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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과 인왕산의 가깝지만 신나는 길(개정)

-비경이 멀지만은 않다는 증명

by 이건해



사패산 도봉산 연계산행이라는, 산쟁이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산과 인연 없는 사람들이 보기엔 지옥훈련같은, 그런 개인적 업적을 세운 뒤로 한동안 산에 갈 틈이 나지 않았다. 친구들과 모여 외식을 하고 ‘퓨리오사’를 보기도 했고, 약속이 또 당일에 가서 엎어지기도 했다. 신발을 고치기도 했으며, 중고 캠프라인 등산화를 싸게 나왔다는 이유로 대뜸 사기도 했다. 지쳐 헐떡이는 심정으로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공모전에 단편 소설 두 편을 투고하기도 했다.


다시 지친 나는 6월 둘째 주에 가급적 가깝고 짧은 코스를 가기로 했다. 지난 등산처럼 길고 험한 길을 가는 건 좀 쉬고 싶었다. 육체적으로야 가능하겠지만 정신적으로 그만한 육체적, 시간적 소모를 버틸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가기로 한 것은 가까운 연세대 인근에서 출발할 수 있는 안산, 그리고 안산에서 이어지는 인왕산코스였다. 낮고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연계산행 맛을 느낄 수 있는 코스다. 사패산 도봉산이 적당한 규모의 뷔페라면 여긴 모듬초밥세트랄까. 성대하진 않아도 충분히 근사한 식사다.


이날 등산을 시작했다고 기록 버튼을 누른 건 10시 15분이었다. 늦게 일어나 긴 이동을 거친 후에야 간신히 들머리에 도착하는 나로서는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각이었다. 산이 가깝다는 게 이렇게 좋다. 그런데 연세대 코앞을 지나 골목길을 거쳐 전혀 엉뚱한 곳으로 들어가기도 하다 보니 실제로 안산 숲길에 들어선 것은 10시 47분이었다. 보통 이럴 때면 나는 시작부터 맥이 빠지기 마련인데, 이날은 들머리로 다가서면서 경사가 점점 혹독해져서 질리진 않았다. 거참 이상한 성격이다.


내가 들어선 길은 안산의 샛길에 가까워서 데크나 야자매트로 정비가 되어 있진 않았다. 대체로 붉은 흙길이었고, 숲은 제법 울창했다. 29도에 습하기까지한 날이라 텁텁하고 날벌레들이 성가셨다. 덕분에 순식간에 깊은 밀림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기분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날벌레는 모기든 아니든 지긋지긋해서 벌레 기피제를 뿌려대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안산도 제법 인근 주민에게 사랑받는 산인듯, 날씨가 궂은데도 샛길에서부터 등산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11시 5분에 크고 멋진 팔각정에 도착하자 한 무리의 중년 팀까지 나타났다. 모두가 조금도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 수준으로 든든히 채비한 게, 나처럼 연계산행을 하거나 둘레길을 길게 걸을 모양이었다. 물론 인왕산 연계산행이든 둘레길 걷기든 일상복 수준으로 다녀도 크게 불편할 일은 없을 테지만, 등산에 과한 준비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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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뒷산 같으면서도 제법 산 느낌이 짙다)


팔각정에서 봉수대까지는 정비가 잘 된 오르막이었다. 길도 넓고 여유롭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지만 제법 상쾌하게 걸었다. 그 와중에 앞에 가는 아저씨가 휘두른 등산 스틱에 가볍게 찔리는 사고를 당했는데, 이건 등산 스틱을 든 사람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안된다는 수칙을 잊은 내 잘못이었다.


11시 25분에는 봉수대에 도착했다. 제법 넓고 깔끔하면서도 다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었는데, 설명을 읽어보니 서울 600년을 기념하여 1994년에 복원했단다. 그때 산 역사책이 아직도 책장에 꽂혀 있는 나로서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 같지만 명백히 30년이 넘은 일이다. 이곳이 진짜 유적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낡은 맛이 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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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에서 보는 풍경이 제법 트여있다)


북동쪽을 향해 탁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그리 높지 않은데도 봉수대답게 경치가 시원스러웠다. 인왕산, 북악산은 물론이고 남산도 보이는 게, 들인 노력에 비해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주변에는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러닝 복장에서 등산 복장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북적이며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제법 만족스럽고 정이 가는 장소였다. 왜 여기 와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봉수대를 구경한 뒤 곧장 걸음을 옮겨 무악재로 내려갔다. 옆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이곳은 험난한데다 호랑이가 나타나기로 악명이 높아서, 서대문 독립공원 자리에 열 명이 모이면 주둔했던 군사가 동행해서 넘는 곳이란다. 요즘 산이 말끔하게 정비된 데다 맹수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서울 근교 산에서 보는 건 기껏해야 개와 고양이 정도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정비된 내리막을 보며 앞서 가는 아저씨의 아크테릭스 가방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자니, 별안간 아저씨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정비된 길도 멋진 장비도 사고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등산을 즐긴다면 언제 어찌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무악재를 넘던 사람들처럼 겸허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 일이다. 기왕이면 실손보험도 들고.......


나무가 우거진 내리막을 조심스럽게 지나자, 갑자기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이 방면이 뜬금없이 암릉지대로 변해버려 전망대처럼 시야가 트인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풍경 자체는 봉수대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내 발밑과 그 풍경 사이를 잇는 능선이 거친 바위라는 게 새삼 감탄스러웠다. 비록 북한산 같은 험산의 지독한 길과는 다르지만 안산의 대부분을 구성한 흙길에 익숙해진 터라 뜬금없는 바윗길은 장엄한 고난을 형상화한 땅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얇게 모래가 덮인데다 비까지 맞아 여느 암릉 못지 않게 위험하기도 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걸으며, 갑자기 마주한 이 황량한 기적의 길에 감탄했다. 남들이야 보통 오솔길 꽃길이 좋겠지만, 내게는 이런 돌길이 최고의 선물이다. 짧디 짧아서 라면 국물만 먹는 듯한 수준이라도 야자 시간에 친구한테 졸라서 얻어먹듯 기쁘고 즐겁기 그지없었다. 행복도 등산의 즐거움도 멀고 험하고 거창한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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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험난한 무악재의 멋진 길)


암릉지대를 지난 뒤로 숲에 들어가자 빗방울이 좀 더 굵어졌다. 그러나 아직 하드쉘 후드를 뒤집어 쓸 필요까지는 없는 정도로, ASMR 콘텐츠에서나 들을 법한 숲의 빗소리를 만들어 상쾌하면서도 안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에 비 내리는 숲 어딘가에서 까치와 이름모를 새까지 번갈아 지저귀니, 인세가 아닌 어느 신비한 공간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산행 중에선 ‘우중산행’이 최고라는 산꾼도 있던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만했다. 숲이 비를 맞아 풀잎 하나하나가 소리를 내며 풀내음을 피워올릴 때, 숲은 시각으로만 접할 수 있는 배경에서 청각과 후각 모두를 점유하는 공간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 맛보는 우중산행의 맛에 취해서 정신없이 걸었다. 어찌나 정신없이 걸었는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산을 다 내려갔을 지경이다. 이상하다 싶어 지도를 다시 꺼내본 나는 12시 39분에야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무악재 하늘다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이 잘 정비된 것치고 헷갈리는 구석이 있었다.


아무튼 무악재 하늘다리는 걸어서만 지날 수 있는 다리로, 가운데에는 짐승도 지나라고 따로 통로를 마련해놓은 생태 다리이기도 했다. 어디에나 있는 구름다리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흙길을 그대로 걷는 듯한 다리라 각별한 맛이 있었다. 게다가 다리를 건너며 난간의 유리를 보니 새가 부딪히지 않게 점무늬가 인쇄되어 있었다. 적당히 시늉만 한 게 아니라 심혈을 기울여 만든 다리인 모양이다. 호랑이가 사람 잡아먹던 무악재에서 이제 사람이 동물 살 길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무악재 다리를 건너자 거짓말같이 인왕산 산허리였다. 사패산에서 도봉산으로 갈 때는 한참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느라 기운이 빠졌는데, 이곳은 그런 후퇴를 덜 겪어서 마음에 들었다. 낮은 산 여럿을 다니는 것도 제법 매력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인왕산 남서쪽에서 오르는 길은 정비가 대단히 잘 되어 있어서 오래도록 데크계단을 올라야 했다. 산을 오른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을 지경이었는데, 그나마 다행한 것은 시야가 트여 있어 도시 풍경을 가까이서 내려다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매순간 노력과 고통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다. 노동의 보수가 제때 다 나오는 일과 같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한참 나중에 결정된 일이지만, 이때쯤 정신없이 투고한 단편 소설 두 편 중 한 편이 바로 ‘장어는 어디로 가고 어디서 오는가’로, 단편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그동안 내가 받아본 상 중에서 가장 큰 상이며, 국내 공모전의 단순 규모를 따져봐도 상당히 명예로운 상이다. 물론 그런 상을 받아봤자 저명한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인생 역전의 기회도 아니니 ‘그게 뭐 어쨌는데?’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나로서는 숨이 트이는 개인적 업적이자 노동의 보수였다. 이 상을 받지 못했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글 쓰기를 중단했을 것이다. 요컨대 인간은 보상 없이 노력할 수 없고 길만 보며 산을 오를 수 없다는 말이다.


1시 22분에는 불암산에도 비슷한 게 있는 해골 바위가 나왔다. 커다란 바위 곳곳이 풍화되어 실러캔스의 화석처럼 보이는 바위다. 다만 여기는 락카로 별별 낙서를 해두어서 한층 더 세기말적 폐허의 분위기가 짙게 감돌고 있었다. 마치 ‘매드맥스’의 황야에서 볼 법한 광경이었는데, 근처에 아이를 동반한 가족 등산객이 오가며 사진을 찍는 모습이 위화감을 자아냈다.


다행히도 거기부터는 데크길이 사라지고 비교적 평탄한 바윗길을 걸을 수 있었다. 숲 사이로 이어진 길을 지나니 도로 데크길이 나왔지만, 침엽수가 운치있게 늘어선 길을 걸으니 능선만이 멋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엽수 길에는 신기하게도 그런 고풍스러운 정취가 있다. 내가 아직 끝내주는 활엽수 길을 가지 못해서 그런 걸까?


데크길을 빠져나가자 순식간에 주변이 탁 트인 인왕산의 중간이 나왔고, 회백색의 한양도성 성벽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서울의 중심을 둘러싼 성벽 안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 근방에서 길을 잃고 조난될 확률은 지극히 낮지만, 그래도 성벽처럼 또렷하고 아름다운 길잡이를 곁에 두고 걷는다는 건 제법 든든한 일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돌리고 오르막을 따라 걸음을 옮겼으나....... 성벽을 따라 오르는 길은 대단히 경사가 심한 계단길이라 제법 힘들고 지쳤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적당히 완만한 흙길을 걸었는데, 그건 전혀 다른 방면인 모양이다.


이날 나는 메리노울 혼방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가는 마당에 메리노울이라니 제정신인가 싶을지도 모르겠는데, 메리노울은 습기를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고 세균 번식을 방지하는 성질이 있어 계절을 크게 가리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입고 다녀보니 바람때문에 몸이 차게 식지도 않고 땀에 절어 몹시 괴로운 지경에 처하지도 않았는데, 다만 양모 특유의 은근한 까끌거림이 거슬려서, 나는 28도부터는 이 티셔츠를 입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틀 이상 같은 꼬락서니로 돌아다녀야 하거나 땀을 흘린 채로 밀집 공간에 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소취 기능도 필수적이진 않을 것이다.


험로를 타진 않았지만 산을 하나 반 타니 슬슬 지치고 늘어졌다. 날도 덥고 줄곧 경사도 심했던 탓이리라. 그대로 버티길 포기하고 그늘에 앉아 양갱 반 개를 먹었다. 주변 곳곳에서도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하는 게 보였다. 이곳도 도시 중심에 있는 만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산이었다.


숨을 돌리고 조그만 철계단을 몇 번 오르자 인왕산 정상부로 이어지는 능선이었다. 사방이 트여 눈에 다 들어오지도 못할 만큼 넓은 서울의 모습이 펼쳐졌다. 내가 디딘 길은 짙푸른 인왕산으로 이어졌는데, 길 옆에는 회백색의 성벽이 척추처럼 자리잡고 있어 거대한 짐승의 등에 오른 듯 벅찬 느낌이 들었다. 북한산 숨은벽과 도봉산 포대능선이 장엄한 자연 속을 가로지르는 암석의 길로 빛나는 곳인데 비해, 인왕산의 능선은 인간이 산 위에 낸 길과 성벽이 감동을 주는 곳이었다. 이곳이야말로 정말 가깝고 쉽게 올 수 있는 곳인데, 이제 와서 접했다는 게 한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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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의 능선도 높이를 잊을만큼 각별한 장관을 보여준다)


능선에도 사람이 제법 많았다. 그중에서 어떤 초로의 남자가 신은 등산화가 눈길을 끌었다. 메쉬와 인조가죽으로 만들어진 저가의 신발이었는데, 접히는 부분이 다 터진 것은 물론이고 뒷굽도 마모되어 중창이 반쯤 드러나 있었다. 당연히 신고 다니기에 위험한 지경이었으나, 나는 그런 생각보다는 존경심이 먼저 들었다. 몇 킬로를 걸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에 비해 여차하면 새 등산화를 구경하는 나는 낭비의 화신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


성벽을 따라 걷는 동안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혼자 걷는 모습도 보였다. 그 어떤 산에서도 어지간해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맞은편에서 오던 어떤 중년 남자도 감복한듯, 혼자 산에 오기가 어려운 일인데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나도 공감했다. 그러나 걸으며 문득 생각해보니, 소년이 등산하는 걸 대견하게 여기는 이유가 의문이었다. 엄밀히 따져보면 산을 타는 게 화면 속에 펼쳐진 소환사의 협곡에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특별히 우월하거나 도덕적이거나 칭송받아야 할 이유가 따로 있진 않다. 건강에 좋기야 하겠으나 중학생이면 건강과 체력 증진에 특별히 신경을 쓸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결국은 이것도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친근하고 가치있다고 느껴지는 취미를 반기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성벽을 따라 걷는 인왕산 서쪽의 평탄한 능선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제법 험한 암릉이었다. 길이는 짧지만 밧줄로 된 난간을 잡지 않으면 오가기 힘들 정도로 디딜 곳이 마땅치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가족단위 등산객이 잠시 스릴을 즐기기 나쁘지 않은 정도였으니, 경치도 좋고 재미도 있고 너무 어렵지도 않으며 유적도 접할 수 있어 더할 나위가 없는 코스라고 할 만했다. 짧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인데, 연계해서 걸을 산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큰 단점도 아닐 것이다. 작년에 친구들과 등산을 해보겠답시고 관악산부터 갈 게 아니라 이쪽을 알아봤다면 훨씬 나았으리라는 후회가 몰려왔다. 둘레길에서 약간 더 어려운 단계로 올라가는 관문으로 써먹을 일이 돌아오길 바랄 따름이다.


난관을 넘어서면 나오는 인왕산의 정상부는 산 정상치고는 완만하고 넓어 뒷산의 고갯길 정도로 느껴진다. 실제로 정상은 치솟은 봉우리가 아닌 터라 시야가 나무에 가려져 옆에 있는 바위에 올라서거나 근처로 이동해야 했다. 오랜만에 도착한 정상의 표지에 다가가자, 옆에 앉아있던 중년 남자가 ‘이제야 사람이 왔군’ 이라며 전설 속의 보물을 지켜온 수호자 같은 소리를 하더니, 스마트폰을 내밀며 사진을 부탁했다. 어지간하면 혼자 찍고 내려갈 텐데, 기다려서까지 사진을 찍는 게 대단하다 싶었다. 벼르고 별러 겨우 인왕산을 정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사진도 찍은 다음 성벽 옆의 그늘에서 삼각김밥을 먹고 숨을 돌렸다. 죽을 고생을 하며 성벽을 쌓은 선조들은 그 성벽이 적군을 막는 용도가 아니라 재미삼아 산에 오른 사람이 햇빛 피하는 용도로 쓰일 거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군사시설이 쓸모를 잃고 용도가 변경되는 건 그것이 그대로 제 역할을 하는 것에 비해 아름다운 일이다.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드는 것처럼. 그러니 조상님들도 양해해주리라 믿는다.


2시 20분에 도착해서 10분쯤 쉬다 걸음을 옮겼다. 인왕산 정상에서 컨디션에 따라 북악산까지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여기까지 오는데에 시간도 예상보다 많이 걸렸고 피곤하기도 해서 하산하기로 했다. 인왕산에도 ‘기차바위’가 있다는 얘기를 최근에야 들어서 그곳을 거쳐 가고 싶기도 했고.


인왕산 기차바위는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옆으로 빠지는 길에 있었다. 찾기가 어려운 곳도 아닌데 왜 이제야 알았는지 한탄스러웠다. 최고의 명소이자 포토스팟이라고 팻말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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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기차바위와 거기서 보는 북한산의 모습은 서울 중심가에서 가장 가까운 비경이라 할만하다)


내가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기차바위 구간으로 들어서자마자 벅찬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차바위는 거대한 암석 한 덩이로 된 긴 경사로였는데, 하늘을 쭉 질러가는 회백색의 길과 흰 난간이 어우러져 천상과 지상을 잇는 관문처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정도로 거대한 암릉 경사로야 북한산, 수락산은 물론이고 아차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완만하면서도 정상부로 이어져 주변이 다 트인 곳은 아직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서쪽으로는 도시와 한강이, 북쪽으로는 광대한 북한산 산자락과 평지 곳곳을 채운 마을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북한산 숨은벽 같은 곳에서 보는 봉우리들이 천상의 풍경이라면 이곳은 천상과 지상 모두를 조망할 수 있는 중간지대라 할 만했다. 유럽에 알프스가 있다면 서울에는 북한산과 그것을 바라볼 인왕산이 있다고 자신있게 말해도 좋지 않을까? 가깝고 낮아서 쉽게 갈 수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만한 명산은 좀처럼 찾기 힘들 것이다.


기차바위를 통해 홍제로 하산하는 길은 암릉에서 흙길로 서서히 바뀌었는데, 그러면서 회갈색으로 메마른 숲이 멋지게 굽은 침엽수, 그리고 초록이 우거진 활엽수로 바뀌었다. 변화하는 숲의 모습을 보는 것도 각별한 맛이 있었다. 다음에는 반대로 이쪽을 통해 올라오고 싶기도 했다.


세 시 반에는 하산을 마쳤다. 어딘지 모르고 내려온 이곳은 개미마을로, 전후에 형성된 판자촌이 유래라는 팻말이 있었다. 나는 생활에 다소 불편을 느낄만한 경사로를 걸어 내려가는 동안 개미마을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인근의 건물 대다수가 몹시 오래된 단층 건물로, 기와집이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근사한 단독주택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고색창연했고 이따금 지붕이 슬레이트로 되어 있거나 방수포를 씌운 곳도 보였다. 도로보다 낮은 곳에 모여있는 집들은 답답하리만치 서로 붙어있었는데, 그중 어떤 집은 장독대를 갖추고 있기도 했고 빨랫줄에 빨랫감을 널어두기도 했다. 벽화로 꾸며놓은 벽도 보여 부산의 명소인 흰여울마을이나 비석문화마을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 생활감을 다소 상실한 그곳들에 비해 개미마을은 여전히 오래된 거주지로 존재하는 듯했다. 산 하나 넘었다고 이런 풍경이 펼쳐질 줄 상상도 하지 못했던 나는 자신의 좁디좁은 식견과 얕은 지식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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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 익숙한 사람에게 사뭇 달라보이는 개미마을)



길을 따라내려가는 동안 경사가 완만해지자 단층 건물은 줄어들고 차츰 연립주택이나 맨션이 나타나더니 곧 낡은 아파트와 번듯한 상가를 갖춘 신축 아파트가 차례로 나타났다. 땅이 낳는 부를 형상화한 듯한 길을 걷고 나니 영 개운치 않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암담함에 사로잡혀 있어봐야 특별히 좋을 것도 없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편이 낫다. 나는 하룻동안 찍은 사진을 잘 갈무리한 뒤에 주인이 버젓이 있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달아오른 오후의 대로변을 걸어 홍제역에서 열차를 탔다. 이쪽에 온 김에 홍제 인공폭포도 보고 싶었으나 지쳐서 포기했다. 오늘은 산을 두 개나 탔고, 전혀 모르던 풍경도 여럿 눈에 담았다. 이만하면 배부른 하루다. 멀리 가야만 새로운 경험과 감탄과 즐거움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가슴 깊이 새기며, 나는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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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

가까운 산도 멋진 곳이 많이 숨어있다.

등산 스틱을 든 사람 바로 뒤에 붙지 말자. 찔릴 수 있다. 물론 사용할 때도 등산 스틱 든 손을 크게 휘두르지 말자.

메리노울 티셔츠에 이점이 많지만 여름엔 느낌이 까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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