 찍는 손맛은 달성감을 배가시켜주니 스탬프북은 늘 갖고 다닌다.
• 벌레기피제
한여름에 산에 가보면 정말이지 지긋지긋할 정도로 모기가 따라붙는다. 걷고 있는 동안에 물리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지만,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 여름 내내 벌레기피제를 넣어 다닐 수밖에 없다. 다이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
• 썬크림
여름은 자외선이 강해서, 겨울은 눈에 반사되는 자외선이 있어서 썬크림을 챙겨 다니며 낮에 한 번 정도는 다시 바른다. 가급적 효과가 즉각 발생하는 무기질 기반(무기자차)만 쓴다. 그을린 피부를 아웃도어 활동의 훈장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것보다 노화를 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만큼 귀찮아도 어쩔 수 없다. 돈도 없고 잘생기지도 않았는데 피부마저 늙고 싶지는 않다........
• 티슈와 물티슈
용도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반적인 수준의 상비품이다. 그런데 되짚어보면 산에서 쓴 적이 없다. 쓰레기가 발생하는 게 싫어서 주로 손수건을 쓰기 때문이다. 물이 완전히 얼어버리는 겨울이 아니면 손수건을 빨 기회가 한두 번은 오니까 불편한 적도 없다.
• 일반 손수건
속건 손수건을 상비하고 다니지만 지극히 평범한 보통의 면 손수건도 갖고 다니지 않을 수 없다. 여름에 땀이 줄줄 흘러 목이 질척거리면 영 불쾌하기 때문에 목에 감을 손수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속건 손수건도 그렇게 쓰지 못할 물건은 아니지만, 잘보이면 좋을 거라는 생각에 형광 주황색을 샀더니 목에 감기에는 좀 멋쩍어서 땀을 닦을 때만 쓰게 되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결정이었던 셈이다. 그건 그렇고 첫 등산에는 타월과 비슷한 응원용 수건을 목에 두르고 다녔는데, 부피도 크고 물을 많이 머금는 대신 빨리 마르지 않는 것 같아 포기했다. 심지어 모자에 빨간색이 이염되었다. 안에 보냉제가 들어있어 여름에 냉수에 담가뒀다가 목에 감는 스카프도 써봤으나, 집에서 출발할 때 마르지 않게 비닐에 넣어서 가져가기도 귀찮고, 장시간 무더위 속에 산행을 하자니 그냥 미지근하고 척척한 천을 감고 다니는 기분이라 기본중의 기본인 손수건으로 돌아갔다.
• 손소독제
판데믹 이후로 손소독제를 항상 갖고 다니며 수시로 손을 닦는, 주변에서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유난스러운 사람이 되고 말았는데, 산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물이 없는 화장실에 다녀온 뒤나 뭘 먹기 전에는 손을 소독한다.
• 비닐봉지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일회용 포장재로 포장된 음식을 사먹으면 반드시 쓰레기가 발생하니 이것을 담아서 하산할 비닐봉지가 없으면 곤란하다. 게다가 지나는 길에 쓰레기가 또렷이 보이면 줍기도 한다. 비우지 못하고 집에 가져온 쓰레기 봉지는 비운 뒤에 씻어서 다시 쓰고 있다. 귀찮다는 걸 제외하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비닐봉지를 갖고 다닐 이유가 그밖에도 있다. 폭우, 폭설을 만났는데 등산화가 충분히 방어해주지 못하면 임시로 발을 싸서 젖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부채
늦가을과 겨울을 제외하면 부채를 갖고 다닌다. 산길을 걷는 동안 제갈량처럼 부채질을 하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지만, 잠깐씩 앉아서 쉴 때는 부채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충격적으로 심하다. 잠깐, 그러면 충전식 손풍기가 더 편하지 않을까? 아예 목풍기를 걸면 산을 걸으면서도 바람을 쐴 수 있어 좋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들어 나도 시험해봤는데, 조금이나마 시원할 정도로 세게 틀면 시끄럽다. 일상의 풍경 속에선 별로 거슬리지 않는 소리도 산속에선 정말이지 거슬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고, 자연을 즐기자고 들어간 산 속에서 모터 소리를 듣기가 싫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가볍고 충전하지 않아도 되고 조용하고 정취가 있는 부채가 낫다.
(문명세계를 떠나려면 보부상이 될 수밖에 없다)
• 온도계
기온을 아는 게 등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엄밀히 따져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활동량이 적은 시간이 긴 캠핑이나 백패킹의 경우는 온도를 확인하고 대처할 일이 많은 반면에 등산은 잠깐씩 쉴 때를 제외하면 지속적으로 움직이니 실제 온도와 내 몸이 느끼는 온도가 따로 놀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키링 형태의 온도계를 굳이 마련해서 갖고 다니는 건, 실제 온도에 따라 어떤 복장이 효과적인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온도계 장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온도계라고 다 맞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온도계와 도통 맞지 않는 온도계 하나를 내다버리고 이리저리 정보를 찾아보다 영국의 생존 전문가 베어 그릴스가 쓰는 알코올 온도계가 ‘썬 컴퍼니’의 제품인 것을 알고 하나를 사려다 선물받았다. 다이소의 전자식 온습도계와 비교했을 때 오차가 거의 없으면서도 작고 가볍고 전기를 쓰지 않는다는 게 멋지다.
• 보조배터리와 충전 케이블
GPS로 위치 추적과 기록을 하면서 수십 장의 사진을 찍고도 보조배터리 없이 8시간을 버틸 스마트폰이 많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보조배터리가 10000mAh짜리는 있어야 한다. 아마 그게 최소일 것이다. 나는 스마트폰 배터리가 노후된 기간을 오래 겪어서 10000짜리 보조배터리를 두 개 갖고 다녀야 겨우 안심이 된다. 스마트폰 배터리를 아예 교체하기 전에는 그것조차 모자랄 때도 있었다. 날이 추우면 배터리 효율이 상상 이상으로 떨어지니 유의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번거롭게 10000짜리를 두 개 갖고 다니는 것보다는 20000짜리 하나를 갖고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순수 무게만 따지면 그게 미세하게 이득이 맞다. 하지만 보조배터리의 무게는 대부분 배터리 셀의 무게라서 10000짜리 두 개와 20000짜리 하나의 무게가 몇 십 그램밖에 차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20000짜리 보조배터리는 스마트폰을 충전하면서 한 손으로 사용하기에 심각하게 무거워서 휴대용이라고 부르기 뭣할 지경이며, 어깨끈의 파우치에 스마트폰과 같이 넣기도 어렵다. 그리고 고장났을 때 하나라도 살아있는 게 안전하니 보조배터리는 둘이 낫고, 충전 케이블도 단선을 대비해서 여분을 챙기는 게 좋다.
• 선글라스
여름 휴가를 즐기는 이들은 몇 개씩 있는 선글라스를 나는 최근에야 겨우 장만했다. 고도근시인 것도 모자라서 여전히 시력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는 터라 도수가 들어간 선글라스를 비싼 값에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안경에 끼우는 클립형 선글라스와 안경 위에 그대로 덮어쓰는 오버 선글라스를 직구로 샀다(자외선 차단 기능이 없는 것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써보니 제법 만족스럽다. 클립형은 가볍고 어두운 곳에서 보관 걱정 없이 바로 위로 올릴 수 있어 편리하다. 오버 선글라스는 무겁지만 측면도 막아주고 바람에 강하다는 게 장점이다.
• 비옷
일기 예보를 보니 비가 올 것 같지도 않고, 비 오면 산에 안 갈 텐데 굳이 비옷까지 챙길 건 없지 않나.....라는 생각을 나도 종종 했다. 가벼운 비를 막아줄 재킷을 입고 다니니까. 하지만 예정에 없는 눈비를 세 번쯤 만난 뒤로는 비옷을 배낭의 일부로 여기기로 했다.
• 우산
높고 험한 산에서 등산 스틱을 쥔 채로 우산을 쓰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도시에선 비옷보다 우산이 편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름에 들머리까지 긴 시간 땡볕을 걷게 되면 산길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지치므로 우산을 써서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한다. 선티크에서 나온 110g짜리 경량 우산을 애용한다.
• 은박 담요(서바이벌 블랭킷)
집회용품으로도 각광받은 비상용품이니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복사열 방출도 막고 방수도 되고 빛도 반사하는 비닐이니 다목적으로 유용하다. 그렇다고 해도 비상용품인데다 접기가 어려워 꺼낼 일이 없는 게 제일이지만, 내가 쓰지 않더라도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갖고 다닌다.
• 스패츠(게이터)
스패츠는 물이나 눈, 흙따위 이물질이 신발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 바지 밑단이 젖는 것을 방지하는 물건인데, 대체로 긴 바지와 미드탑 이상의 등산화를 애용하는데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갈 일도 별로 없어서 써본 적이 없다. 그러나 유달리 흙이 많이 튀는 길을 경험한 뒤로 버려진 우산을 재단해서 비상용 스패츠를 만들어 상비하게 되었다. 눈이 녹은 진창길에서도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물론 설산을 간다면 일반적인 스패츠를 챙기겠지만.
• 아이젠
겨울철 아이젠의 필요성을 설명해서 무엇하리오. 이것도 그냥 배낭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무게가 제법 되기에 나도 꼭 필요하진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지만, 3월에 관악산 북서쪽 등산로로 하산할 때 녹지 않은 눈이 생각보다 많아서 낭패를 본 뒤로 마음을 크게 고쳐먹었다.
• 작업용 장갑
세상에 좋은 장갑이야 많고 많지만, 깜빡 놓고 나오거나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특히 험한 길에서 밧줄이나 난간, 혹은 바위를 맨손으로 잡다간 다칠 수도 있으니 비상용 장갑은 필수품이다. 이렇게 막 쓸 장갑 중에는 앞쪽이 코팅된 작업용 장갑이 제일이다.
• 넥게이터와 목도리와 버프
목을 따뜻하게 해야 한기가 덜한 건 당연한 얘기라 강조할 필요는 없겠는데, 요즘 내가 세 종류를 다 갖고 다니는 이유는 설명을 해야겠다. 일단 기본적으로는 목도리를 사용한다. 약간 덥다 싶으면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온이 떨어지거나 바람이 많이 불면 버프(멀티 스카프)를 착용한다. 이건 신축성이 좋아서 귀와 코, 뒷머리까지 덮을 수 있으니 얼굴이 시릴 때 유용하다. 그러다 더 추워지면 넥게이터를 한다. 이 물건은 두툼한 플리스 재질에 귀까지 덮어줘서 온기 보존에 유리하고, 경우에 따라선 끝을 조여서 모자로 쓸 수도 있다. 여기에 재킷 후드까지 쓰면 어지간한 추위는 걱정없다.
여름에는 속건 소재로 된 버프로 땀이 흐르는 것도 막고 자외선도 피한다. 귀에 거는 자외선 차단 마스크, 모자에 거는 마스크는 하도 걸리적거려서 쓰지 않게 되었다.
• 비상용 패딩
따뜻하게 입고 출발해서 벗은 옷을 집어넣고 다니면 옷이 추가로 필요할 일은 좀처럼 없겠지만, 옷을 덥게 입고 다니길 꺼리는 데다 옷이 젖거나 산 위가 생각보다 더 추울 때를 대비해서 경량 패딩을 배낭의 일부처럼 갖고 다닌다. 200그램이 되지 않는 경량 패딩이나 조끼면 무게도 부피도 부담되지 않아 좋다. 얼마 전에도 급변한 날씨 속에서 내 건강을 구했다.
• 조끼
여름에는 비상용 패딩 대신 조끼를 갖고 다니는데, 아예 바람막이를 걸치기엔 덥고 안 입기에는 쌀쌀할 때 유용하다. 덤으로 티셔츠가 너무 땀에 젖어 추악한 몸뚱아리를 내놓고 다닐 수 없을 때 가리개로도 쓰기 좋다. 한국이 아웃도어 시장에서 다른 나라보다 조끼를 선호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아마 이렇게 뱃살을 흉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 산행용 모자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여름에는 산행용 모자를 따로 챙겨 다니곤 한다. 볼캡 모자만 써서는 측면에서 내리쬐는 햇빛을 가릴 수가 없어서 둥근챙 모자, 즉 부니햇을 쓰기 때문이다. 잠깐, 그렇다면 애초에 집에서부터 부니햇을 쓰고 나가면 되는 일 아닌가? 왜 그걸 굳이 가방에 넣어간단 말인가? 이건 순전히 나의 자격지심, 혹은 컴플렉스 때문이다. 등산용 부니햇을 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등산객임을 주장하는 듯해서 산이 아니면 그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몸에 딱 붙는 사이클링용 옷이나 물놀이용 옷을 입고 도시를 돌아다니긴 영 민망한 것과 비슷한 이치다. 몸뚱아리에 등산복과 배낭을 걸치고 손에 등산 스틱까지 든 사람이 굳이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불합리하다는 건 나도 알지만, 기분상 어쩔 수 없다. 머리만이라도 고프코어룩으로 꾸며내어 젊음의 대오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 방석
일반적인 4단 접이식 방석을 쓰다가 8단 방석을 분리수거하다 주워서 쓰게 되었는데, 사실 쓸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대충 아무 바위 위에 주저앉는 버릇이 든 탓이다. 다만 한겨울에는 바위 위에 앉으면 꽁무니가 시려오는 터라 귀찮아도 방석을 쓰는데, 사실 진드기를 조심하려면 겨울이 아닐 때에도 방석을 쓰는 게 낫다고 한다. 앞으로는 은박 보온보냉 봉투를 쓸까 싶기도 하다.
• 스마트폰 파우치
배낭 어깨끈에 부착해서 스마트폰을 수납하는 데에 주로 사용하는 엑스피크의 조그만 파우치다. 그런데 생각 없이 싼 것을 샀는데도 파우치 앞쪽에 늘어나는 메쉬 망이 달린 게 대단히 유용해서 필수적인 부분임을 알게 되었다. 사탕 같은 작은 물건을 임시로 꽂아두기 좋을뿐더러, 여름에 파우치 안에 넣어두면 과열되기 일쑤인 스마트폰을 보관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이건 내 스마트폰이 너무 오래된 탓도 있겠지만, 아무리 좋은 스마트폰이라도 한여름에 GPS를 가동하면서 두툼한 주머니 안에 넣어두는 게 이로울 턱이 없다. 그런데 매쉬 망에 스마트폰의 절반만 고정한 상태로 아웃도어 활동을 즐길 수는 없는 터라, 고민 끝에 다이소에서 늘어나는 키홀더 줄을 사다 파우치를 세로로 감아 스마트폰 이탈을 방지하게 만들었다. 이것도 썩 마음에 드는 개조다.
• 식량
걸으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에너지 보충원인 활동식으로는 포도당 캔디와 양갱을 주로 먹는다. 커피 사탕을 먹을 때도 있다. 특별히 효과가 좋거나 맛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구하기 쉬워서다. 올림픽 이후로 에너지 젤이 각광받고 있지만 굳이 힘들게 구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애초에 네다섯 시간쯤 물만 마시고 다녀도 크게 불편을 느끼지 않는 체질이다. 식사로는 김밥, 삼각김밥을 주로 먹었는데, 어느날 편의점에 재고가 없어서 마지못해 소시지를 먹은 뒤로는 단백질로 전향해서 닭가슴살을 주로 먹게 되었다. 산속에서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혼자서 미지근한 닭고기를 물어뜯고 있자면 야생에 버려진듯 적적하지만 건강상 그것도 즐기는 수밖에 없다.
• 물통과 물통 파우치
원래는 아웃도어 물통의 대명사라는 날진 제품을 중고로 싸게 구해서 사용했다. 1리터 용량에 트라이탄이라 뜨거운 물을 넣어도 되고, 한 세트인 보온보냉 파우치가 성능 좋기로 유명해서 인기있을 만하다. 그런데 지고 다니는 배낭에 넣기에도 가슴에 걸기에도 너무 부피가 커서 더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에 더 가늘고 긴 750ml 용량의 스포츠 물통을 쓰게 되었다. 가늘고 가볍고 뚜껑을 돌려 열지 않고 빨아 마시는 타입이라 편리하다. 여름에는 이것 두 개에 500ml 음료수 하나를 가지고 다니면 8시간 가량을 버틸 수 있다. 그리고 물통 부피를 줄이는 김에 파우치도 배달에 쓰이는 은박 뽁뽁이를 재단해서 따로 만들었다. 여름에 배낭 속의 찬물이 서너 시간은 적당히 시원한 것으로 봐서 효과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배낭에 넣지 않고 어깨끈에 물통을 고정할 때 쓸 파우치도 딱 맞는 물건을 찾기가 힘들어 손바느질로 만들었다. 이것도 명절 선물세트 부직포 가방을 재료로 쓴 것 치고는 잘 되었다. 역시 남들이 다 쓴다고 나에게도 딱 맞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내게 꼭 맞는 장비를 발견하는 것도 등산의 주요한 묘미다)
• 음료수
식수를 부족하게 가져갔다가 생명의 위기를 느낀 적이 두 번쯤 있어서 항상 남게 가져간다. 아웃도어 활동을 할 때 물은 그야말로 연료이자 생명이니까 남았다고 후회할 일은 아니다. 나는 한여름 8시간 등산에 1500ml에 이온음료 500ml가 안정권이고, 땀이 거의 나지 않는 겨울에는 350ml가 안정권이다. 여름에는 냉수에 콤부차를 섞고, 겨울에는 보온병에 차를 끓여 담는다. 보온병 자체가 제법 무거워서 갖고 다니긴 싫지만, 냉기를 몰아낼 가장 좋은 방법이 더운물을 마시는 것이니 좋고 싫고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운동 중에 물 마시는 법을 몰라서 여름에 덥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경우가 많은데, 물은 한 번에 세 모금까지만 머금고 있다가 마시는 게 좋다. 내키는대로 마시면 흡수 속도보다 빠르게 공급하게 되는 탓이다. 과하면 땀이나 오줌으로 배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탈수를 유발한다고 한다. 한여름에 산에서 늘어져 쉬어본 뒤로 물은 늘 조심하게 되었다.
• 여분의 티셔츠
여름에는 여분의 티셔츠를 한 장 챙기기도 한다. 땀에 젖은 채로 바람을 맞으면 여름에도 저체온증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등산계에서 얘기하는 일반론인데, 내 경험으로는 티셔츠가 온통 땀에 절어버리면 보기도 흉하고 냄새도 나서 하산 후에 갈아입을 때가 더 많다. 사실 땀냄새는 메리노울이나 폴라텍 델타, 효성 에어로 실버 같은 원단으로 억제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일상으로 돌아갈 때는 말끔한 티셔츠를 입는 편이 보기도 좋고 몸도 산뜻해서 좋다.
• 카드지갑과 지갑
스마트폰으로 뭐든 가능하니 지갑 정도는 놓고 다녀도 무방하긴 하지만, 나는 써야 하는 교통 카드가 있어서 카드 지갑을 갖고 다니며, 게다가 사찰에 시주하려면 현금도 있어야 해서 지갑도 갖고 다닌다. 애초에 한국의 통신망 장애를 몇 번 겪어본 뒤로 전자결제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기도 하고. 그리고 멋스럽고 튼튼한 가죽 지갑은 그것만으로 무거운 터라, 얇고 가벼운 올에뜨의 지갑을 애용한다. 안쪽이 다 합성소재라 가볍고 모양도 좋아 일상적으로 쓰기에도 무난하다. 등산 전용으로 아무 파우치를 지갑 대용으로 쓸까 싶기도 했지만 지갑을 여럿 관리하기도 영 내키지 않아서 포기했다.
• 호루라기
누구의 천재적인 발상 덕인지 요즘 나오는 배낭들은 가슴 벨트의 버클이 호루라기로 되어 있는데, 내 배낭은 그렇지 않은 터라 작은 호루라기를 하나 찾아서 허리 쿠션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나도 굳이 필요할까 싶었으나 신고자를 찾아 도봉산을 뛰어다니는 구조대원들을 본 덕에 생각이 바뀌었다. 옆에서 얘기를 듣자니 발을 접질려 걸을 수 없게 된 신고자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조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잘못 넘어지거나 산짐승에게 물리는 사고는 피한다고 다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장 나도 얼마 전 평이한 뒷산 데크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발목이 돌아갈 뻔했다. 계단이 한 칸만 몇 센티미터 길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슬프게도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도 넘어지는 동물이다. 안전한 길만 다닌다고, 혹은 경험이 많다고 비상용품을 빼놓을 일이 아니다.
• 등산스틱
집에 있던 헬리녹스의 TL115를 갖고 다니는데, 한쪽에 156g밖에 되지 않고 접히기도 작게 접혀 배낭에 넣어서 이동한다. 이 물건이 이렇게 작고 가벼운 것은 재료가 우수한 덕도 있지만, 길이 조절이 불가능한 모델이라는 게 결정적이다. 즉, 키가 작은 덕에 늘어나지 않아 작고 가벼운 등산스틱을 쓸 수 있다는 말이다. 키가 작아서 좋을 일이 좀처럼 없는 만큼 이런 거라도 득을 봐서 다행이다.
• 배낭
배낭은 처음에는 블랙야크의 27리터짜리 알루미늄 프레임이 들어간 것을 사용했는데, 배낭만 1킬로그램 이상이라 무릎 건강도 걱정이고, 프레임 때문에 물건 들어갈 공간이 적게 느껴져 살로몬의 이름 없는 구형 배낭을 구입했다. 이건 테두리에만 플라스틱 프레임이 들어가있고 등판은 메쉬와 쿠션으로 되어 있어 가벼운데다 물건도 많이 들어간다. 용량이 33리터인데도 700그램이 되지 않는다. 허리 둘레 쿠션이 약간 부족하고 방수 원단이 아니지만 무릎 환자에겐 축복같은 물건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등을 더 시원하게 만들어야 하는 여름철이 아니라면 계속 이것을 사용할 작정이다.
이런 식으로 겨울철 장비를 챙기면 배낭은 4킬로그램 가량이 된다. 집에 남은 23리터짜리 배낭을 쓰면 살짝 더 가벼워지겠지만 그러면 물건을 추가로 넣을 공간 같은 건 전혀 남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대체 20리터짜리 배낭을 쓰는 사람은 뭘 어떻게 갖고 다니는 걸까? 새삼 궁금해져서 전문가의 영상을 찾아보니, 준비물은 나와 엇비슷했다. 심지어 컵라면과 재킷이 더 들어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내가 배낭 공간을 더 쓰는 건 등산스틱을 배낭 안에 넣어서 이동하는 탓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등산에 능숙해지고 정리를 잘 하면 더 작고 가벼운 배낭을 쓸 수 있을까? 물건 준비를 과하게 하는 성격상 어찌될지 모를 일이다. 살부터 빼는 게 무릎에 가장 나을 모양이다. 아무튼 두서없는 소개가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