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하지만 등산의 맛이 가장 엷은 산
북한산 다락능선을 다녀온 뒤로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 이어졌다. 일단 정기 모임이 하나 해산되었다. 그리고 연재중인 수필을 모아서 모처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할 계획을 세웠지만, 원고를 받아줄 출판사에서 원하는 형식과 내 글이 잘 맞지도 않았고, 의사소통도 시원치 않아서 앞뒤 말이 달랐다.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외국 공항 직원과 이어지지 않는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 계획은 포기했다.
이래저래 만사가 넌더리나는 2주였다. 그러고보니 심지어 나라에선 해외직구를 막는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잡다한 등산용품을 직구로 사오던 나로서는 뭐가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긋지긋한 만사를 다 제쳐두고 5월 중순의 일요일에 다시 산을 찾기로 했다. 비교적 가깝고 오르기 쉬우면서 가본 적이 없는 산....... 청계산으로. 청계산에 대한 악명은 익히 알고 있지만, 영원히 안 가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피곤한 김에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험산이 좋다 해도 다락능선처럼 혹독한 곳을 연속으로 가기는 지쳐 있었고.
그리하여 12시에 양재로 갔다. 청계산이라면 청계산 입구역에서 가는 게 가장 일반적인 루트지만 계단이 조금이라도 적은 루트를 가고 싶어 고른 게 양재화물터미널 방면 들머리였다. 청계산 입구역보다는 가깝기도 하니 더할나위가 없었다.
이날의 온도는 29도. 체감은 그보다 더워서 햇살은 따갑고 걸음을 걷다 보면 슬슬 땀이 날 정도였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먼 발치의 코스트코가 자아내는 이국적인 정취를 느끼며 터미널 옆의 들머리에 도착했다. 이곳은 엄밀히 따지면 청계산의 줄기에 있는 굴바위 산인데, 청계산으로 바로 이어지는 데다 계단이 적어 청계산의 무한한 계단을 조금이라도 피해보려는 사람에게 권하는 루트라 했다. 다만 유명한 산으로 이어진다기에는 너무나도 입구가 별안간 나타나는 데다 사람도 없어서 영 등산을 시작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산은 산이다. 나는 등산스틱을 꺼내어 쥐고 걷기 시작했다. 길은 정말로 완만한 경사가 대부분에 계단이라곤 나무를 깔고 흙을 다져 만든 것 정도로, 부담없이 걷기에 더할나위가 없었다. 강한 햇살을 나무가 대부분 가려 초록빛이 밝게 빛났는데, 그 사이 어딘가에서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약간 힘을 쓰는 정도의 산책을 하기에 이상적인 길이었다. 지병으로 요양중인 소설가 체력을 회복하려고 걷다가 나물을 캐던 마을 처자를 만날 것 같은 길이랄까.......
(편안하고 아름다운 뒷산처럼 이어지는 길)
나는 숲속의 평화를 누리며 지난 금요일 저녁에 갔던 대학 후배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대단히 근사하고 아름다운 결혼식이었지만, 귀가할 때는 결혼식따위 다시는 방문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이 나에게 평화로운 자유의 공간인 반면 타인에게 지옥같은 고난의 공간일 수 있듯이, 축복에 찬 사교의 장이 나에게는 1초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은 고문의 장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차츰 암담해졌다. 위축감이 들었다. 나는 자신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지독한 험로를 찾아다니는 이유를 새삼 실감했다. 그런 길을 기어오르자면 생각이란 모조리 다 지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치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사라진다. 산과 감각만이 남는다. 인간으로서 향유하기 힘든, 생각하지 않는 자유가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다녀야만 하는 산길에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무난하기 짝이 없어 번뇌가 스며드는 길을 걸어 12시 55분에는 옥녀봉에 도착했다. 그곳은 난간과 나무벤치로 둘러싼 작은 마당으로, 산속의 주요한 봉우리에 도착했다는 실감 같은 건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다. 봉우리 주변의 나무가 우거져 주변 광경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등산객은 많아서 북적거리는 편이었고, 한켠에는 행상이 내려놓은 아이스박스와 돈상자가 보였다. 활짝 열린 상자 옆에는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알아서 계산하고 아이스박스는 닫아달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모든 게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둘레길 수준의 길을 한 시간 반 정도 걷고 행상을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도 못했고, 봉우리 풍경이 이렇게 심심할 줄도 몰랐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벼운 차림으로 모인 사람들을 보건대, 도전의 문턱이 뒷산처럼 낮은 것이 청계산 최고의 매력인 듯했다.
(매봉으로 향하는 갈림길. 시원한 그늘에 많은 등산객이 모여있다)
거기서 또 한 시간 가량을 걸었다. 찬란한 초록잎과 볕뉘의 향연 사이로 한동안 흙길이 이어지더니, 매봉으로 향하는 오르막이 시작되자 여기부터 본 게임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계단길이 펼쳐졌다. 가파르진 않지만 지긋지긋하게 길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돌문바위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린 그 계단길이 어렵지 않은데도 길고 지치는 이유를 나는 잘 알고 있다. 숲 말고는 도통 볼 게 없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은 동행자와 잡담을 하며 걸을 때나 상쾌한 것이지 혼자서 조용히 걷자면 금방 질려서 정신이 침잠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실제로 나는 걷는 동안 도리어 스트레스가 쌓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야 쉬러 온 게 아니라 취재 활동이 아닌가 말이다.
(보기엔 아름답지만 걷다보면 넌더리가 난다)
나는 기하학자가 숭배할 만큼 예쁜 삼각형을 이룬 돌문을 지난 뒤로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가족과 연인들이 정말이지 많이 보였다. 이 정도로 단란한 분위기가 감도는 산은 또 없을 듯했다. 그점에선 확실히 공원적인 가치가 높은 산이었다.
(정기를 받아갈 수 있다는 돌문바위의 멋진 삼각형)
그런데 등산객 중에서 무서우리만치 얇고 달라붙는 옷을 입은 여성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심한지 거의 회색으로 도색한 알몸으로 다니는 형상에 가까웠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니 이제 주변 등산객이 뭘 어떻게 입든말든 괜히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나로서도 저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는 물론 존중되어야겠지만, 아무 예고도 예감도 없이 아무렇게나 대뜸 넘어져 쓸리고 찍히고 까지고 꺾이는 게 산이다. 레깅스가 아무리 기능적이고 멋지다 해도 러닝이나 필라테스와는 다른 기준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무 낡고 보수적인 생각인가 싶기도 하지만, 위험하고 개방적인 것보다는 안전하고 보수적인 쪽을 택하겠다.
청계산에서 드문 조망점이라는 매바위에 도착한 건 3시 19분이었다. 보통 이쯤 되는 높이면 널찍한 마당바위가 있어서 거기 앉아 도시와 산을 내려다보며 간식을 먹게 되기 마련인데, 매바위는 고양이 이마만한 바위였다. 심지어 경사와 굴곡이 제법 되어 사진을 찍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니나다를까, 여기도 바위 주변에 우거진 나무 때문에 시야 하단은 가려져 있었다. 나는 맥이 빠져서 금방 매봉으로 걸어갔다.
(그나마 시야가 트인 매바위에서 바라보는 풍경)
매봉은 청계산에서 실질적 정상 취급을 받는 봉우리로, 매봉 바로 옆이라 오래 걸을 것도 없었다. 그리고 옥녀봉과 마찬가지로 마당처럼 다져져있는데다가 주변에 나무가 솟아서 풍경이 좋지 않았다. 덕분에 산을 정복했다는 실감이 도통 들지 않았다. 북한산 의상능선에선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보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길이 재미있을 때 얘기고, 이렇게 줄창 계단만 보며 오른 끝에 도달한 게 조그만 마당이라니 정말이지 맥빠지는 일이었다. 마당 가운데 사람보다 큰 표지석이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랄까.
(매봉의 거대한 표지석과 심각하게 잘 정비된 데크)
너도나도 줄을 서서 표지석과 사진을 찍는데, 나는 도통 흥이 나지 않아서 대충 멀리서 셀카를 찍고 옆으로 빠져 바위가 약간 솟아 있는, 마당바위와 엇비슷한 역할을 하는 공터로 갔다. 여기도 당연하다는 듯 행상이 아이스크림과 음료, 막걸리 따위를 팔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더위사냥을 사서 바위 위에 걸터앉아 먹었다. 이게 내가 처음으로 산에서 사먹은 아이스크림이었는데, 한입 먹자마자 지나온 인생을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은근한 더위와 끝없는 계단에 지친 몸에 단맛과 찬 기운이 들어오자 활기가 도는 것은 물론이고, 여가를 즐기는 게 아니라 노동에 시달리는 기분을 느끼고 있던 마음까지 행복해졌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강력한 기력 충전식인지 실감했다)
정말로, 나무그늘 속 바위에 앉아서 푸른 나무들을 바라보며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깨물고 있노라니 풍경이야 어찌되든 말든 아무렴 어떠랴 싶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산을 다니며 느낀 시각적, 정신적 보상과 전혀 다른, 말 그대로 뱃속에 때려넣어 온몸의 피로 퍼지게 하는 육체적 보상이었다. 나는 순식간에 만족했다. 숲과 계단뿐인 산이 어떻든 말든 잡념이 슬픔을 자아내든 말든 상관없었다. 산에 올랐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이만하면 별 네 개는 줄 수 있는 날이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숭배하게 되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얼음장같은 물속에서 놀다 나와 먹는 컵라면이 그러하듯, 등산의 열기에 지친 채로 먹는 아이스크림은 생명의 원천이었다. 나는 이날 이후로 식수의 냉기를 보존하는 일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나저나 잠시 장비 얘기를 하자면, 이날 나는 트레일러닝 가방처럼 어깨끈의 가슴 부위에 주머니가 달린 배낭을 처음 써봤는데, 저렴한 것이라 그런지, 원래 이 타입이 그런지 주머니로 가려진 가슴 부위에 땀이 차서 상당히 답답했다. 아마 성긴 메쉬 재질이라면 훨씬 나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주머니를 어깨끈 위에 달아서 공간이 남는 것과 가슴 위에 바로 달라붙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것 같아서 이 배낭은 팔아버렸다. 그 후로 가슴에 주머니가 달린 배낭은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하산은 가장 대중적이라는 원터골 방면을 택했다. 물론 지긋지긋한 계단길을 지나야 했는데, 내려가면서도 뭐 이렇게 끝도 없이 계단만 나오나 싶을 지경이었으니 이 길로 올라왔다면 화가 치밀었을 법했다. 실제로 등산객들 여럿이 혀를 내두르고 신음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계단이 길어도 중간중간 볼거리가 있으면 풍경에 대한 감탄이 고통을 줄여주는데, 이 길에는 그런 게 없었던 것이다.
(가장 대중적인 원터골-매봉 코스의 계단지옥)
경사가 완만한 곳까지 내려가자 개울도 흐르고 길도 흙과 돌이 섞인 곳이라 과히 나쁘진 않았는데 그 시점은 하산을 시작한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예 산길에서 빠져나온 건 5시경이었다. 시시껄렁한 산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넓어서 산행에 다섯 시간 가량 걸린 셈이다. 걸음이 빠르다면 세 시간만에도 완주할 수 있지 않을까? 가벼운 짐으로 빠르게 산을 타는 건 안전상 피하고 싶다고 생각해왔지만, 청계산에선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한 번쯤 윈터골이라고 잘못 볼 만한 원터골 거리는 좁은 골목이지만 제법 알차게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길이 너무 넓어서 둘러볼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북한산 입구보다 더 구경하는 맛이 있었다. 상가의 형상도 더 말끔하고 현대적인 게, 젊은 등산객의 취향에도 맞을 것 같기도 했다. 코스를 포함해서 이 방면 전체가 레벨1 등산객을 겨냥한 센터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청계산을 이제야 겪어본 나는 등산의 즐거움이나 경이를 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나저나 이날, 나는 청계산의 진짜 정상인 망경대가 군사 시설 때문에 올라갈 수 없다고만 알고 매봉에서 하산했는데, 나중에 검색해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망경대에 갈 수 있는가 없는가는 말이 서로 다르지만, 적어도 망경대 인근의 조망대까지는 문제없이 갈 수 있고, 그곳 풍경은 매봉보다 압도적으로 나은 듯했다. 등산로 정보도 대충 찾은대로 다 믿을 일이 아니다. 아무튼 이날은 시간도 애매하고 대단한 성취를 이룬 것 같지도 않아 밥도 안 먹고 귀가해버렸는데, 다음에 청계산에 간다면 넓게 트인 풍경을 즐기고 내려와 근사한 식사도 하고 싶다. 아마 광교산 청계산 종주를 할 날도 오겠지?
(gps가 튀었는데 옥녀봉을 거쳐 매봉으로 서서히 오르고 빨리 내려오는 코스다)
교훈
-등산의 즐거움을 전파하기에 청계산은 부적합하다.
-계단이 힘들다면 원터골-매봉 코스를 피하자.
-사고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지켜줄 옷을 입자.
-달고 시원한 음식이 더울 때 기력 회복에 매우 효과적이다.
-전망이 정말 좋은 곳은 매봉에서 더 나아간 조망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