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크루즈가 환영할 봉우리 정상의 석비
의상 능선에 다녀온 뒤로, 나는 영혼을 쥐어짜는 듯 쓰기 괴로운 공모전용 원고 작업을 이어서 했다. 대충 가벼운 마음으로 술술 쓴 작품이 잘 되고 머리를 쥐어짠 작품이 망하는 패턴을 생각하면 처참한 심정이었으나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등산용품 쇼핑을 하느라 시간을 아주 길게 버렸다. 골프웨어로 나온 방수재킷도 중고로 한 벌을 샀고, 콜핑의 심파텍스 하드쉘도 살까말까 한참 고민하다 강렬한 주황색으로 한 벌 샀다. 게다가 90년대 초에 나온 르카프의 등산화도 한 켤레 중고장터에서 샀는데, 사고 나서 돌이켜 보니 생활사 박물관을 차릴 것도 아니고 대체 뭔 짓인가 싶은 후회도 들었다. 심지어 두어번 신어보고 나자 밑창이 벌어져 접착 작업을 다시 했다. 싸고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고방식을 손봐야 좀 멀쩡한 사람이 될 모양이다.
산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다시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북한산의 눈덮인 의상 능선에서 계속 걷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터라 이번에도 북한산을 가기로 했다. 북한산 중에서 의상 능선보다는 짧지만 험하기로는 못지 않다는 비봉 능선으로. 이제 두 발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면 어려울수록 반가울 지경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엇보다 의상 능선에서 ‘그만 내려 가서 쉬고 싶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고 계속 걸어다닌 경험이 험로를 강렬하게 갈구하고 있었으므로 다른 코스는 생각할 수 없었다. 뇌내의 보상체계가 확실하게 변해버린 모양이다.
그나저나 출발하자마자 느낀 비봉 능선의 매력포인트 중 하나는, 바로 서울 서남권에 있는 집에서도 가기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6호선 불광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들머리인 터라 북한산성 탐방 지원센터 방면으로 갈 때처럼 버스를 오랫동안 기다릴 필요도 없고, 북한산보다 북쪽이나 동쪽에 있는 산에 갈 때처럼 오래 이동할 필요도 없었다. 산이 얼마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듣기엔 대중교통으로 명산에 갈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무슨 소리인가 싶겠으나, 야행성에 가깝게 사는 나로서는 해가 있는 시간을 충분히 쓰겠다고 일찍 일어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 이동 시간이 짧은게 아주 큰 장점이었다. 누가 뭐라하든 나는 ‘등산의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일찍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할 지경이니 어쩔 수 없다.
비봉 능선의 들머리는 불광역에서 조금 걸어 대호아파트라는 아파트 뒤쪽으로 가면 바로 나왔다. 불암산도 아파트 뒷길을 따라 올라가게 되어 있어서 높은 산으로 통하는 관문이라는 느낌이 도통 들지 않았는데, 이곳은 더 심했다. 그냥 아파트 뒷산의 약수터로 이어지는 길 같았다. 계단이 약간 더 가팔랐을 뿐이다. 여기가 북한산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건 주변에서 걷는 등산객들 몇 명뿐이었다.
10시 30분쯤 들머리에서 등산을 출발한 나는 등산 스틱을 짚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온은 5도 정도였을 것이다. 이만하면 겨울치고 온난한 날씨라 눈은 모두 녹아 없어진 뒤였고, 몸은 순식간에 더워졌다. 구입한지 15년은 되었을 밀레의 방수 재킷을 벗어서 가방에 고정하고 걸음을 옮겼는데, 15분도 지나지 않아서 기함할 만한 장면이 펼쳐졌다. 둘레길로 이어지는 데크길에서 벗어나자마자 바위덩어리와 흙과 나무뿌리가 5대 2대 3으로 뒤섞인 길이 이어진 것이다. 나무와 바위와 흙을 커다란 용기에 넣고 흔들다 대충 쏟아놓은 듯한 길이었다. 바위가 많은 길도 나무가 많은 길도 여럿 봤으나 이렇게 침엽수의 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길은 또 처음이었다. 나는 우리집 뒷산도 이렇게 거칠고 복잡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간단한 퍼즐을 풀듯이 발을 옮겼다.
(어릴 때 금 안 밟고 걷기를 하다 이제 나무 뿌리 안 밟고 걷기를 한다)
그리고 11시쯤 되자 길에서 흙이 사라지고 나무도 멀리 물러나 바위만이 펼쳐졌다. 이것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통 바위 능선길은 가운데에 바위가 솟아있고 좌우로 남은 흙에서 침엽수들이 자라있는데, 이곳은 흙과 나무가 대부분 시야 좌우 끝으로 물러날 정도가 되었고 눈에 들어오는 건 다 바위였다. 바위 여럿이 이리저리 솟은 게 아니라 그냥 돌 하나로 된 길이었다. 불암산 정상부근이나 북한산 백운대 가까이 가서야 나오는 순수한 돌길이 등산을 시작한지 30분만에 나온 것이니, 난간을 잡아야 오를 수 있는 경사로가 나오는 의상 능선보다 더 놀라운 면도 있었다. 돌길의 형상이나 경사는 대체로 험하지 않다는 게 그나마 평화로운 지점이긴 했으나 걷다 보니 굴곡이 적어서 한 번 미끄러졌다간 어디 하나 잡지도 못하고 한참 내려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불안하기도 했다. 울퉁불퉁하고 거친 길이 보기에는 무섭고 어떻게 오르나 싶어도 그 나름대로 친절함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험한 암릉 중에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한차례 오르고 나니 당장 꽤 높은 산에 오른 것처럼 뒤쪽 시야가 트이고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들머리부터 언덕길의 아파트에 있었으니 그럴만도 했지만 등산을 시작한지 40분만에 넓게 펼쳐진 돌바닥 밑으로 빽빽한 아파트들이 보이니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런 식으로 일상의 풍경을 빠르게 벗어나는 경험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을 모양이다.
그런데 바윗길을 따라 조금 더 고도를 높이자니 당장 한층 더 경악스러운 광경이 펼쳐졌다. 심지어 이번에는 산의 형상만으로 놀란 게 아니었다. 어디서 끝나는지 잘 보이지 않는 급경사를 이룬 바윗길 위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점점이 서서 갈지자로 움직이고 있는 게 정말이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산양 무리를 찍은 다큐멘터리 혹은 중국의 거친 산을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에서나 볼 만한 광경 아닐까. 북한산 숨은벽 능선에서는 봉우리 사이사이로 솟구친 바윗길을 자체에 놀랐다면, 이곳은 길 자체보다는 많은 사람이 이 기묘한 능선에 모여서 좌우로 오가며 바위를 오르는 모습에 놀랐다.
(서울에서 걸어서 피라미드를 오르는 기분을 맛보고 싶다면 비봉 능선을 추천한다)
나는 그 길, 아까보다는 더 울퉁불퉁하지만 그래도 잡을 곳은 거의 없는 경사로를 딛고 아주 천천히 고도를 높여갔다. 정해진 길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은 되지 않지만 어쨌거나 비교적 안전하게 걸으려면 갈지자로 이리저리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도 발이 미끄러졌다가 재수없으면 아파트 입구까지 내려갈 판이었으니까. 그 와중에 길이 맞는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 힘을 낭비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 역시 비경이라면 비경이라 즐거운 경탄을 느꼈다. 인간이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산을 오르나 하는 화두를 그대로 형상화한 듯한 경사로였기 때문이다. 끝이 잘 보이지도 않고 길고 험하고 직선으로 질러갈 수도 없는 길. 우리는 왜 제자리를 맴돌듯 더디게 우왕좌왕하며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 거창한 질문에는 대한 답은 누구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보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순간 눈앞에 있는 길 뿐이고, 내가 이 길을 힘들여 갈지자로 오르는 건 그게 재미있고 비교적 안전하게 고도를 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도를 높여 드높은 봉우리까지 가면 무엇이 있는지 이미 검색해서 봤더라도 몸을 혹사한 끝에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게 즐겁기 때문에 주말을 이렇게 바위산에 바치고 있는 것이다.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등산객들이 산양처럼 오른 경사로를 지나자 탁트인 바위 능선이 나왔다. 여기도 크게 솟구친 데다 가까이에는 나무가 없고, 그러면서 바위면이 넓어서 현실감이 떨어지는 장소였다. 능선을 좀 걸어 11시 44분쯤엔 족두리봉에 도착했다. 여기는 봉우리치고는 별로 솟지 않은 편이라 슬렁슬렁 사진을 찍고 돌아섰다. 인기 있는 코스답게 나 말고도 사람이 열 명쯤은 있어서 약간 북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파고들어 주변을 다 사진으로 담아두기는 아무래도 번거로웠다. 기억도 그리 또렷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슬슬 봉우리에서 둘러보는 풍경에 무감해진 모양이다.
그래도 그 풍경 중에 총알처럼 솟은 바위 봉우리가 또 하나 보이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그게 바로 다음 목적지인 향로봉이었다. 등산을 하다 보면 ‘내가 저길 간다고?’ 싶어서 경악하는 경우가 제법 있으니, 여기도 바로 그런 곳이었다. 이쪽에서 보기에는 완벽한 절벽면만 보이는 터라 도저히 걸어서 갈 수 있을 곳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등산의 멋진 점은 안되면 관두고 내려오지 뭐, 하는 심정으로 한 걸음씩 옮기고, 잡을 수 있는 곳을 다 붙잡으며 몸을 이동시키면 멀리서 볼 때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곳에도 대개 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불가능하겠다 싶으면 포기하면 그만이다. 딱히 무슨 상금이나 명예를 걸고 하는 시합이 아니니까 나쁜 일은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 다음에 갈 곳이 하나 더 남게 될 따름이다.
향로봉은 족두리봉에서 제법 하강한 다음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그것만 해도 은근히 맥빠지는 일인데, 곧이어 어마무시한 경사로가 나왔다. 경사로의 길이 자체는 짧지만 마구잡이로 울퉁불퉁하고, 그러면서 마땅히 잡을 곳은 보이지 않는데다가, 심지어 바위로 된 표면 위에 시루떡처럼 은근히 모래가 깔린 길이었다. 약간 과장하면 바위 위에 깔린 모래라는 건 한 알 한 알이 베어링이나 마찬가지라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발이 미끄러지지 않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걸 나는 몇 번 넘어지면서 배웠기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이런 길에는 밧줄이라도 내려놓는 게 인지상정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어찌되었든 내가 갈 길이긴 했으므로 등산스틱을 접어버리고 천천히 경사를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래알 밑의 바위 표면이 아주 거칠어서 미끄럽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길이 맞기는 한지 의심되도록 막되어먹은 암릉)
이렇게 길이 또렷하지 않아서 어느 곳을 밟고 어디를 잡으며 움직여야 하는지 파악하는 걸 길을 ‘리딩’한다고들 하는데, 등산의 숙련도와 리딩의 실력이 안전을 좌우하는 건 바로 이런 곳임을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경사로가 끝날 때쯤 단차가 심한 길로 잘못 접어들어 버린 탓이다. 돌아서 내려가기도 어렵고 더 올라가기는 잡을 곳이 만만치 않은, 그런 인간 통발 같은 곳에 서자니 입안이 말랐다. 팔다리가 조금만 더 길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짝사랑하던 여자애가 키 큰 남자 좀 만나고 싶다는 소리를 해서 충격받은 일을 제외하면 키가 작다고 아쉬워 한 일이 (뻔뻔스럽게도) 없는데, 산에 오르니 새삼 신체조건이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저러나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싸구려 장갑과 낡은 등산화가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에 튀어나온 곳을 붙잡고 무릎으로 바위를 쓸어가며 발끝이 걸릴 곳을 찾아 간신히 바위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추락의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영화 주인공 같은 심정을 살짝 맛본 셈인데, 주저앉아 겨우 숨을 돌리자니 옆에 다른 길을 찾아서 안온하게 걸어가는 청년들이 보였다. 나 원 참, 글 쓰는 것도 그렇지만 정말이지 아무도 알아줄 이유가 없는 고생을 자초하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생이다. 이 잘못된 미니 등반에서 그나마 의미를 찾자면, 길을 잘 봐가면서 다녀야 한다는 교훈, 등산복 무릎과 엉덩이, 그리고 등산화 앞코가 튼튼하게 보강된 이유를 확인했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나저나 이때까지만 해도 두 손까지 적극적으로 써야 하는 코스가 나올 때마다 등산 스틱을 접어서 배낭 옆 주머니에 꽂고 다녔는데, 배낭을 풀어서 내리는 게 번잡하다는 이유로 어지간하면 등산 스틱을 손에 들고 다니다, 그것이 난간이나 다리에 걸리는 일을 몇 번 겪은 뒤로는 아예 마음을 고쳐먹고 배낭 어깨끈 위쪽에는 카라비너를, 아래쪽에는 고무줄을 고리 모양으로 묶어놓아 등산 스틱을 빠르게 고정할 수 있게 개량했다. 등산 스틱의 끈을 카라비너에 집어넣고 아래쪽을 고리로 한데 묶어 임시 수납을 하게 만든 것이다. 고가의 등산 배낭에 이런 부분이 있기에 따라 만든 것인데 상상 이상으로 편리하다. 이만하면 사지도 못할 장비 구경에서도 건질 게 있는 셈이다. 세상에 보지 못한 풍경이 있다는 걸 알아야 갈 생각을 할 수 있듯이 편리한 물건이 있다는 걸 알아야 따라서 만들 생각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향로봉까지 심한 오르막과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을 번갈아 오르고 나자, 향로오거리라 이름붙은 갈림길 근처에 또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이 보였다. 의상 능선도 봉우리 근처에 사람이 많았는데, 여기도 유명한 봉우리에 오르기 전이나 후로 쉬면서 태세를 정비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 인근은 용케 침엽수가 우거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이 자라긴 했지만 비교적 평탄하고 넓은 바위지대라 여럿이 자리를 깔고 쉬기에도 적합했다. 그러나 나는 탁트인 경치를 보면서 쉬고 싶기도 했고, 복작거리는 게 싫어서 바로 향로봉에 올라갔다.
(점으로 보이는 비석과 눈덮인 산의 정경)
거기엔 건장한 남자 한 명이 나보다 먼저 와서 앉아있었다. 사이클링 복장처럼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은 그는 인생의 고난과 영혼의 근본적 고독을 곱씹는 것처럼 조용히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서, 나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고 좀 떨어진 자리에 앉아 바람막이를 걸치고 싸늘한 삼각김밥을 먹기 시작했다. 물을 낭비하지 않도록 가급적 맵거나 짜지 않은 재료로 골라서 사온 삼각김밥은 차갑고 싱거운 양념밥이었으나 무거운 몸을 고도 500미터까지 끌고 온 뒤에 쉬면서 씹다 보니 밥알 하나하나가 부서지며 천천히 스미는 듯했다. 그러면서 시야 대부분을 점유한 산세를 보자니 안도와 감탄의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반쯤 흰 눈이 덮인 채 진녹색과 밝은 갈색으로 겹겹이 포개진 능선 너머로 남산과 남산 타워가 희미하게 보였다. 내가 아는 곳을 멀리서 보는 일은 사소하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인 구석이 있다. 광대해 보이는 범위를 내 삶의 궤적이 채웠다는 사실이 새롭기 때문이다. 흔히 ‘자기 자신을 한 발 떨어져서 보라’는 조언을 하는데, 자신의 궤적을 물리적으로 멀리서 보는 것도 해볼 만한 일이다. 도시 생활자는 자신이 두 발로 이룰 수 있는 일을 실감할 일이 적기 때문이다.
밥을 다 먹을 때쯤 어디선가 개 두 마리가 바위 위로 올라왔다. 하얀 개 한 마리, 노란 개 한 마리로, 얼핏 진도개같은 모습이 엿보였다. 어릴 때부터 동네 마당에서 키우는 개들에 시달리고 살아서 개만 보면 불안감을 느끼는 나로서는 도무지 반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등산객들이 먹을 걸 줘서 인간을 적대시하지는 않는 듯했지만, 들개가 언제 돌변해서 사람을 공격할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가급적 개들과 거리를 두며 봉우리에서 내려갔다. 이번에는 무사히 지나쳤지만 언제 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개를 유인할 물건이나 대처 방법이라도 미리 생각해둘 일이었다.
(먹이를 찾아 봉우리를 어슬렁거리는 개들)
향로봉에서 내려가서 얼마 걷기도 전에 비봉으로 오르는 입구가 나왔다. 비봉은 신기하게도 여기부터 비봉이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게 울타리를 쳐놨는데, 그 옆에는 추락 주의 팻말이 아주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도봉산 Y계곡 같은 곳보다 더 경고가 진지해서 나는 제법 호들갑이 심하다고 건방진 생각을 했다. 그 옆에 그림같은 삼색 고양이가 있어서 사진을 찍고 울타리 사이로 길을 올랐다.
(눈 덮인 북한산의 삼색고양이)
그리고 울타리를 지나친지 30초도 되지 않아서 경고가 왜 그렇게 크게 적혀 있었는지 깨달았다. 비봉은 그동안 본 그 어떤 봉우리보다도 아무렇게나 생겨서, 험악한 정도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미취학 아동이 찰흙을 뭉치고 놀다가 별안간 공격적 충동에 휩싸여 찰흙덩이를 손가락으로 찌르고 주먹으로 두드리고 바닥에 세워놓고 돌을 던져 맞춘 것 같은 꼬락서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로 마구잡이로 울퉁붙퉁하면서도 안심하고 발을 디디거나 손으로 잡을 곳이 별로 없어서, 나는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봉우리의 테두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르니 절대 못 갈 정도로 사람 다닐 길이 좁은 건 아니었지만, 여긴 정말 바깥으로 미끄러지면 죽고, 안쪽으로 미끄러지면 어딘가 부러질 곳이라 입안이 다시 메말랐다.
(두려움을 마주하고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들)
그렇게 비봉의 중간 지대까지 오르자 일단 넓은 공간과 ‘코뿔소 바위’가 나타나서 숨을 돌릴 수는 있었다. 그 유명한 코뿔소 바위는 봉우리 바깥쪽으로 뾰족하게 솟은 바위였는데, 코뿔소 머리를 딛고 뾰족한 코 부분에 올라앉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빌딩 옥상 난간 위에 걸터앉는 사람처럼 위기 감지 능력이 고장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진저리를 치고 다시 봉우리쪽을 보았다. 물론 이쪽도 가관이었다. 비봉 정상으로 오르는 바윗덩이들에는 상식의 범위에 들어가는 길이 없었다. 요 근래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졌다고 해도 절대 길이라고 안내해주지 않을 만한 바위가 바로 내가 갈 길이라는 사실은, 두근거리는 한편으로 절망적이었다. 다들 제정신으로 저걸 오르내린단 말인가? 경사가 40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 바윗덩이를 밧줄도 없이 걸어다니라고 놔두는 건 아무래도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였다. 농담이 아니라 여기를 맨손으로 오르는 장면은 탐 크루즈의 미션 임파서블에 넣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코뿔소 바위와 비봉의 모습에 경악한 등산객)
이 정도면 충분히 다 왔으니 ‘슬슬 사진만 찍고 내려갈까, 굳이 위험을 감수할 건 없지’하는 생각을 이 정도로 진지하게 한 적이 여지껏,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없다(관악산 국기봉이 더 무서웠지만 그건 엄밀히 따지면 지나가야 할 코스가 아니었다). 그 정도로 정신나간 코스로 보였다. 오르는 건 어떻게 오른다 쳐도, 안전하게 내려올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내려오지 못할 바위를 함부로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이날 이미 겪었으므로 물러나는 편이 맞을 것이었다. 자기 수준에 맞는 길을 택하고 포기할 것은 빠르게 포기하는 게 훌륭한 등산인의 자세라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니까.
그런데 꼭대기에 있을 진흥왕 순수비를 찍으려고 자리를 찾으며 구경하고 있자니, 젊은 남자들은 물론이고 중년 여자들도 크게 망설이지 않고 줄지어 바위를 기어오르는 게 아닌가. 게다가 불룩한 바위 둘 사이로 파인 홈을 따라 좌우를 손발로 번갈아 딛고 내려오는 청년도 있었고, 심지어 그 급경사를 태연히 서서 두 발로 걸어내려오는 노년 남자도 보였다. 노인은 입을 벌리고 황당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신발이 좋은 거니까 아무 거나 신고 따라하면 안된다’고 친절히 설명했다. 하기야 아무리 신체 능력이 발달해도 맨몸으로 바위에 붙는 접지력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방사능 거미에 물려서 영웅이 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이날 나는 그 노인이 신고 있던 캠프라인 등산화에 뒤지지 않는 접지력을 확인한 바 있는 네파의 낡은 부틸고무창 등산화(단종)를 신고 있었으므로, 경사진 바위를 타고 오르는 접지력만큼은 뒤쳐지지 않는 셈이었다. 어차피 요령있게 어딜 잡고 오를 코스가 아니었기에 나도 저길 못 오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오르는 길보다 문제가 되는 건 내려오는 길인데, 등산화를 생각하면 노인처럼 그냥 천천히 걸어내려올 수도 있을 테고, 그게 어렵다면 옆길로 온 청년처럼 두 손 두 발을 다 쓸 수도 있을 듯했다. 능력에 대한 검토와 올라갈 방법, 내려올 방법 결정이 끝났다면 남은 건 실행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바위를 올라간 뒤에 약간 거리를 두고 바위를 딛고 올라섰다. 처음에는 중심을 낮추기 위해 허리를 숙였지만, 두어 걸음 디뎌보고 발이 척척 붙는 것을 실감하니 자신감이 생겨 몸을 일으키며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주변 사람과 독자들이 지겨울 정도로 하는 얘기지만, 접지력이 빼어난 등산화가 필요한 이유란 바로 이런 것이다. 지독한 환경에서 발디딤이 흔들림 없고 확고한 것을 체감하면 안전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공포도 망설임도 극복할 수 있고, 평소에 느낄 수 없는 극한 환경의 억압을 벗어나는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거친 길에 일부러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느끼고, 자유를 향유할 때 인간은 문명과 삶의 굴레가 나를 근원적으로 구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돌아올 방법부터 생각하고 가야할 길)
나는 좀 낡고 약간 작은 감은 있어도 훌륭한 등산화를 잘 다듬어 신고 오기를 잘했다고 느끼며 첫 번째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다른 곳보다 비교적 평탄한 바위 위를 걸어서 나아가자 한층 더 심각한 고비가 나타났다. 정상으로 가려면 아주 큰 단차를 넘어서 다음 바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다음 바위층이 거의 목까지 올라올 지경인데다 손으로 잡고 몸을 당길 곳도 보이지 않아서 오른쪽에 길게 튀어나온 바위의 요철을 잘 디디며 기어올라야 했다. 아래쪽은 큰 요령 없이 오를 수 있기에 여기까지 왔더니만, 이번만은 요령 없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클라이밍 선수들이 붙잡고 디딜 곳을 궁리해서 암벽을 오르듯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관악산 육봉, 팔봉 코스가 장비 없이 가는 코스 중에서 이런 식으로 어렵기로 유명하다는 말은 들었는데, 비봉도 이런 곳이 숨어 있을 줄이야.
여기까지 온 이상 일단 벽에 붙어보기나 할 일이라 앞 사람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했다. 내 바로 앞 사람은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나처럼 특별한 요령은 없는 듯 바위의 홈 여기저기에 발을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도 잘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자니 곧장 위에 있던 등산객이 와서 잡을 곳과 디딜 곳을 하나하나 짚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금방 바위 위로 올라갔고, 나도 뒤를 따를 수 있었다. 물론 보는 것만으로 바로 따라할 수 있었던 건 아니라 위의 등산객이 다시 도와줬다. 남의 도움 없이 오를 수 없는 길을 혼자 내려갈 수 있을까 심히 걱정이 들긴 했는데, 아무튼 오르고 나니 분명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긴 했다. 아무리 험해도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인 이상 어딘가에는 누군가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찾거나 만들어내서 안정적으로 딛거나 잡을 곳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위 위로 기어오르고 나니 드디어 비봉의 정상부가 나왔다. 여기도 아주 평평한 것은 아니라 여기저기 굴곡과 경사가 있었으나 특별히 주의하지 않아도 걸어오를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에 바로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져 있었다. 부분적으로 깨져 있는 회색의 비석은 드높은 봉우리의 꼭대기에, 드넓은 산과 도시를 배경으로 굳건히 자리하고 있어서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 사람 키에 가까운 비석을 여기까지 지고 올라와서 단단히 세웠다는 사실보다는 외계문명이 내려와 지구를 살피고 간 기념으로 두고 갔다는 상상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로 자리를 지키는 비석)
그러나 분명 이것은 사람이 세운 물건으로, 6세기에 신라 진흥왕의 업적을 기려 세운 비석 넷 중 하나다. 즉, 정비된 길도 고무 밑창 신발도 없고 산속에는 호랑이가 뛰어놀던 시대에 여기까지 올라와 비석을 세우고 내려갔다는 말이다. 고생했을 사람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 이후로도 비석을 관리하는데에 들어간 노력이 엄청났다. 일단 6세기에 세워진 이 비석은 오래도록 풍화되며 무학대사에 얽힌 비석으로 전해졌는데, 비문 연구에 심취했던 추사 김정희가 1817년에 탁본을 떠서 진흥왕순수비임을 알렸다. 이후로 제 이름을 찾고 자리를 지키던 비석은 6.25 전쟁 때 총탄까지 맞아 대단히 걱정스러운 지경까지 되었는데, 보존을 위해 일단 1972년에 근정전으로 이동되었고, 1989년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체가 계속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을 쓰고 있었고, 이를 허물면서 경복궁에 있는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이전했다가, 미군 기지 골프장이 반환되어 2006년에야 세워진 지금의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다사다난하기 이를데 없다.
그런 한편으로 원래의 자리에는 표지석이 놓였는데, 2005년 유홍준 교수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비석을 정밀 복제하여 표지석을 대체함으로써 나처럼 그 이후 비봉에 방문한 사람들이 천 년 넘은 비석을 마주하는 듯한 감동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로만 보면 해프닝의 나열처럼 정리되지만, 실제로 비봉을 오르기도 해보고 사진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니 그 많은 사람들이 비석을 조사하고 옮길 때마다 암벽을 타고 자재를 나르며 지독한 고생을 했겠구나 싶어 숙연해진다. 먹고 사는 데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 비석을 만들고 해석하고 보존하고 실제 현장을 재현하는 일에 엄청난 비용과 노력을 투입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시간의 한 부분을 보고 만질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는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 정상의 광경을 유튜브로도 볼 수 있지만 굳이 직접 가서 체험하는 일에 가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봉우리 끝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의 모조품은 그렇게 인간이 추구하는 무형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나보다 앞선 여자분이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내게도 사진을 부탁하기에 촬영을 해드렸다. 다리가 길어보이도록 발끝을 화면 아래쪽에 붙여서 찍어달라는 매우 구체적인 지시까지 있었다. 나도 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써볼 정도로 좋은 사진 남기는 일에 열의가 있는 터라 그 정도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있는 편이 오히려 찍는 마음이 편하다. 사진을 찍어드리고 나니 당연하게도 그분도 내 사진을 찍어준다고 해서 멋쩍게 사진을 찍혔다. 물론 다리가 몹시 길어보이는 사진이었다.
일단 사진부터 찍히고 나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는데, 비봉 정상의 바위는 길고 뾰족한 편인데다 난간도 하나 없어서 좀 오싹한 감이 있었다. 북한산 숨은벽 능선의 바위도 좁긴 했지만 이곳은 비석이 놓인 쪽이 솟은 구조로 경사와 단차가 있어 체감상 훨씬 좁았다. 멀리 도시가 펼쳐진 모습에 대한 감흥은 비교적 희박했다. 가시거리가 짧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금방 온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예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아마 올라오면서 살펴봤던 요철이 금방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잡을 곳 없이 걸어올라와야 했던 아래쪽 경사 부분은 사람들이 빈번히 올라오기에 포기하고, 그 옆의 바위 틈 좌우를 번갈아 짚고 디디며 기어내려왔다. 여기도 넘어졌다간 여기저기 심하게 찧으며 바위틈에 떨어질 듯해서 마음이 놓이는 길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속도가 붙은 채 한없이 굴러갈 곳은 아니라는 게 위안거리였다. 험한 길에는 험한 길 나름대로 장점이 숨어있는 것이다.
비봉에서 내려오고 나자 이날의 등산을 마쳐도 좋을 듯한 기분이 되었다. 의상 능선을 걸을 때와 전혀 다른 상태였다. 의상 능선이 덜 힘들어서는 아니고, 진흥왕 순수비 때문이었다. 그 무엇보다 명확한 목적지로 작용하는 유적지를 봤고, 그 직전과 직후의 과정이 클라이막스에 걸맞은 수준의 난관이었으니 좋든싫든 여정이 완결된 셈이다. 여기서 더 오래 걷는다해도 만족감이 더 커질 것 같지 않았으므로, 나는 능선을 조금 더 타고 가면 나오는 사모바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관복의 모자인 사모와 닮았다고 하지만 그닥 감이 오지 않는 사모바위는 삿갓 위에 큰 혹이 달린 듯한 모양으로, 여기도 올라가려면 올라갈 수 있는 포토스팟인 듯했다. 그러나 나는 사진만 찍고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보기만 했다. 일단 앉고 보니 확실히 지쳤기 때문이다. 육체활동 자체보다 긴장감으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게 더 지치는 요소인 듯 싶었다.
(웅장하지만 바라보는 것으로 족한 사모바위)
능선길을 쭉 따라가면 승가봉, 문수봉으로 가서 의상 능선과 합류하고 보국문에서 편안한 길을 따라 하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멀고 쉬운 길보다는 쉽지 않더라도 가까운 길을 따라 하산했다. 중간에 승가사에 들러 마애석가여래좌상을 볼 수도 있었지만 쉬고 싶어서 이것도 포기하고 돌아나왔다. 구기 계곡으로 내려오는 하산 길은 사진도 없고 기억도 없다. 깜짝 놀랄 정도로 편하지도 않고, 화가 치밀 정도로 심한 너덜길도 아니었을 것이다.
날머리에서 나오고 보니 개천을 두고 좌우로 저택과 빌라 따위가 늘어서있고 길은 좁아서 내가 자주 접해온 서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동네였다. 평소라면 갈 이유도 볼 일도 없는 동네와 골목길을 접하는 것 역시 등산의 소소한 낙이다. 나처럼 산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들을 따라 가자니 금방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산에서 내려오면 국밥과 막걸리로 기력을 보충하는 게 마땅한 절차지만, 아무리 그래도 4시 반에 식사를 할 수는 없어서 버스에 몸을 맡기고 귀가했다. 그렇게 나는 북한산의 고급자 코스를 또 하나 끝냈다. 아주 느린 속도로 때때로 바위 위를 기어다니며, 전에 없는 두려움도 느꼈지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해 지기 전에 산행을 마친 것이다. 이만하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나는 만족감 속에서 다음 산행을 꿈꾸었다. 다시 돌산을 기어오르고 싶다. 하지만 세 번 연속으로 고급자 코스를 갔다간 쉬운 코스를 즐기는 법을 까먹을지도 모르니 다음에는 좀 쉬운 산을 골라서 완급 조절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교훈
-등산용품처럼 특수한 목적을 가진 물건을 싸다고 사지 말자.
-들개를 조심하는 법을 미리 알아두자.
-오르내릴 방법이 보이지 않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는 길은 포기하는 게 안전하다.
-발끝을 화면 끝에 맞추면 렌즈의 왜곡 덕분에 다리가 길어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