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양 팀장을 불러낸 약속 장소는 재건축이 결정되어 철거하던 도중에 무슨 문제가 발생해서 공사가 중단되고 방치된 연립주택 단지의 중간이었다. 당연히 인적이 드문 정도를 넘어서 생명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고, 훔칠 물건도 부술 물건도 없으니 감시 카메라도 없었다. 심지어 바닥이나 벽 곳곳에 커다란 균열마저 보여 언제 어디가 무너질지 불안할 지경이었다.
장소를 고민할 때, 예선은 보는 눈이 많은 카페나 감시 카메라의 촬영 범위에 있는 공원 따위 공공 장소부터 떠올렸다. 양 팀장은 주도면밀한 동시에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 수준의 비일반적 욕구를 안고 있는 사람이므로 갑자기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그렇게 된다면 증거가 많을 수록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원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양 팀장은 평판을 중요시하는 자인 만큼 남의 눈과 귀가 많은 자리로 불러내면 마음에도 없는 말만 듣기 좋게 꾸며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있든 없든 듣기 좋고 바람직한 사죄와 약속으로 구속하는 편이 좋은 거 아닌가요?”
예선이 묻자 정원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예선 씨의 기분은 좀 풀릴 테고, 일시적으로 양 팀장의 행동을 제약하는 효과도 있긴 할 겁니다. 하지만 녹음을 하든 각서를 쓰든 협박으로 몰면 효력은 사라질 테고, 그는 무슨 수를 써서든 예선 씨에게 다시 위해를 가할 겁니다. 위해를 가하지 않더라도 어디엔가 보이지 않게 숨은 벌레처럼 예선 씨라는 존재의 이미지나 부산물들을 소비하며 살아가겠죠. 그럴바에는 차라리 남의 눈치 볼 필요가 없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말하게 하고 근본적으로 굴복시키는 게 뒤탈이 일어날 확률이 적을 겁니다.”
제약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마음대로 떠들게 해야 한다는 말에 예선은 잠깐 충격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쏟아내는 흉한 말과 감정을 모두 견딜 수 있을까.
그러자 정원이 그녀의 표정을 살피곤 말했다.
“또 평범한 사람의 심리를 고려하지 못했군요.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의 위험을 걱정해서 지금 무리하는 것도 현명한 대처는 아니겠죠.”
예선은 역겨움과 두려움을 억누르고 가능한한 침착하게 생각했다. 양 팀장이라는 작자가 과연 마음이 편한 쪽으로 피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다 들어봐야겠어요. 어차피 언젠가는 모든 것을 대면해야 했을 테니까요.”
정원은 다소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대야 할 환부를 보지도 손대지도 않고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옳은 선택이에요.”
그러나 고통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상처가 곪은 게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런 고통은 참는 수밖에 없다. 예선은 무엇을 다시 견디고 싶지 않았지만 살기 위한 선택지는 하나임을 알았다.
양 팀장은 약속대로 자정에 혼자 나타났다.
평소대로 말끔한 얼굴에 세미 정장 차림. 하지만 예선은 그 얼굴 너머에서 들끓는 분노를 볼 수 있었다. 회사에 짧게 있었던 신입이 중요 파일을 삭제하고 아무렇게나 퇴사했을때 수습하며 지었던 표정과 같았다. 예선은 이 정도로 진심어린 증오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에 새삼 이 순간의 모든 게 두려워졌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그 사실이 양 팀장의 분노와 증오를 배가시킨다는 것을 고려해도 위안이 훨씬 컸다.
양 팀장은 두 사람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 멈춰섰다. 어느샌가 우수에 젖은 듯 안색이 몹시 어두워졌다.
“예선 씨가 원하는 대로…… 사죄하러 왔습니다.”
주저하듯 말하며 고개를 떨구는 양팀장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예선은 그가 오자마자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협박을 하냐며 화를 내고 뻗대리라 예상했기에 충격마저 느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절대적으로 불리해졌음을 깨닫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걸까.
예선은 있는 힘껏 비아냥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다 자신이 경멸하는 인간이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알고 온 거냐고 묻고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 희화화된 대사라 얕보일 듯해서 그만두었다. 어떡하면 좋을지 정원에게 시선으로 묻는 것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 할 수 없었다.
예선은 결국 양 팀장을 노려보는 것으로 의사 표현을 대신했다. 양 팀장은 그런 그녀를 잠시 응시했다. 예선은 그 시선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것을 보았다. 혹은 보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두려움이 그런 착각을 빚어낸 것인지, 아니면 착각이 두려움을 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간 뒤, 옆에서 정원이 기계 장치가 부착된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곳에 작동중인 녹화, 녹음, 통신 장비는 없습니다. 그런 신호를 포착하면 경고음이 울릴 테니 시험해도 좋습니다.”
양 팀장이 증거 수집을 꺼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태를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솔직하게 털어놓을 테니 녹음해도 괜찮아요.”
그러고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뒤로 아버지는 무척 힘들어하셨어요. 할아버지 없이 어렵게 자라셔서 오래도록 효도하고 싶어하셨거든요. 그런 슬픔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사진보다 나은 방법으로 보존하지 못한 것을 오래도록 후회하셨죠. 그 모습을 본 이후로 나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존하는 일, 그리고 그걸 넘어서 보존된 기록으로 사람의 살아숨쉬는 양상을 다시 구현하는 일에 깊이 집착하게 됐어요. 예선 씨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시뮬레이션으로 일상을 재현하는 시도도 그런 맥락의 일환이었다고 알아주면 좋겠어요.”
예선은 양 팀장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그러나 믿지는 않았다. 흔하고 뻔한 이야기라 신빙성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예선은 양 팀장의 말 자체를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가 양 팀장의 사죄에 대해 판단할 근거로 삼으려던 것은 오로지 그의 눈빛과 몸짓, 그리고 목소리 같은 언어 외적 요소뿐이었는데, 지금 양 팀장에게선 그런 것들 중 의미 있는 건 무엇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입력된 텍스트를 음성으로 쏟아내는 기계처럼 보일 뿐이었다.
“저를 택해서 데이터를 모은 것은 제가 업무로 채찍질해서 다루기 만만했기 때문이고요.”
예선의 말에 양 팀장은 곧장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주저하듯 입을 떼었다.
“나는 예선 씨를…… 특별하게 생각했어요. 영리하고 일을 잘 하고 자기 작업을 사랑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고 소심해서 거절을 잘 못하는 탓에 스트레스 받는 모습이 옛날의 나를 보는 것 같았죠. 그래서 더 공감하고 마음을 쓰게 됐고, 더 성장하고 잘 되길 바라게 됐어요. 그래서 한 사람의 모습과 행동 양식을 보존해야 한다면 그런 예선 씨말고는 고려할 수 없었던 거예요. 물론 이런 식의 생각이 편치는 않을 거 이제는 잘 알아요. 평소에 잘해주기만 한 것도 아니고 일로 휘둘러대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무리한 요구까지 했으니 부담스럽고 불쾌하기도 하겠죠. 하지만 내가 예선 씨의 마음을 얻겠다든가, 더 가까워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어쩌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타인과의 교류를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 이성적 바람은…… 그저 내 멋대로 나와 닮았다고 생각한 예선 씨의 언행과 예선 씨의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보존해 두고 싶었다는 거예요.”
양 팀장의 말은 번지르르했다. 듣기에 아름다운 단어와 감성적인 서사가 가득 담겨 클라이막스에서 오해를 풀려고 노력하는 로맨스 소설의 남주인공 같은 느낌을 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오히려 과도하게 잘 짜여진 이야기 같기만 하고 도무지 현실 세계의 사과로도 변명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그저 자신의 잘못과 범죄를 효율적으로 아름답게 포장해서 남을 현혹하고 자기 체면을 보전하는 기술에 불과했다.
양 팀장은 아무것도 미안해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과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고, 용서를 받아 살아남으려면 말 그대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도 부족한 상황이라는 사실조차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선은 무엇이 그를 이렇게까지 어리석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여러모로 불쾌하고 음험하고 제정신이 아닌 모습과 행태와 욕망을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회사 업무는 충실히 수행해서 능력을 인정받고 이너 서클에 속한 사람이다. 방식의 타당성을 따지지 않고 보면 잡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힘은 누구나 인정할 만 했으니 영리하다는 평도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토록 비참하리만치 추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며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게 믿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된 원인 중에 자기 자신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과 인간 욕망의 모든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내 나름의 방식으로 특출나지도 유별나지도 않게 살아왔는데, 그는 대체 내게서 무엇을 보고 이렇게까지 엇나간 것일까. 예선은 자신에게 이런 이상한 사태를 유발하는 인자가 있다면 깨끗이 절제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으나,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 시선이 있는 만큼 자신의 무엇을 고쳐서 될 일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고, 절제를 해야 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저 사람이다.
예선은 양 팀장을 응시하며 천천히 말을 골랐다.
“팀장님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했는지는 이제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들어봤자 사실일 것 같지도 않고, 애초에 본인도 잘 모르는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제 생각을 말해보자면, 팀장님은 무슨 시답잖은 이유로 제가 잘 되길 바란 게 아니라, 그냥 갖고 놀 장난감이 필요했던 거예요. 그래서 채찍질을 했다가 당근을 주길 반복하면서 반응을 즐기고, 그러면서 동시에 제가 팀장님 말 한 마디에 움찔거릴 정도로 종속되게 만들었죠. 별일이 없었다면 그 수준을 계속 이어갔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박 주임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초조해져서 자신의 영향력을 한층 더 확실히 해두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모델링을 거쳐서 옷까지 벗기고 싶어졌겠죠. 그게 다음 단계를 위한 포석이었는지 아니면 그것 자체도 지배력을 체감하는 유희의 일종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당하고만 있었다면 더 심한 짓으로 발전했으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어요. 아마 유사 성행위부터 변태적인 성행위까지 요구했겠죠. 성격상 촬영까지 해서 안전장치로 삼았을 테고요.”
양 팀장은 답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극심한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하듯이 눈가를 매만졌다. 잠시후에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감당하기 히든 비통함에 젖은 것처럼 흔들렸다.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의심하고 비난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아무리 좋은 의도가 있었다 한들 예선 씨의 의사와 무관한 짓을 해서 불쾌하게 만든 건 분명 내 잘못이니 몇 번이고 사과할게요. 내가 나빴고, 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내가 그렇게 끔찍한 인간은 아니에요. 내가 가장 경멸하는 게 추잡한 성적 욕망이라고요. 대체 어떡해야 믿어주겠어요? 혈서라도 쓸까요? 거세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일부러 과격한 얘기로 기세를 꺾으려 한다는 걸 알고 예선은 화가 치밀었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팀장 님한테 생식기가 있든 없든 알 바 아니니까 추접스러운 소리는 집어치우시고요, 인정하는 게 뭔지나 말해보세요. 과도한 일을 떠넘겼다 치워주는 식으로 길들이려고 한 건 맞죠?”
예선의 원래 일과 맞지도 않고 심지어 무의미한 작업에 시달린 시간은 다시 생각해도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단순히 하기 싫고 몸과 마음이 고달픈 지경을 넘어서 영혼이 자기와 맞지 않는 틀에 들어가 천천히 짓눌린 끝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틀리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건 고통이라는 단어로도 부족했다. 예선이 아는 바로는 적어도 한국어에는 그런 고통을 표현하는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렇기에 양 팀장이 최소한 그 부분이라도 인정하면 마음이 다소 가벼워지리라 생각했다. 그거라도 진심으로 사과하면 이 이상의 처벌은 그만둘 생각도 했다. 정당하다 해도 남에게 고통을 되돌려주는 심정이 편치는 않았기 때문이다.
양 팀장은 거의 곧바로 대답했다. 거의와 곧바로 사이에 어느 정도의 고민이 있었는지 체감할 수는 없었다. 예선은 양 팀장이 대답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준비된 대답을 떠올리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했다고 느꼈다.
“그건 예선 씨의 오해예요. 아니면 박 주임의 망상이겠죠.”
또 박 주임을 걸고 넘어지는구나. 또 내가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고 치부하는구나. 예선은 뒤통수부터 미간까지 휘저어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다. 일생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수준의 분노로 의식이 들끓는 감각이었다.
한편으로 예선은 함께 모욕당한 정원이 걱정되어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감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애초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양 팀장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선은 감정이 거의 없는 것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순간도 있음에 놀랐고, 정원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마음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럼 제 모습을 모델링하고 시뮬레이션에 투입하는 일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존하는 지적 활동의 순수한 기쁨이 아닌…… 다른 층위의 쾌감도 느꼈죠? 팀장님이 말한 감성 스토리 정도로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어요.”
예선은 성적 쾌락만을 의미하고 싶지 않아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말하려던 것은 훨씬 다층적인 의미였다. 지적 활동에 포함되지 않은 모든 종류의 욕망과 쾌락. 단순한 성욕부터 복잡한 지배욕까지 분명 무엇이든 있을 것이었다. 예선은 양 팀장이 그것만이라도 인정하길 바랐다. 가슴속의 분노가 더이상 담아두기도 쏟아내기도 괴로운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양 팀장은 아까보다 약간 더 뜸을 들이더니, 싸늘한 조소가 감도는 표정을 띠며 답했다.
“예선 씨가 무슨 말을 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시뮬레이션을 만들며 지적인 즐거움 이외의 쾌감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 내가 아끼는 사람의 사진을 액자에 넣어두는 것과 같은 정도의 애틋한 감정일 겁니다.”
이 개새끼.
예선은 영혼의 일부가 끓어오르다 못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이제 줄 수 있는 기회는 모두 주었다. 참을 수 있는 것도 모두 참았다. 상대는 사죄를 한다고 와놓고 자기 잘못은 그저 좋은 의도에 따른 행동이었는데 오해를 낳았을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이다. 정당한 벌을 가하는 게 부담스럽고 과정이 어렵다고 주저하고만 있어선 결국 어떤 식으로든 또 이용당할 게 분명했다.
“잘 알았어요. 팀장 님과 더 할 얘기는 없네요. 돌아가세요. 인사팀에도 보고하고 시민단체에도 제보하고 소송도 시작할 테니, 제 오해와 망상이 심한지 어떤지 그들에게 판단을 맡겨보죠. 그 정도로 난리법석을 피우면 결과가 어떻든 팀장님 연줄이 아무리 짱짱해도 무사하진 못할 테니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할 준비 잘 하시고요.”
예선의 말이 끝나자 양 팀장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였다. 그러더니 다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그 사이로 쉰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 예선 씨. 왜 이렇게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거예요? 나는 그렇게나 노력했는데…….”
그의 말은 애걸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결국 거기에조차 진짜 인정도 사과도 없었다.
예선은 돌아서서 출구로 걷기 시작했고, 정원이 뒤를 따랐다.
예선은 분노의 원인으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식는 것을 느꼈지만 동시에 슬픔과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양 팀장이 최소한의 진실이라도 말하며 사과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역겹고 끔찍한 것이라도 용서해볼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 자체는 잘못이 아니니까 그로 인해 꼬리를 물고 이어진 잘못들도 어떻게든 사고였다고 생각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그게 정말 옳은 생각인지, 또다른 회피가 아닌지, 가능하기나 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런 가능성을 지우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감정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아도 선의로 행동하는 정원을 본 덕에 할 수 있었던 낙관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잘못된 것이었다. 옭아맬 게 없는 상황에서도 양 팀장은 남을 속여서 자기를 지킬 따름인 인간이었다. 예선은 그를 철저히 자기 인생에서 도려내기로 했다.
이제 마주해야만 하는 새 싸움은 다른 방식으로 괴롭고 지치고 비참하며 금전적으로 재난을 초래할 것이다. 예선은 앞에 놓인 가시밭길이 가야만 하는 정당한 길이 아니라 희망을 잘못 저울질한 대가를 치루는 형벌의 길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뒤에서 양 팀장의 신음 같은 고함이 들렸다.
“이렇게 가면 난 죽을 겁니다, 예선 씨. 생각 잘 해요!”
미친 새끼. 예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출구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마자,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끓는 듯한 소리와 뒤섞인 고함 혹은 비명.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원의 걸음이 멈춘 것을 보니 정말로 들려오는 소리였다.
신음과 함께 액체가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한계 이상으로 취한 사람이 고통 끝에 구토할 때 나는 것과도 비슷한 소리였다.